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혹시 딴생각 품고 있냐?”
버니언의 뒷골목 양아치 같은 말투에 칼은 찌푸릴 뻔했던 미간을 간신히 현상 유지 했다.
이전에도 꼬투리 잡는 데에는 도가 튼 인간이었지만 최근 의심증이 돋았는지 버니언은 요즘 아무나 다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나 며칠 전 저녁에 카밀루스가 황궁을 다녀간 뒤로 칼은 거의 매일같이 불려 다니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살필 일이 많은데 황제의 심기가 어떠한지까지 파악해야 하다 보니 피곤함이 더했다.
물론 누군가가 그것마저 제국과 황실에 충성하는 노아기사단의 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한다면 할 말은 없었다.
제 처지를 마음속에 다시 한번 새긴 칼은 한 걸음 물러난 뒤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 무능입니다.”
칼이 순순히 저를 낮추자 버니언이 조금 누그러진 눈빛으로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
“예, 폐하.”
“내가 아스타틴한테 시킨 게 정확하게 뭐였지?”
“……라치크의 길드장, 비렌시움 대공의 생모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대답이 시원찮다고 생각했는지 버니언이 발끝으로 칼 단장의 무릎을 툭 찼다.
“그리고 마나 수용력을 높여 주는 약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잖아. 그건 잊었나?”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정성이 입증된 것들을 선별해야 하기에…….”
“그래서 안 하고 있었다?”
칼이 말하는 도중 또다시 버니언의 입에서 비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옆의 아스타틴이 곁눈으로 칼을 힐끗했다.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시간을 끌어서 분노를 자처하느냐는 의미였다.
칼도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평소 옆에서 어느 누가 뭐라 하든 제 페이스대로 밀고 나가는 성미에 맞게 꿋꿋이 할 말을 해 나갔다.
“그것은 아닙니다. 마탑에서도 여러 약을 보내왔으나 부작용 탓에 도저히 쓸 수가 없는 것들이었고, 저희도 약을 보내서 괜찮은 것들이 있는지 물었습니다만 마땅한 것이 없었…….”
그리고 이번에도 문장이 채 끝나기 전에 버니언의 입에서 욕설이 내질러졌다.
“너희같이 무능한 것들 때문에 내가 속이 터지는 거야, 씨발!”
거의 포효하듯이 내뱉은 그가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숨을 씨근덕거렸다.
칼의 낯짝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얼마 전에 카밀루스가 자신의 목을 조른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칼 나르바에스는 지금과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무덤덤한 말투로 저를 속 터지게 했었다. 제가 어떤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카밀루스의 손이 제 경동맥을 누른 순간 버니언은 공포감에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과 아랫것을 다루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 그리고…….
〈이온을 대상으로 청혼서를 보내느니 황후로 만들겠다느니 지껄이지 마. 또 한 번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비참하게 만들어 줄 테니.〉
언제든지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듯 위협하는 말까지.
문득 목이 졸렸던 부위가 답답해져 옴을 느끼며 버니언이 침을 삼켰다.
하지만 카밀루스에게 꼴사납게 당했다는 이야기는 제 체면상 절대 꺼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것도 황궁에서, 단둘이 있을 때 그랬다고는 더더욱.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제가 봐도 이온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길이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었다.
선황이 말년에 노망이라도 났던 건지 카밀루스에게 뜬금없이 대공위를 부여해서 녀석이 황도로 올 길을 열어 준 탓에, 그 새끼가 크레이거가에 눌러앉아 버려서 이온한테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어디 그뿐인가. 제 성미에 어울리지 않는 일임에도 이온에게 환심을 사든 거래를 하든 하려고 약을 찾는 건데, 고작 그 하나를 못 구해서 마음이 초조해져만 갔다.
‘생각해 보면 재니스 그놈도 협조를 안 하고 있고…….’
이온이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줘서 이쪽을 들쑤셔 놨던 재니스는 정작 이온의 증상을 개선할 약에 관해서는 한 발 빼고 있었다.
〈혹시 그런 약을 구하면 영식의 증상이 개선될지도 모르지요. 아시다시피 대공의 마나석을 걸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주를 푸는 약은 모르겠지만, 증상을 개선할 수 있도록 몸에 마나가 돌게 하는 약을 구하면 된다.
그게 그런 약한 몸으로 어떻게 애를 낳겠냐고 물었던 버니언에게 돌아온 답이었다.
버니언은 그때 잠깐 희망을 봤었다. 그 약을 구해다 주면 평생 저주에 시달렸던 이온은 제게 고마워할 거고, 크레이거 공작도 확실히 제 편이 될 거였다.
고작 약 하나 구하고서 얻는 이득치고는 상당히 괜찮았다.
〈그걸 네가 만들 수는 없고?〉
〈저에게 완벽한 레시피가 하나 있기는 한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말이지요.〉
〈그게 뭐지?〉
어쩌면 그런 게 명확히 존재한다는 듯이 제게 희망의 씨앗을 뿌려 댄 재니스 때문에 약을 구하는 걸 더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들어가는 재료가 좀 악랄하긴 했어도.
〈마나석요.〉
재니스는 마나석 자체의 능력도 중요하니 카밀루스의 피로 만든 것이면 더 좋다고 했다. 그리고 들어가는 양도 적어도 다섯 개는 필요하다고.
하지만 제 레시피야 워낙 최상의 약물을 만들기 위해 작성된 것이니, 비슷한 약효를 보이는 약만 찾으면 된다고 했다.
일반에서는 아주 찾기 어려울 거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버니언에게 이후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딘가에 굴러다닐, 마나석을 녹인 약물을 찾기 위해 일단 비슷한 약효를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방금 칼은 마탑에서 나온 것도, 전국을 다 뒤져 모으고 있는 것도 전부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라고 말한 터였다.
“하…….”
버니언의 입에서 분노 어린 한숨이 내쉬어졌다.
도대체 선황은 이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일을 해 온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제 눈에는 다 무능한 새끼들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간신히 화를 억누른 버니언은 이성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했다.
“약을 찾는 건 중단해.”
아무래도 한 놈한테 둘 이상의 일을 시키는 건 용량 초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자신이 이런 양보를 해야 하는지 몰라 짜증이 났지만, 다 갈아엎기 전에는 제가 부릴 수 있는 인력이 이따위 것들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수밖에.
약은 일단 뒤로 미뤄도 됐다. 그깟 병, 황후로 만든 다음에 고쳐 주면 그만이었다. 약도 지금처럼 개고생하면서 찾아다닐 게 아니라, 카밀루스의 어미가 카밀루스만큼 괴물일 확률도 있다고 했으니 피를 그쪽에서 뽑아내 재니스에게 마나석을 만들라고 하면 훨씬 쉬운 일이었다.
버니언은 칼 나르바에스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명령을 이어 갔다.
“그리고 칼, 네가 대공의 어미를 찾아라.”
그러고 아스타틴에게는 좀 더 언성을 높였다.
“아스타틴 네놈은 최대한 빨리 그 길드장 새끼를 내 앞에 끌고 오고. 거짓 제보든 뭐든 일단 다 가서 확인해! 알았나?”
“……예.”
아스타틴에게서 그다지 적극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자 버니언이 불만족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스타틴은 둔하게 생겨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한 달 안에 못 찾으면 명령 불복종의 의미로 알고 네놈 목을 날릴 거다.”
한데 냉정한 일갈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듣던 칼이 발끈해 소리쳤다.
“폐하, 그건 아니 될……!”
그렇지만 말하는 중간에 칼의 시야가 거세게 흔들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돌연 버니언이 주먹을 그의 얼굴에 내리꽂은 것이었다.
예고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폭력에 칼은 순간 제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할 시간도 없이 이번엔 숨이 막혀 왔다.
“큽……!”
눈을 부릅뜬 버니언이 돌연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씨발, 이 무능한 새끼들이! 불만이라는 거냐? 난 이미 3개월의 시간을 줬어! 그런데도 아직 뭐 하나 건진 것도 없는 너희들이 감히 나한테 큰소리를 쳐?”
얼마 전 카밀루스에게 당했던 것을 떠올린 버니언이 목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당하는 칼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아스타틴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황했던 아스타틴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당장 바닥에 이마를 박을 기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무조건! 무조건 한 달 안에 찾겠습니다!”
사색이 되어 외치는 그의 말에 버니언이 그제야 손을 풀고 활짝 웃었다.
“역시 그래야겠지?”
그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칼이 컥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스타틴은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고개를 든 아스타틴이 광기마저 어린 버니언의 파란 눈을 올려다보면서 다급히 대답했다.
“예, 예. 물론입니다.”
“당연히 카밀루스 그 새끼보다 먼저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야 한다는 조건도 잊지 말고.”
선황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모욕적으로 그들을 다룬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제 문제 때문에 상관이 괴롭힘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스타틴은 머릿속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가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린 뒤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답했다.
“반드시,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러고 버니언의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아스타틴은 기이한 살해 충동을 느꼈다. 제 허리춤의 검을 뽑아 제 눈앞의 배에 꽂아 넣거나, 마법으로 그의 머리를 부숴 버리는.
……억눌러야만 하는, 심히 불순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