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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09)화 (109/317)

“……네가 나 못 좋아하는 이유.” 

안 그래도 방금 그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던 이온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시점에서 그가 생각하는 ‘이온 크레이거’가 카밀루스 클로델을 못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설마 아까 전생이니 어쩌니 했던 말이 이거의 밑밥은 아니었겠지?

과한 추측이라는 건 알았지만 눈치가 백 단인 그이니 혹시 모른다. 그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카밀루스에게서 나왔다.

“넌 이 가문의 후계자니까, 언젠가 좋은 가문의 귀한 영애를 만나서 결혼해야겠지.”

그렇지만 이온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이야기.

완전한 오해였다.

좋은 가문의 귀한 영애를 만난다니. 크레이거 공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도 오늘내일하고 있는 상황 탓에 아무도 그를 ‘사내’로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 이온에게 들어오는 청혼서들은 죄다 가진 힘이 부족해 크레이거 가문의 이름만이라도 챙기자는 치들이 보내온 것들뿐이었다.

크레이거 공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여 이온이 혼기를 꽉 채웠는데도 아직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혼처가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한테도 안 보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이온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의 시간은 나한테 주면 안 될까, 이온?”

“그 전까지라니…….”

카밀루스는 이온의 저주가 풀리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믿는 듯했다. 카밀루스가 말한 ‘그 전’이 바로 그 시점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온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게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다만 카밀루스가 이런 요청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온은 숨까지 참아 가며 불안감에 요동치려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여전히 부드러운 빛을 띠는 파란 눈으로 그가 이온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네 저주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풀어 줄 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 그 이상으로는 욕심 안 부릴 테니.”

하아…….

이온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카밀루스는 눈치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문득 이온의 목에 걸려 있던 마나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때가 되면 너와 나 사이를 증명해 주던 이 마나석도 가치를 잃겠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카밀루스…….”

한마디로 말하면 카밀루스 클로델이 이온 크레이거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삶, 지금 그는 그걸 원한다는 뜻이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이 저주에 걸리지 않았던 때로, 탑으로 들어가 그를 만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카밀루스 클로델이 불행하지 않은 평행세계로.

카밀루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이온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난 북부로 돌아가서 나대로 살고, 넌 이곳에 남아 너대로 살고. 내가 그렇게 되게 해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서로 좋아하자.”

이쯤 되니 그가 자신을 안지 않은 이유가 다르게 해석되었다.

이대로 카밀루스와 몸을 섞으면 이온의 결혼 시장에서의 가치는 더욱 떨어져 버린다. 남색가인데, 심지어는 사내구실도 못 하는 인간한테 시집을 올 반반한 귀족가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온은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을 안 하는 걸 그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마음 다 안다고 떠들어 대는 그였기 때문에,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만 알았다. 눈만 마주치면 고백을 입에 담으며 입술을 빼앗아 가 이온이 이미 자신의 것인 양 행동했으니까.

그런데 카밀루스는 사실 이온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밀루스의 진심을 알게 된 이온은 충격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카밀루스의 이어지는 오해도 막지 못했다.

“그러면 나, 어떻게든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

“내가 널 사랑하게 해 줘.”

자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의 오해를 풀어 주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닌데, 카밀루스.”

뒤늦게 한마디 했지만 이런 말이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카밀루스는 이미 진실하지 못한 이온의 입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럼 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혹시 너도 내가 근본도 없는 천한 사생아라서 싫어?”

카밀루스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이온은 그가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것도, 아니야.”

자신의 문제다.

자신이,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차라리 이온은 이 자리에서 속 시원히 다 밝혀 버리고 싶었다. 네가 사랑하는 그 아이는 세상에서 사라졌고, 여기에 있는 건 그 아이가 아니라 본인의 이름도 잊은 다른 존재라고.

어디서 왔는지,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근본이 없는 건 카밀루스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거짓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이온 크레이거.

하지만 이 말을 입에 올리려 하는 순간 강제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상태 이상: 금어]

[플레이어가 말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이온은 눈치 없이 끼어드는 시스템창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이온은 그를 사랑한다는 이야기 역시 할 수 없었다.

단지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사람을 모욕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었으므로.

자신의 사랑은 카밀루스의 절실함을 짓밟는 잔인한 감정이었다.

이온의 긴 침묵을 마주한 카밀루스는 더 이상 평상의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일자로 입을 다문 그가 이온의 양 손목을 붙잡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이온을 탓하는 말이라곤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 사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없어. 날 멸시해도 돼.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은.”

카밀루스가 악력을 더하며 이온의 목뒤를 깨물어 왔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그곳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

“날 욕망해. 나중에 버리더라도 일단 손에 쥐어. 그게 현재 나의 유일한 존재 가치이니.”

말을 마친 카밀루스가 이온을 옆으로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되어 그 아래에 깔린 이온은 묘하게 냉한 표정의 그를 올려다보며 두근거림을 느꼈다.

“…….”

그러나 긴장을 한 것은 이온뿐인 듯, 카밀루스는 태연한 얼굴로 제 바지를 내렸다. 그제야 완벽한 알몸이 된 그는 손을 이온의 왼쪽 다리 밑으로 넣고는 허벅지를 밀어 올렸다.

그가 이온의 허벅지에 입을 가져간 뒤 그곳의 여린 살을 빨아들이며 또다시 인이라도 새기듯 제 흔적을 남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온은 곧 또 한 번의 절정이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다만 이 방 안에서 제 순결을 잃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 *

찬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새벽녘, 작은 바람 소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실 애초에 잠이 들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나한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카밀루스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혹은 돌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자신에게 언제나 거침없이 다가오던 그였기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

이온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자신의 곁에서 잠들어 있는 카밀루스를 바라보다가, 제 몸을 감싼 팔을 조심조심 거두어 냈다. 그러고 계속 괴롭힘당한 탓에 힘이 빠진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며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새벽 여명에 비치는 제 온몸은 엉망이었다. 당장 허벅지만 해도 카밀루스가 물어뜯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온이 몸을 내려 바닥을 밟았다. 순간 자박, 하고 크게 난 발소리에 혼자 놀라 뒤를 돌아보았던 그는 아직 카밀루스가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 거울이 있는 곳을 찾아 걷는 동안 하체가 신경 쓰였다. 젖어서이기도 했지만, 아무 불편감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날 몇 시간에 걸쳐서 제 온몸을 이용해 이온을 풀어 준 카밀루스는 제 상태에 괴로워하며 내내 식은땀을 흘렸지만, 마지막까지 가지는 않았다.

아주 긴 전희만 있었을 뿐, 그 뒤에 따라와야 마땅했을 결과는 없었던 셈이다.

그의 인내에는 끝이 없다.

아마 이온 크레이거의 곁에 있는 한 늘 그럴 것이었다.

마침내 무거운 다리를 끌고 가 거울 앞에 선 이온은 놀라움에 하, 하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제 오른쪽 목덜미의 부어오른 부위를 손끝으로 꾹 눌러 보았다가 따끔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흔적이 남은 것은 그곳뿐이 아니었다.

이게 뭔가 싶게 목에서부터 시작해 허벅지까지, 옷으로 가리는 게 가능한 부분이라면 거의 모든 곳에 카밀루스가 새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어쩐지 너무 집요하게 물고 빤다 했다. 아마 더는 못 하겠으니 이런 식으로 욕망을 표출한 모양이었다.

이 흔적들이 가시기 전까지는 이온 크레이거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말로는 차마 못 하겠으니, 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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