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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2)화 (112/317)

‘어?’

이 말은 시스템의 허용 범위라는 건가?

이전에 ‘금어’가 발동했을 때와 지금의 차이가 뭔가 싶었다. 자기가 진짜로 다른 사람이라고 밝히는 것과 돌려 말하는 것의 차이?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닌가…….’

이온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카밀루스가 돌연 그를 품에서 떼어 내더니 양어깨를 붙잡아 눈을 마주치도록 몸을 확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죽긴 왜 죽어!”

확연히 표정이 굳어 버린 그가 다소 아프다고 느껴질 만큼 꽉 힘주어 붙들며 소리치는 것에 이온은 정신을 현실로 돌렸다.

그가 카밀루스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매번 목숨을 건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제 것은 가볍게 여겨 왔으면서, 실제로 그랬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 비유 표현에 화가 잔뜩 나 버린 카밀루스였다.

순간 못된 마음이 들었다. 역지사지라고, 그간 자신이 느꼈던 기분을 카밀루스도 느껴 볼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이온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기억이 없으니 마찬가지잖아?”

“이온, 그딴 말 절대 하지 마!”

마치 절대 넘보면 안 되는 역린이라도 건드려진 것처럼 카밀루스가 과민 반응을 해 왔다.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린 그가 이온의 양팔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너무 강한 악력에 이온은 아프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를 마주 노려보며 겨우 참았다.

카밀루스는 울컥 올라온 화기에 드물게 숨마저 몰아쉬었다. 이온의 한마디에 그의 두 눈은 사정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이 왜, 그게 남아 있고 안 남아 있고가 왜 중요한데? 그리고 그깟게 네 본질을 바꿔? 그거 아니잖아.”

한데 이어진 말은 이온으로서도 너무 아픈 것이었다.

‘본질’.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날카로운 송곳이 제 심장을 찌른 것처럼 찌릿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방금 그 말이 이온의 정곡을 정확하게 노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중요한 ‘본질’이 바뀐 게 맞았다.

매번 그와의 관계에서 발목을 잡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본질이 바뀌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시스템이 가로막았다.

[상태 이상: 금어]

[플레이어가 말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대체 기준이 뭐야?’

이온은 답답함에 울컥 성질이 솟았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온은 상대가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순전히 화풀이 조로서.

“그래, 그깟 기억 어차피 나한텐 있지도 않으니 하나도 안 중요해. 하지만 넌 아니잖아.”

“그게 무슨 뜻이야?”

이렇게 비겁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다시 만난 이후로 항상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과 함께 품고 있었던 이 이야기를 꺼내 놓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넌 그 기억 때문에 날 사랑하는 거니까!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역시나 듣자마자 카밀루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테니 당연했다.

“……이온.”

“내 말이 틀렸어? 아니라는 증거 있냐고.”

연타로 들어간 말에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이 확 빠졌다. 그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득한 표정으로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카밀루스의 입에서는 그럴듯한 반박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온은 다름 아닌 제가 그것을 의도했고, 카밀루스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제 처지가 확실하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결코 카밀루스의 헌신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제 처지가.

그래서 더 냉정한 말을 뱉어 냈다.

“이쯤 되면 무슨 소린지 너도 알겠지. 너랑 나, 서로 다른 걸 보고 있다고. 네가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의 내가 아니야, 8년 전의 나잖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널 밀어내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탑에 갇혀 있던 널 위로하고 구해 주었던 그 아이 말이야!”

허억, 헉…….

거의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 낸 탓에 이온은 가슴이 죄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스스로가 한 말에 가슴을 베인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놀려진 자신의 혀는 카밀루스의 마음 역시 깊게 할퀴었을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이온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했다.

“이제 그런 건 지겨워.”

말이 끝나자 팔을 붙잡고 있던 억센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올라오는 떨림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 뒤 카밀루스는 이온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온은 그런 그를 더 보고 있기 괴로워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참아 왔던 이야기를 하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답답함만 배가되었다. 심지어 양쪽 모두에게 어떠한 득이 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온 크레이거 하나만 보고 인생을 걸어 왔던 카밀루스인데, 그는 갑자기 목표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을 터였다.

이온은 문득 그의 무릎 위에 떨어진 손이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바들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홧김에 그동안 제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을 풀어 내긴 했지만 방식이 너무 못됐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결국 이온은 제 실언을 인정했다.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

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제 와서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수습할 방법은 없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주는 압박감은 한동안 두 사람을 거세게 짓눌렀다. 그것이 꽤 답답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네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아.”

한참 만에 입을 연 카밀루스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그래, 그 일이 없었으면 내가 널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지금처럼 널 좋아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르지. 근데 그게 지금의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아직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 카밀루스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제가 이온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눈앞에 줄줄이 내어 놓고 싶었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갖다바친다 해도 그것이 마음을 증명해 주지는 못할 테니.

“그렇지만 고작 그 정도의 확신도 못 준 내 잘못이겠지.”

결국 스스로를 탓하며 말을 마친 그가 무릎 꿇었던 다리를 펴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온은 제게로 꽂히는 카밀루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그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지친 듯, 힘 빠진 음성이 귓가에 닿아 왔다.

“그래도 방금 그 말, 네가 날 좋아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나한테는 그렇게 들렸는데…….”

흐려지는 말끝에는 자신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온을 향한 원망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에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으로 이온은 제 손 근처에 있는 이불을 구겨 잡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카밀루스에게는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그럼 네가 안심하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게. ……아니, 노력할게. 네가 날 믿을 수 있도록.”

이 이상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온은 뒤돌아서는 카밀루스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곁눈으로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살폈다.

‘바보…….’

자신에겐 독한 말 한마디 못 하는 카밀루스가 너무 미련해 보였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왜 저렇게 순한 건지.

문을 닫기 전, 이온은 자신이 잠들었다고 둘러대 주는 카밀루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드러누웠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두고 간 옷들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그중 카밀루스의 상의를 이불과 함께 끌어안았다. 그렇게 카밀루스가 남기고 간 체향을 깊게 들이켰다.

약간의 땀내가 섞인 그 부드러운 향기를 배 속 깊이 마시자, 어제 내내 저를 안아 주던 그가 떠올랐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만져 주던 손길이, 배 아래를 훑던 입술이…….

하지만 지금 그것들은 흥분감이 아닌 서러움을 몰고 오는 기제였다.

그에 이온은 눈을 꽉 감고 옷을 구겨 잡으며,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어떤 삶에 대한 상상을 했다.

어두운 탑의 꼭대기에서, 어린 카밀루스의 손을 잡아 주는.

그 손목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금제를 제 손으로 깨 부수고.

〈여기서 나가자. 나갈 수 있어.〉

그 말을 제 입으로 이야기하는…….

‘차라리 내가 그 아이였으면.’

그랬으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카밀루스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 자꾸만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믿는 용감한 7살 어린아이처럼 그런 헛꿈을 꾸게 되었다.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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