이온이 저것들 중에 혹시 아스타틴의 것도 섞여 있나 싶어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발견한 페드로가 돌아와서는 자연스럽게 편지들을 쓸어 갔다. 이온은 어느새 그것들을 책상에 정리해 쌓아 두는 그에게 물었다.
“대공께 만남을 청하는 이들이 많은가 봐요.”
“워낙 화려한 등장을 하셔서 말이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겉으로야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가볍게 흔들리는 분은 아니니.”
약간 투덜거리는 투로 말한 페드로의 대꾸에 이온은 살며시 웃었다. 신분 차이는 엄청나지만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페드로는 8년 동안 내내 대공의 곁에 있었던 거죠?”
“어쩌다 보니 벌써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북부에서…… 카밀루스는 어땠나요?”
대공이 아니라 카밀루스.
순간적으로 말실수했다는 걸 아직 인지 못 한 이온을 페드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침 편지 정리를 마친 그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책상 밖으로 빠져나오며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영주로서 적당히 잘하셨습니다. 몬스터도 잘 잡으시고, 부하들에게도 괜찮은 상관이었고.”
“아, 네.”
가식을 떨어야 하는 사교적인 장소도 아닌 데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이런 목적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드문 이온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로도 딱히 대화를 잇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서 말이 뚝 끊겼다.
페드로는 책상 위를 정리하기도 하고, 커튼도 묶으면서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이온을 중간중간 살폈다.
이전엔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카밀루스의 말대로 꽤나 미인이었다.
가지런한 눈썹이나 곧은 코, 선이 고운 입술. 무엇보다 차분한 분위기를 완성해 주는 눈이 그랬다.
거기에 몸집이 조그맣고 얼굴도 새하얀 데다가, 특유의 여리고 순해 보이는 인상이 더해져 꼭 지켜 주고 싶게 생기긴 했다.
카밀루스가 애타 하는 이유를 약간은 이해하게 된 페드로가 옷걸이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더 걸칠 걸 드릴까요?”
날이 싸늘해진 탓에 방 안 온도가 썩 낮아 권유한 것이었다. 이미 얇지만 겉옷을 하나 걸치고 있던 이온은 고개를 흔들며 겸양의 말을 흘렸다.
“괜찮아요.”
그러나 추운 듯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을 본 페드로가 카밀루스의 겉옷을 가져다주었다. 이온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며 이래도 되냐는 뜻으로 넌지시 물었다.
“……전하의 것 아닌가요?”
“걸치고 계시면 대공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아마 저한테 잘했다고 칭찬도 하시겠죠.”
“…….”
괜찮으니 어서 입으라고 손짓하는 것에 이온은 그것을 펼쳤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두껍고 묵직했다. 그뿐인가, 카밀루스의 체격에 맞추어 커다랗기까지 한 그것을 이온이 마치 아버지 옷 빌려 입는 느낌으로 어깨에 걸쳤다.
“잠시 기다리세요. 따뜻한 물도 가져오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남의 방에 혼자 남게 된 이온은 한숨을 토했다. 그러다 제 몸을 다 덮고도 남는 옷자락을 끌어당겨 코를 묻어 보았다.
카밀루스의 부드러운 체향이 코안으로 밀려들었다. 얼마 전 침대 위에서 다정히 안아 주던 그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부터 알아 둬.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사랑한다…….
이온이 그때의 말을 곱씹으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몸을 바짝 세웠다.
곧바로 물 잔이 탁자 위에 놓이는 것에 이온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고마…….”
그러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보고서 고개를 들자 카밀루스가 눈에 들어왔다.
“……워요.”
이온이 말을 흐리며 눈을 마주치자 카밀루스가 장갑을 빼 탁자 위에 던지며 방 밖을 향해 짧게 명했다.
“가 봐, 페드로.”
문이 닫히자마자 카밀루스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붙이며 장난스럽게 물어 왔다.
“나 기다렸어? 무슨 생각 하면서?”
이온은 눈웃음을 짓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내가 언제 널 기다렸냐는 듯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나와 달리 청혼서를 많이 받는 거 같네, 하는 생각 하면서.”
“한마디로, 질투?”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설마 나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런 것도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의미로 카밀루스를 째리려고 하는데, 이온은 제 눈앞에 불쑥 나타난 장미꽃에 놀라 말을 멈췄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껴 있는 분홍색의 소담한 꽃송이에 이온이 선뜻 반응하지 못하고 있자 카밀루스가 연기하는 듯한 말투로 고백의 말을 흘렸다.
“제 순정을 당신께 바칩니다.”
“…….”
“소공작, 제 고백을 안 받아 주실 겁니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데요.”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것인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온 그 때문에 더는 투덜거릴 수 없었던 이온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카밀루스의 손에서 가시가 잘 다듬어진 장미를 빼 왔다. 그러고 향긋함에 끌려 냄새를 맡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가 머리 위에서 이온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여 왔다.
“네가 날 엄청 좋아하는 거 이미 알고 있는데,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갑자기 뭘 기다려?”
“왜 모르는 척하실까? 좋아한다는 말 언제 해 줄 거냐고 묻는 거잖아.”
하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이 무어라 대답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어 왔다.
“읏……!”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라 허둥지둥하는데, 카밀루스가 옆에 앉은 이온을 들어 올리더니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곧 그는 굵은 팔로 이온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입질을 하듯이 살며시 닿았다 떨어뜨리는 입맞춤을 반복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점점 선명해지는 카밀루스의 미소를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온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정신을 붙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파란색 눈동자에 비치는 이채만으로도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다정하고 포근한 그의 품속에서 이온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그런 그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밀루스는 커다란 손을 이온이 걸친 옷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얇은 셔츠 위로 그의 손이 닿아 오는 것을 느낀 이온이 긴장하는데, 카밀루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예쁘게 내 옷은 왜 걸치고 있어?”
‘예쁘게’라니.
이온은 그의 말에서 선명하게 묻어나는 즐거워하는 기색에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네 부관이 가져다줬어.”
“페드로가? 나중에 칭찬해 줘야겠네.”
카밀루스의 말을 듣자마자 이온의 귓가에 그의 부관이 했던 말이 어른어른했다.
〈걸치고 계시면 대공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아마 저한테 잘했다고 칭찬도 하시겠죠.〉
페드로는 대체 이 녀석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카밀루스의 손이 이온이 걸치고 있던 두 겹의 겉옷을 거두어 냈다.
툭, 하고 바닥에 묵직한 옷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온이 그에 속눈썹이 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다음에 이어질 행위가 무언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밀루스의 손이 목 끝까지 꽉 잠겨 있는 옷 단추를 톡 풀었다. 이온이 입을 살짝 벌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자 카밀루스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내 방에서 나도 없는데, 심지어 내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나쁜 짓 하자는 의미지?”
“그게 무슨…….”
“난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싫으면 바로 말해.”
그러고 쪽, 하는 소리가 난 데 이어 목의 여린 살에 카밀루스의 이가 살짝 닿았다. 따끔함에 놀란 사이 단추가 더 풀어졌고, 은근한 손길에 셔츠가 내려가 둥그런 어깨가 드러났다.
햇볕조차 제대로 쬐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이온이 팔을 떨었다.
그 선명한 동요의 증거 앞에서 카밀루스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가 이온의 왼손은 제 목뒤로 넘겨 둘러 안게 하고, 오른손은 끌어당겨 제 가슴 앞에 두었다. 그러는 사이 이온의 손에 들려 있던 분홍 장미가 소파 위에 툭 떨어졌다.
이어서, 카밀루스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내 옷도 풀어 줄래, 이온?”
“아…….”
쿵, 쿵…… 작은 심장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손끝이 카밀루스의 드레스 셔츠 옷깃에 닿았다. 하지만 단추를 선뜻 풀지 못하고 긴장감에 굳어 있자, 카밀루스가 다시금 입을 맞추며 달래 왔다.
“괜찮으니까.”
카밀루스가 말하는 ‘나쁜 짓’은 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이온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질문을 삼키며 카밀루스의 크라바트를 흩트리고,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울대가 선명히 튀어나온 목, 단단한 쇄골, 근육이 갈라져 있는 가슴이 차례로 눈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에 이온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카밀루스가 양손으로 이온의 얼굴을 붙잡으며 목을 확 꺾었다.
얼굴이 엇갈려 겹쳐지자 격렬한 키스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