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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5)화 (115/317)

“그런데 계속 마나를 쏟아부어도 정신을 못 차려서, 정말로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

황성 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긴장하고 있던 페드로는 이때부터 집중력이 흐트러짐을 느꼈다. 역시나 카밀루스는 이어 이온이 눈을 못 떠서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언급하며 샛길로 빠졌다.

그에 페드로가 약간 피곤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카밀루스가 하는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엔 항상 이온이 등장하는 걸까. 진지한 이야기든 발랄한 이야기든 전혀 상관없이.

게다가 마법의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내용까진 몰랐던 페드로는 이제야 알고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진짜로 이놈의 대공은…….’

너무 이온밖에 모른다. 그냥 삶의 모든 게 이온 크레이거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북부에 있는 동안 내내 이온 크레이거를 보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이 정도로 간절히 열망할 정도면 황도로 돌아오지 못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이후 이온이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할 무렵에 페드로가 짜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소공작과 맺었다는 마법 계약이 그런 내용이었던 겁니까?”

왜인지 저를 혼내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음을 알아챈 카밀루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변명할까 고민하는 듯했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몸을 틀어 페드로의 눈치를 힐끗 살핀 카밀루스가 썩 담백하게 들리는 한마디를 내놓았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야.”

페드로는 그러냐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지극한 마음을 소공작께서도 아셔야 할 텐데요. 그랬으면 오늘 그렇게 안 차이셨을 것 같은데.”

사실 페드로는 아침에 이온과 카밀루스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까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밖에도 안쪽의 살벌한 분위기는 대충 전해진 데다, 안에서 나온 카밀루스는 완전히 넋이 빠져 있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페드로는 그를 보면서 처음으로 툭 치면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카밀루스의 강건한 몸을 보면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진짜로 그렇게 보였다.

한데 누가 봐도 실연당한 사람 그 자체였던 카밀루스가 거짓말을 했다.

“……차인 거 아닌데?”

“아닙니까?”

페드로의 반문에 카밀루스는 선뜻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침의 일이라 기억이 워낙 선명한 탓에, 곧장 머릿속에 이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넌 그 기억 때문에 날 사랑하는 거니까!〉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던 그 말이.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 기억은 계기가 되어 준 것일 뿐 제 감정의 전부는 아닌데.

거기다, 그렇게 매도당한 것도 당한 것이지만 왜 자신은 그때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인지

가장 큰 문제는 지금도 그에 대한 그럴듯한 답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하루 종일 틈만 나면 그간의 일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온이 왜 그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라, 눈앞이 막막했다.

결국 답답함을 못 이겨 뒤돌아선 카밀루스가 페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그렇게 과거에만 목매는 사람처럼 보여……?”

그의 질문에 페드로는 곧장 둘이 뭐 때문에 싸웠는지 파악해 냈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그래, 자신이 아니면 누가 대공의 연애 상담을 해 줄까 싶었다.

“소공작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데요?”

“그야, 귀엽고 사랑스럽지. 사실 다시 만났을 때 훨씬 어두운 성격이 돼 있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러지 않아서 놀랐고.”

카밀루스는 말하면서 이온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금발이지만 워낙 연해서 밀빛에 가까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 눈은 항상 똘망똘망했다. 그래서인지 병색 때문에 항상 어딘가 힘없고 지쳐 보여도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삶의 의지를 놓지 않은 그에게 고맙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이온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마냥 유순하게 자랐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주관도 확실했다.

그리고 웃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에밀리와도 재밌게 지내는 것 같고, 일단 놀리면 놀리는 대로 다 당해 주는 것도 귀여웠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가 싶으면서도 감정에 서투른 점도, 입을 맞추거나 스킨십을 시도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워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카밀루스의 눈에 이온의 단점이란 없었다. 문제나 잘못이 있다면 자기한테 있는 거였다, 무조건.

여하튼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카밀루스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것도 숨겨야 하고,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 철렁하고…….”

자꾸 입 맞추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었다.

입이든 어디든 제 것으로 엉망으로 만들고, 남들이 절대 넘볼 수 없도록 인이라도 박아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만 참을 뿐이었다. 이온이 그런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꺼릴 게 분명하니까.

무엇보다 마음을 완전히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 애새끼 같은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예상할 페드로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진짜 푹 빠지셨네?”

제 마음을 인정받자 기분이 은근히 좋아진 카밀루스도 마주 웃어 보였다.

“역시 그렇지?”

“예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증이신 거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저는.”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페드로가 정자세를 풀고 뒤쪽의 소파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그러다가 소파 위에 떨어져 있는 장미 한 송이를 발견해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말을 덧붙여 왔다.

“근데 이온이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하니까 표현이 그렇게 부족했나 싶고.”

말을 듣던 페드로가 피식 웃었다.

흔한 사랑싸움을 해 놓고서, 그걸 가지고 열 일 다 제쳐 두고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는 카밀루스가 문득 귀엽게 느껴진 거였다.

실질적으로 권력관계가 어떻든 간에, 드넓은 오브라이언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데다 어떻게 보면 무력으로는 최강자라고 볼 수 있는 그가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있는 꼴이라니.

‘소공작도 마음이 없는 게 아니면 그냥 받아 줄 것이지…….’

속으로 그리 푸념하며 페드로가 손에 예의 장미를 들어 카밀루스 쪽으로 흔들었다.

“지금보다 더 어떻게 합니까? 지나가다가 꽃 보면 선물하고 싶어서 체면도 잊고 마차에서 내려 판매상 쫓아가는 분이.”

한데 이 사실을 페드로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카밀루스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누가 그걸 보고했지?”

“보고는 무슨. 이미 저희들 사이에서는 너무 씹어서 안줏거리도 안 됩니다.”

한숨 섞어 그리 대꾸한 페드로는 탁자 위에 장미꽃을 내려 두었다. 그러고 평소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밀루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제 주군에게는 채찍질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주저하는 카밀루스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단지 연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공,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당신께선 너무 순하시다고.”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어떤 연애를 하고 계실지 뻔하니까요. 항상 양보만 하고 사시지 않습니까, 그것도 거의 모든 부분에서.”

“…….”

자신의 말이 틀렸냐는 양 눈썹을 살며시 들썩이는 페드로를 보면서, 카밀루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드로는, 그런 카밀루스의 선한 마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북부에서도 제가 몇 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신께선 모든 걸 짊어질 필요도 없고, 부하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대공께선 늘, 그것도 과하게 스스로를 혹사해요.”

이온의 저주를 푸는 일도 그랬다. 이온이 과연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카밀루스는 거의 잠조차 자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카밀루스를 옆에서 보고 있는 페드로조차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면 그는 주저 없이 제 것을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카밀루스는 좀 더 제 주제를 알아야 했다. 더는 자신이 그럴 위치의 사람이 아니라는.

물론 페드로도 카밀루스가 제 주제 파악도 못 할 정도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마치 등 뒤에 자신을 몰아대는 사람이 있는 듯이 구는 카밀루스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그 이유였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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