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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3)화 (113/317)

그 때문에 상상을 해 나갈수록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점점 스트레스만 쌓여 갔다. 

그저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솟은 이온이 옷과 이불을 안고서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듣고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침대 모서리 쪽에 고개를 빼꼼 내민 욤뇽이가 보였다.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숨었다가 이제야 올라올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온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녀석이 작게 울었다.

“……꾸우.”

물빛 눈동자와 눈길이 딱 맞자마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 버린 이온이 한숨을 내쉰 뒤, 도로 상체를 세우며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이온의 부름에 욤뇽이가 꼬리를 세우며 얼른 뛰어왔다. 그러고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이온의 품에 안긴 채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끙끙댔다.

이온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답한 제 마음을 토로했다.

“네 주인은 왜 저렇게 착한 거야?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고…….”

푸념을 들은 욤뇽이가 고개를 들어 이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행동이 꼭 그걸 아직도 모르냐, 너 때문이지 않으냐고 말해 주는 것처럼 보여서 이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별걸 다 내 탓 하네?”

“꾸우.”

하지만 진짜인걸.

방금의 대답이 그 뜻이라는 걸 알아듣고 이온이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연결이 왜 그따위로 되는지 솔직히 잘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오답이라고 자신 있게 반박하기에는 어려웠다.

카밀루스의 모든 선택은 대부분 이온 크레이거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니까.

그 사실을 몰라서 아까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한 말들이었다.

답답한 숨을 내뱉은 이온이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곧 인정했다.

카밀루스의 이것도, 저것도 다 제 탓이라면…… 그의 등을 떠밀 수 있는 사람도 결국은 자신뿐이라는 걸.

이온이 욤뇽이를 데리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전히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잠을 잘 기분도 아니었던 터라, 무언가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일 중독자도 아니고.’

이온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며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욤뇽이는 쿠키를 물려 두고서 구석에 얌전히 앉혀 둔 뒤 에렌스트 경이 산파들의 동향을 정리해 온 자료들을 뒤졌다.

이온이 지금 매달릴 구석은 이것밖에는 없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

[본 퀘스트 완료 시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적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호의를 포함하여 불특정 다수의 호의 및 적의가 상승합니다.]

이 퀘스트를 통해 얻을 저 ‘호의’라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

곧 안경을 쓴 이온은 내용들을 외워 버릴 기세로 집중했고, 순식간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빠져들었다.

주요 사항들의 경우 빈 종이에 옮겨 적으며 시기별로 정리했다. 그러고도 부족해 책상 주변에 가득 쌓인 책들을 뒤져 가며 당시에 황실에서 일어났던 주요한 일들을 함께 적어 두었다.

그렇지만 황실의 일들을 정리할수록 점점 본질과 멀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이온이 얼마 안 가 종이를 구겨 버렸다.

‘……이게 아니야.’

현재 카밀루스에 대한 모든 기록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끔찍한 가정이긴 했지만, 어쩌면 탑에 갇힌 것도 갓난쟁이 때부터일지도 몰랐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이니, 일반에 알려진 사건들로 그의 출생을 둘러싼 일이 무엇인지 유추하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역시나 로제니아 황후의 태를 빌렸다고밖에는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재니스가 준 약물을 먹고 뭔가 달라진 거겠지.〉

이온은 이전에 카르코 백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때 시스템이 분명 ‘단서에 접근하고 있다.’라고 말했었다. 카르코 백작의 말에 일정 부분 진실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아니, 적어도 진실로 향할 길이 거기 있다는 의미였다.

‘로제니아 황후…….’

이온은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새로운 종이를 꺼내 처음부터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카밀루스가 태어날 당시에 살아 있던 황실의 사람은 로제니아 황후와 선대 태후 두 사람이었다.

하나를 더하면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카밀루스의 생모.

하지만 단서조차 없는 인물을 쫓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쪽을 배제하자고 하면 당연히 그다음 조사 대상은 로제니아 황후였다.

카밀루스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에야 자살한 게 선황의 바람 때문이라고 추측되어진…….

이온은 정리된 종이 위에 로제니아 황후가 죽은 날짜를 적어 넣었다.

선대 황제가 황위에 오르고 대략 1개월 반 뒤, 카밀루스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날과 보름 남짓 차이 나는 때였다.

‘카밀루스의 존재를 알고 자살을 하기까지.’

이 사이 황후의 심경 변화나 동향이 중요할 터였다.

무려 24년 전 기록이기는 해도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는 황후의 자리에 있었던 이이니 기억하는 사람이 어딘가엔 있을 터다.

‘황궁 시녀나 가족.’

속으로 중얼거리며 종이에 앞으로 조사해 나가야 할 것들을 다른 종이에 정리해 놓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생각을 이어 나가는 통에 시간이 얼마나 가는지도 몰랐다. 카밀루스가 자고 있다고 말해 놔서인지 아침도, 점심도 가지고 들어오는 이가 없었기에 시간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하여 눈앞이 침침하다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쯤엔 이미 창문에 노을빛이 비치는 중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허기짐과 피로함이 확 몰려왔다.

뒤늦게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진 이온이 종이 놓인 침대 근처로 가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없어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하…….”

몸이 너무 무거운 데다,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집중하느라 지긋지긋할 정도로 약한 제 몸을 간과했다.

이온이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테이블에서 늘어져 자고 있는 욤뇽이를 깨우려 하는데, 때마침 침실 쪽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이럴 때 노크할 사람은 하나뿐이다. 이온의 허락 없이 이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에렌스트 경이었다.

곧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접니다. 식사도 내내 거르셨다고 들었습니다.”

“…….”

“문 열겠습니다.”

역시나 이온의 대답 없이도 잠시 뒤 방문이 열렸다. 그에 쿨쿨 자고 있던 욤뇽이가 기민하게 일어나 얼른 탁자 밑에 숨었고, 침대 위에 이온이 없다는 걸 알아챈 에렌스트 경이 집무실 쪽으로 걸어왔다.

이온은 그가 나타나는 걸 기다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가 보냈어?”

손에 먹을 것을 챙겨 온 에렌스트 경이 탁자 위에 트레이를 내려 두며 답했다.

“아뇨, 대공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음식은 에밀리 아가씨가 챙겨 주셨고요.”

카밀루스가…….

아침에 오늘은 그만하자고 한 탓에 못 오는 걸 텐데, 걱정은 된 모양이었다. 이온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에렌스트 경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온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을 그가 이온에게 제 어깨를 내어 주며 한마디 했다.

“절 닦달하는 분이 한 분 늘었네요.”

“그게 네 일이야.”

“불만 사항을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온이 책상 위의 서류 몇 장을 손에 쥐고는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쳐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에렌스트 경이 천천히 이온을 탁자 앞 소파로 이끈 뒤 냅킨과 식기를 챙겨 주었다.

샐러드와 과일, 그리고 감자 수프와 얇고 잘게 썰린 고기가 간단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온은 그 앞에 앉아 오늘의 첫 식사를 함과 동시에 서류들을 들여다보며 에렌스트 경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가 가져다준 이 산파들의 동향만으론 대공의 어머니가 누군지 유추하기는 힘들 것 같아.”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이 탁자 위에 놓인 남은 종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곳엔 이온의 필체로 쓰인 글씨들이 가득했다.

열심히 정리한 것들을 살피며 왜인지 표정을 가라앉힌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부분이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뭐가 더 필요할까요?”

“카밀루스가 태어났을 당시 로제니아 황후를 모시던 시녀가 살아 있을까? 아니면 미아블레 가문에서 황후에 대해 돈 소문 같은 것들을 알아봐. 자살의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겠으니까.”

지시를 마치고는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점점 건성으로 음식을 삼키는 이온에게 에렌스트 경이 그릇을 더 바짝 밀어 주었다. 먹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를 알아들은 이온이 슬쩍 웃고 있으니 에렌스트 경이 그를 나직이 불러 왔다.

“소공작.”

그제야 이온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대공의 어머니를 찾으시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현 황제의 일을 훼방 놓기 위한 게 아닌 걸로 보이는데요. 혹시 목적이 바뀌었습니까?”

묻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이온은 에렌스트 경이 이미 어떤 대답을 들을지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하여 이온도 숨김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래, 바뀌었어.”

“그럼 이제 어떤 필요에 의한 겁니까?”

이온이 근처의 손수건을 펼쳐 입가를 닦은 뒤 소파에 기대었다.

“알렉, 네가 전에 그랬었지? 지난 8년간 대공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해 온 것 아니냐고.”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이온에게 칼같이 선이 그어졌던 에렌스트 경이 입을 일자로 닫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보아하니 이미 심경 변화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이온은 굳이 회피하지 않고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나한테 그런 힘이 있는 거라면 이젠 이용해야겠어.”

어차피 오늘 아침의 소동으로 크레이거 공작과 에렌스트 경을 포함한 이 집안의 사람들 전부, 제 마음이 어디로 가게 됐는지 확실히 알게 됐을 터였다. 공작은 쉬쉬하려 하겠지만 그 이야기가 루미에르홀의 문턱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 상황을 제 손안에 두고 주무르면 그만이다.

다만 선결 조건이 있었고, 이는 그에 대한 변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대공에 대해 잘 알아야지. 본인보다도 더 많이, 더 깊게.”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래야 뒤통수를 안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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