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궁을 나서자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깨끗한 길과 주변의 여유로운 정원 위로 하얀 눈꽃들이 피었지만 칼 단장은 몹시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제 기사들을 이끌고 기사단 건물로 걸어갔다.
아스타틴 역시 그 뒤를 묵묵히 따르다가, 제 상관의 하얀 목이 조금 붉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사과의 말을 읊었다.
“……죄송합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칼이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힐끗했다. 왜인지 풀이 죽은 제 부하에게 그가 무감하게 대꾸했다.
“괜찮다, 별거 아니니.”
“…….”
칼은 평소와 다름없이 말한 것이었지만 아스타틴은 얼굴에서 송구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제대로만 했으면 칼이 이런 짓을 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은 아스타틴이 노아기사단에 들어온 때부터 언제나 함께해 온 동료이자, 믿을 수 있는 상관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 때문에 이런 모욕을 받는다니,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한데 그런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칼은 아스타틴이 제 옆으로 걸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깨를 툭 쳐 주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보다, 정말 못 찾는 거 맞나?”
의표를 찔러 오는 말에 아스타틴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자, 칼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귀에 대고 시끄럽게 떠드는 거 취향 아니니까 적당히 빨리 끝내라, 아스타틴.”
“…….”
“우린 황실의 개라는 걸 잊지 말고.”
“예.”
조금 전에 목까지 졸려 놓고서 황제의 말을 잘 들으라고 설파하는 그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아스타틴은 순순히 순응했다.
그에게 있어 충성의 대상은 늘 선황이었다. 그러나 선황이 서거한 지금, 갈 길을 잃은 마음을 다잡아 줄 사람은 현 황제가 아닌 칼 나르바에스였다.
그런 그를 달래듯 몇 번 더 툭툭 친 칼의 손이 곧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시 거리를 벌린 칼의 입에서 문득 의뭉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근데 그거 아나? 집이 불타면 개새끼는 아무도 돌봐 주지 않지. 집주인도, 집사도, 하다못해 하인도 다 저희 살기 바빠지거든.”
“……?”
아스타틴이 의문 어린 눈으로 그의 단정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개가 살 방법은 뭘까, 아스타틴?”
질문에 아스타틴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헤맸다. 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스타틴이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칼은, 그저 작게 입꼬리를 올려 웃을 뿐이었다.
“대공의 어미라…….”
생각해 보면 버니언이 한 명령이 꽤 우스웠다. 아니, 기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재수가 없는 일이라고 봐야 했다.
아마 대공의 어미를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부단장인 아스타틴이 아니라 단장인 칼에게 명령한 모양이지만, 사실 이 명령은 아스타틴에게 가야 했다.
마법 계약 때문에 칼은 대공의 어미가 로제니아 미아블레라는 사실을 발설하는 순간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서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황명이 자신에게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칼은 구태여 그 사실을 버니언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칼이 생각하는 선황의 바람이었기에.
* * *
첫눈이 내린 뒤 벌써 3일이 지났다. 하필 카밀루스랑 싸운 날 밤에 내리기 시작했던 눈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3일 동안 거리를 희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 이온은 문 쪽에 기대어 앉아 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동안에도 맞은편에 앉은 에렌스트 경은 계속해서 이온에게 제가 알아본 것들을 보고하고 있었다.
지금 말하는 것은 28년 전에 미아블레 가문의 하녀로 들어갔던 이의 이야기였다. 현재 일하는 곳에서 그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을 간혹 꺼낸다는 소문이 곁들여졌다.
“가고 계신 솔친 후작 저택에서 하녀장으로 일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28년 동안 하녀 일을 했으면 나이가 꽤 지긋할 테니 그럴 만하지.”
보고할 거리가 동이 났는지, 에렌스트 경이 가지고 있던 서류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보다 솔친 후작……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온이 눈동자를 굴려 에렌스트 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굉장히 귀찮아하는 듯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에렌스트 경은 이온이 역시나 별것 아니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솔친 후작은 이전엔 크레이거 공작가와 마찬가지로 황실파였으나, 얼마 전에 귀족파로 돌아서 버린 사람이었다. 후작가를 따르는 가신 가문이 꽤 있었기 때문에 최근 일 중에서는 파장이 가장 큰 축에 속했다.
그리고 그 계기를 이온이 제공했었다. 물론 크레이거 공작가의 아들이 아닌, 라치크 길드의 비밀스러운 길드장으로서.
단순히 ‘버니언이 엿 먹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벌인 예의 그 일은 솔친 후작가와 영지를 맞대고 있던 바스커스 후작 가문과의 알력 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두 가문은 모두 황실파로서 당시 황태자인 버니언의 뒷배를 자처하고 있었기에 표면적으로나마 같은 길을 갔었지만, 안쪽으로 파고들면 미묘한 사정이 하나가 존재했다.
그들의 영지 사이엔 상단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운하가 한 줄기 지나는데, 두 가문은 그를 둘러싼 오랜 갈등을 겪은 바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그 뱃길이 입구와 출구 쪽은 솔친 후작 가문 영지에 있었지만, 길의 줄기 자체는 바스커스 가문의 영지에 더 많이 속했다는 점이다.
출구와 입구가 솔친 후작가의 영지에 있다 보니 오가는 배를 검문하는 일 역시 그들이 맡았고, 자연스레 막대한 통행세는 오롯이 솔친 후작가의 몫이 되었다.
바스커스가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터라, 두 가문은 그 이권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싸웠다.
그래도 가까스로 솔친 후작가가 운하 및 그 주변 경관을 관리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해 이 분쟁을 마쳤는데, 이게 약 100년 전 일이다.
한데 역시 합의 이후에도 그 이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던지, 한동안 조용하던 바스커스 후작가에서 이번 대부터 다시 황실에다 자기들에게도 권한을 달라고 주장 중이었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을 따라다니는 버니언의 행태에 짜증이 났던 이온은 해당 정보를 접한 뒤 세작들을 이용해 실수인 척 바스커스 후작이 황실과 솔친 후작, 각각에게 보내는 편지를 바꿔치기해 버렸다.
바스커스 후작이 황실에 보낸 편지를 읽고 뒤통수를 얻어맞았다고 생각한 솔친 후작 쪽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이후 두 가문 사이에 분쟁이 벌어진 것은 정해진 수순. 그러나 황실은 솔친 후작가보다 바스커스 후작가가 더 입맛에 맞았는지 100년 전의 합의를 깨게 할 이유가 없음에도 두 가문의 싸움을 수수방관했다.
그렇게 둘의 감정싸움은 격화되었고, 예의 뱃길은 폐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온은 한 번 더 끼어들었다. 뱃길을 이용해 출퇴근하던 길드원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바스커스 가문 쪽에다가 해당 영지 내 임시 거점 및 출입구를 만들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 청은 당연히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여졌다.
공사가 시작되자 황실은 뒤늦게야 침묵을 깨고 솔친 후작의 편을 들려고 했지만, 이미 황실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솔친 후작은 귀족파로 돌아섰다.
다만 그 사건으로 솔친 후작가 역시 엄청난 손해를 떠안게 되었다. 운하를 이용하면서 그들이 꽉 잡고 있던 밀가루 유통망을 잃어 자금줄이 막힌 것이었다.
생각보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정작 그 분란을 일으켰던 이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내가 드러내 놓고 움직인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 오늘 방문 초대장만 해도 그쪽에서 먼저 보냈는걸.”
예전 미아블레 가문에서 일했던 하녀가 솔친 후작가에서 일한다는 이야기에, 이온은 제게 왔던 편지들을 뒤졌다.
다행히 솔친 후작가에서 때마침 보내온 초대장이 있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시종들이 알아서 거절의 답을 보냈을 터였기에 시기가 좋았다고 해야 했다.
솔친 후작가에서 크레이거 공작가에 초청장을 보낸 이유는 뻔했다. 현재 후작가의 영지에서 나는 밀가루가 창고에서 썩어 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유통망이 막힌 탓에 내다 팔 곳이 없으니, 예전에 교류했던 크레이거 가문에도 연락을 돌린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카밀루스가 루미에르홀에 있기 때문에 더 용기를 낸 것일지도 몰랐다. 비렌시움 대공은 누가 봐도 버니언의 편이 아닌 사람이니.
‘진짜 교류하고 싶은 사람은 카밀루스일지도…….’
솔친 후작가가 대운하 사건으로 당해서 그렇지 그것만 아니면 꽤 힘 있는 가문이라고 평할 만했다. 따라서 이 접근은 사실 카밀루스에게 손해는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이온도 얻을 수 있는 게 존재했고.
“잘됐지, 그 하녀장도 만나야 했으니까.”
한데 에렌스트 경은 염려된다는 투로 물어 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도련님을 모셨던 버틀러도 그렇고, 카르코 백작도.”
모두 죽었지 않느냐.
뒷말은 생략했지만 충분히 유추 가능한 범위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온의 표정이 어두웠다.
“안 괜찮으니까 번거롭게 움직이는 거지. 원래라면 솔친 후작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어. 부탁하는 처지일 게 뻔한데 그쪽이 찾아왔어야지, 안 그래?”
“공작께서도 도련님이 굳이 왜 직접 가려고 하는지 저에게 물으시더군요.”
에렌스트 경이 동조하는 말을 하자 이온이 양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래서 진상 떨러 가는 거야.”
“……예?”
뜬금없는 소리에 에렌스트 경이 눈을 깜빡이는데,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멈추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에렌스트 경은 제 팔을 내어 주며 이온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발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막기 위해 이온의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이온이 제 앞에 있는 거대한 솔친 후작 저를 바라보았다.
유서 깊은 가문인 터라 이쪽도 크레이거가 못지않게 저택의 규모가 크고 외관도 아름다웠다.
본관의 화려한 현관과 지붕을 별반 대단할 것 없다는 듯 심드렁히 눈에 담은 이온이 중얼거렸다.
“날 오라 가라 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후작 가문의 버틀러가 저택 문을 열자 마중 나온 솔친 후작의 첫째 아들인 안드레아 솔친 부부가 보였다.
이온은 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현관까지, 계단이 꽤 많았지만 혼자서 걸을 만한 컨디션이었다. 그래도 일부러 에렌스트 경의 팔을 놓지 않으며 제 불편한 몸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곧 그의 머리 위 우산이 접히고, 후작 저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