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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1)화 (111/317)

이쪽의 허락 없이 욕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어 페드로의 당혹감 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을 열기 전에 이미 한바탕한 듯, 부산스러움이 따라 들어왔다. 부관의 만류에 카밀루스가 어울리지 않게 짜증을 부렸다.

“방금 30분 넘도록 안 나온다는 소리 못 들었어?”

“아니, 그 정도는 보통이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30분은 기본으로 합니다.”

이런 짓은 호들갑이라고 냉정히 지적하는 페드로를 뒤로한 카밀루스는 결국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커다란 한숨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이온은 서둘러 손등으로 코를 막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하,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이온!”

가운의 옷깃마저 붉게 물들어 가는 최악의 상황에 카밀루스가 이온을 발견하고는 말을 끊고 소리쳤다.

그가 재빨리 바닥에 거의 엎어져 있는 이온에게 다가와 어깨를 붙들어 올렸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파란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왔구나.

진짜로 왔구나,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역시나 넌 눈만 뜨면 내 생각밖에 안 한다고.

하여 희미하게 웃고 있으니 반대로 카밀루스의 얼굴은 확 구겨졌다. 그는 양쪽 뺨도 입술도 온통 하얘진 채로 몸살이 온 듯 몸을 떠는 이온을 사납게 다그쳤다.

“너 미쳤어? 이 상태면 사람을 불렀어야……!”

말하다가 카밀루스는 뒤늦게 그럴 상황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가운 아래에 제 셔츠를 입은 이온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표정을 굳혔다.

심지어는 젖은 옷 아래로 이온의 가는 허벅지가 보였다. 제 흔적이 남아 있는 그곳이.

그는 근처에 있는 종이 울리지 않은 이유를 알아채고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고 코를 막고 있는 이온의 손을 떼어 낸 뒤 제가 살폈다.

살짝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가 싶더니 곧 거짓말처럼 피가 멎었다. 이어 카밀루스는 오한이 가시지 않는 이온의 몸에 자신의 옷을 벗어서 감싸 주었다.

주저 없이 이온을 두 팔로 받쳐 안고 일어난 카밀루스가 욕실을 빠져나갔다.

문 바로 앞에는 차마 문턱을 넘지 못하고 대기하던 페드로가 있었다. 그가 이온의 꼴을 보고 굳어 있자, 카밀루스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일깨웠다.

“페드로, 옷 좀 더 덮어 줘.”

“아, 예, 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썩 당황했던 페드로가 재빨리 제 옷도 벗어 이온의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고 카밀루스에게 뭔 일이 있었던 거냐는 눈빛을 보냈으나, 카밀루스는 무시하고 복도를 걸었다.

카밀루스가 미리 멀리 물려 둔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하인들이 그에게 안겨 본관으로 돌아가는 이온을 발견하고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온은 아마 그들의 입을 통해 금방 제 아버지에게 오늘의 소식이 흘러들어 갈 거라고 추측했다.

그 뒤 방 앞에 도착해 문을 여는데, 역시나 금세 집안사람들이 모이려고 하는 듯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그에 이온이 따라 들어오려는 전담 버틀러에게 명령했다.

“문 닫고 나가 있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도련님.”

버틀러가 그래도 되겠냐는 듯이 불러 오는 것에 이온이 다시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 집 안에서 현재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지? 어서.”

귀빈인 카밀루스 앞에서 감히 제 말을 거역해 소란을 일으킬 거냐는 말이었다.

완강한 이온의 태도에 결국 버틀러는 이온과 카밀루스만 남겨 둔 채 문을 닫았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곧 카밀루스도 이온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코피를 흘린 탓에 염려가 되었던지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한 카밀루스가 이온의 몸에서 페드로와 자신의 옷을 거두어 낸 뒤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가 근처의 서랍장을 뒤져 수건을 챙기고, 옷걸이에서 대충 아무 옷을 가져왔다.

이온은 어울리지 않게 부산히 구는 카밀루스를 지켜보다가 젖은 옷을 벗겨 주려는 그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카밀루스가 곧 이온의 맨몸에 마른 수건을 덮어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러다 화가 났는지 딱딱한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이게 뭐야, 너. 뭐 하느라 이 지경이 되도록 사람을 안 불러? 아니, 애초에 왜 나갔어?”

목소리는 그랬지만, 내용에는 걱정이 가득한 것에 이온이 실소를 흘렸다.

“그것도 네 옷을 입고?”

그렇지, 생각 없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지.

카밀루스는 그런 내심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온을 짧게 노려보았다.

“……크레이거가의 후계자가 대공의 정부가 됐다 자랑이라도 하고 다니고 싶었던 건가?”

“안 되는 이유는?”

“이온.”

마치 어린아이를 나무라듯이 짧게 불러 오는 것에 이온은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카밀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온의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몸에 남겨진 흔적들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온도 알 수 없었다. 낮부터 이어진 그 긴 시간을 후회하고 있을까?

이온도 물론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그에게 더 적극적으로 매달려 볼걸, 하고. 아마 카밀루스가 후회하고 있다면 그건 반대의 의미이겠지만.

얼마 안 가 그의 손이 제 허벅지를 스치자 이온은 살짝 긴장했다. 조금 전에 건드려 둔 그곳에 미세하게 찬 공기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그곳 근처엔 손도 대지 않았다. 무감하게 발로 내려가 물기를 마저 닦아 낸 뒤, 좀처럼 협조적으로 굴지 않는 이온에게 억지로 옷을 입혔다.

고집스러운 태도에 카밀루스가 미간을 구기고 또다시 탄식을 하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이온이 말을 툭 던졌다.

“나 어차피 이 상태로는 결혼도 못 해. 알고 있지?”

“…….”

카밀루스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온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어디 더 얘기해 보란 식이었다.

그에 이온은 속에서 감정이 울컥 치솟음을 느꼈다. 결국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내 마음 다 안다는 듯이 떠들지 말고, 씨발, 더는 배려도 하지 마!”

그러고 제 셔츠의 단추를 잠가 주려던 카밀루스의 손을 쳐 냈다. 카밀루스는 투정부리는 어린아이를 앞에 둔 것처럼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나직이 물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날카롭게 되물었으나 카밀루스는 침묵했다. 이온은 그런 그의 고집스러움에 주먹을 쥐고는 눈앞의 가슴을 내리쳤다.

카밀루스는 이온이 몇 번이나 때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온의 마음을 다 알고 있을 거면서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이건만, 이온은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면서, 왜 그 이후 이온 크레이거의 인생에는 관여하려고 하지 않는 건지.

어째서 미래의 설계도에서 둘이 함께하는 도면은 빠져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면서, 사랑한다면서.

욕심 없는 그가 미웠다.

카밀루스는 아마 제가 이온 크레이거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전체적인 인생 설계에 있어서나, 정치적으로나 지금 카밀루스 클로델의 몸값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온은 그에겐 그것을 뛰어넘는 간절함이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배신을 당했다.

카밀루스의 간절함에는 스스로를 위하는 이기심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어이없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일이 다 끝나면 그냥 이온의 인생에서 빠져 주겠다는 그런 황당한 결론 말이다.

“곰처럼 미련해 가지고는!”

“…….”

정신없이 그를 내려치다가 문득 머리가 어지러워진 이온이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행동을 멈췄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바들거리는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며 불러 왔다.

“이온.”

“……토할 것 같아.”

중얼거린 순간 손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확 퍼졌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강화)’의 강화율이 상승하였습니다.]

카밀루스의 마나가 흘러들어 오는 것이었다. 이온은 제 몸이 빠르게 안정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카밀루스가 저를 끌어안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카밀루스가 습관처럼 사과의 말을 입에 올렸다.

“미안해. 내가…… 널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그렇지?”

“…….”

“근데 널 안 좋아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어떡할까.”

이온은 제 손을 쥔 카밀루스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지만 속이 뒤틀린 탓에 예쁜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내가 네 어린 시절의 구원자라서? 내가 너 때문에 저주에 걸려서 그래?”

“불안한 게 그거야? 동정이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 일이 아니었으면 넌 날 안 좋아했을 거잖아.”

그리고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카밀루스가 다소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이딴 기분 나쁜 방식으로 이온 크레이거를 사랑할 일 역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의 사정이 뭔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카밀루스는 이온이 자꾸 왜 그런 것을 따지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해 왔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게 아니라는 가정을 왜 해.”

그에 이온은 홧김에 내뱉었다.

“넌 내가 한 번 죽어서 새 사람이 됐다면 어쩔 거야?”

완성된 문장이 입 밖으로 나가자 그는 제가 말해 놓고도 당황했다.

당연히 시스템이 ‘금어’로 알아서 막아 줄 거라 여겼던 예상을 깨고 그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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