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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20)화 (120/317)

가까운 사람을 속인다는 데에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끼며 이온은 다급해 보이는 손길로 테이블을 더듬었다. 

“알렉, 무, 물 좀…… 앗!”

마치 숨이 막혀 못 참겠다는 듯이.

그러다 손끝에 걸려 차를 우리기 전의 뜨거운 물을 담아 두었던 티 포트가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놀란 에렌스트 경이 얼른 손으로 받아 내려고 했지만, 워낙 동그란 물체라 손에 잠깐 잡혔다가 미끄러져 나갔다.

챙그랑!

이온의 헛손질로 티 포트가 깨지자 순간 시야 한편에서 솔친 후작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많이 비싼 건가……?’

티 포트가 떨어지면서 젖어 든 허벅지가 뜨겁기는 해 순간적으로 놀랐던 이온은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다만 솔친 후작의 그 표정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바지가 축축해지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광경을 보고 이온뿐 아니라 에렌스트 경도, 안드레아도 경악했다.

“도련님!”

“괜찮아, 이온?”

기실 거의 80도 가까이 되는 물이었다. 그러나 교양 없이 소리를 지를 수는 없어서 이온은 인상만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다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미지근한 물! 물을 미지근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도요!”

그의 외침을 기점으로 해서 거의 온 집 안의 사람들이 총출동했다. 이온은 그중에 하녀장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안드레아가 바쁘게 명령하는 것을 보다가, 에렌스트 경이 잔을 기울여 주는 대로 천천히 물을 받아 마셨다.

이어 에렌스트 경은 젖은 바지를 차마 벗기지는 못해 겉면을 수건으로 꾹꾹 눌러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드레아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어서 바닥을 치워! 그리고 대체 소공작의 차에 누가 실수를 한 거지?”

이온에게도 양심은 있는지라 그런 안드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좀 따끔했다. 안드레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을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를 최선을 다해 혼내야만 했다.

이온은 그가 죄 없는 하녀들을 잡아 족치기 전에 얼른 끼어들었다.

“형,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혼내지는…….”

그러다가 쿨럭, 쿨럭 기침을 했다. 이거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허브티 안에 들어간 허브 중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는지, 아까부터 목이 좀 간질간질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감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에렌스트 경이 바지를 식혀 준 것은 좋았으나, 옷이 젖어서 이제는 반대로 체온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뜨겁다가 차갑다가 난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티 포트는 안 깨 먹었지.’

속으로 그렇게 푸념하고 있는데, 진지하게 화가 난 에렌스트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 쪽을 향해 선언했다.

“소공작을 모시고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첫마디를 들은 이온이 에렌스트 경을 확 올려다보았다.

‘그거 아니야…….’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곤란해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에렌스트 경은 이온 쪽을 보고 있지 않은 터라 그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후작가의 실수로 소공작께서 이리되신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하겠군요.”

“아, 아니야!”

결국 다급해진 이온이 크게 외쳤다.

이대로 쫓겨날…… 아니, 나갈 수 없었다. 이온은 안드레아 앞에서 상황 정리를 위해 애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하녀―아마도 하녀장일 그녀를 힐끗했다.

자기가 난리 친 게 저 사람을 짧게나마 만나기 위해서인데 이대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또 와서 이 깽판을 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

“이건 내가 너무 민감해서 그런 거야, 알렉.”

이온이 초록빛 눈에 그러지 말라는, 약간의 강요 및 강압의 신호를 담아 보자 그제야 에렌스트 경이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

당신이 원하는 게 이게 아니냐고.

‘당연히 아니지.’

이온은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며 그렇게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에렌스트 경의 팔소매를 붙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게다가 안드레아 형과도 오랜만에 만나고, 아마 후작 각하께서도 따로 할 말이 있어 보이시는데 이대로 아무 이야기도 못 나누고 그냥 가기에는…….”

이온이 말을 살짝 흐리며 어느새 하인들을 다그치느라 문 쪽으로 가 있던 안드레아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제 편을 들어 주는 것을 알아챈 안드레아가 눈치 빠르게 기회를 받았다.

그가 잠시 숨을 들이켜고는 이온 앞에 서서 눈치를 주자, 에렌스트 경이 옆으로 순순히 비켜섰다. 엉망이 된 바닥을 밟으며 가까이 온 안드레아가 이온의 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온,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반드시 찾아낼게. 그보다, 여기는 깨진 것들 때문에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야겠어. 그리고 옷도 갈아입어야겠구나.”

이온은 그에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왜인지 손은 잡기 싫어서 대신 에렌스트 경의 팔을 붙잡고 일어났다.

허벅지가 따끔거리는 게, 미약하게나마 정말로 화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제 거짓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애꿎은 사람들을 더 벌받게 하고 싶지는 않아 고통을 참았다.

이온은 남은 한 손으로 가슴을 내리누르며 답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형. 아마 홍차 잎이 섞였어도 아주 미량일 테니 증상은 좀만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래, 그럼 쉴 수 있게 손님방을 내줄게.”

그리 말하며 안드레아가 무안해진 손을 자연스럽게 거두었다. 그러고는 뒤의 솔친 후작을 바라보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면 하룻밤 묵고 가도 좋을지 않을까 싶구나. 공작께는 내가 바로 편지를 보낼 테니.”

이온은 그들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였다.

“그럴까요, 그럼?”

아마 이쯤 되면 후작도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이온이 일부러 남으려고 개지랄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이온의 그런 속내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은 진실도 있으니까.

“그래, 옷을 구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자주 가는 곳이 어디지?”

안드레아가 이온의 젖은 바지를 보며 묻자, 이번에도 이온은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크레이거 공작가에서 주로 옷을 맞추는 숍의 이름을 댔다.

“마침 얼마 전에 주문해 놓고 아직 찾지 못한 옷이 있는데 그걸 가져오면 될 거예요.”

“값은 우리가 치르도록 하지.”

“반액은 이미 지불했지만요.”

이 정도면 이번 소란은 일단락될 것이다.

안드레아는 더 꼬투리 잡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안도한 듯, 얼른 근처의 하녀에게 옷을 사 오라고 시켰다.

그 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부축받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걷는데, 그야말로 온 집안사람들 다 모인 것이 보였다.

시종들부터 시작해서 하녀들까지. 북적이는 사람들 중에서 이온은 다시 한번 하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눈길을 주었고, 그녀가 송구하다는 의미로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솔친 후작이 마침 그녀를 불렀다.

“에린!”

역시 예상이 맞았다.

이온은 저택에 오기 전 에렌스트 경이 알려 주었던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는 에렌스트 경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온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솔친 후작의 명이 이어졌다.

“2층의 손님방에 어서 불을 때거라. 그리고 오늘 손님 방에 필요한 것들이 있거든 직접 챙기도록.”

“예, 각하.”

소리를 들으면서 이온은 안도했다.

다행히 제 계획대로 됐다.

크레이거가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이온은 후작가에서 꽤나 귀빈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정도 소란이 일면 아무리 못해도 집사장이나 하녀장이 나설 거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이온은 앞서가는 버틀러를 따라 후작가의 손님 방으로 향했다. 이온이 묵고 가는 것은 예고되지 않았던 일이라 방 안의 공기가 꽤 찼다.

이온이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자마자 버틀러가 나가고, 에린이라는 하녀장이 뒤따라 들어와 직접 난롯불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급격히 차가워진 온도에 몸을 떨고 있는 그에게 담요와 상당히 넉넉해 보이는 바지를 내주었다.

“저희 실수로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소공작. 그리고 갈아입을 만한 옷이 없어 이것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에렌스트 경이 대신 건네받아 펼치는 것을 보고는 이온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잠깐 방문하는 걸로 계획되었던 터라 내 버틀러와는 함께 오지 않았는데…….”

혼자서는 바지를 못 입겠다는 얘기를 듣고 아마 에린은 꽤나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옆의 에렌스트 경이 도울 거라 여겼을 테니.

하지만 에린은 능숙하게 답했다.

“예, 그럼 옷 갈아입으시는 걸 도울 수 있도록 집사장을 불러오겠습니다.”

이온은 그게 아니라는 양,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사람 저 사람 번거롭게 오갈 필요는 없으니 옷시중은 직접 들어 줄 수 있을까?”

말이 끝나자 이온과 에린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에린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올라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온은 남자고, 에린은 여자였다. 성별이 다르니 이온의 요구는 사실 굉장히 의외로운 것이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방금 전의 소란이 있었던 탓인지, 여러 사람 번거롭게 하기 싫다는 이온의 말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에린은 오랜 시간 하녀로 일해 온 사람답게 크게 동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소공작께서만 괜찮으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이온이 뒤에 서 있는 에렌스트 경에게 턱짓했다.

“잠시 나가 봐.”

원래라면 곁에 있겠다고 했을 에렌스트 경은 아까 대강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그가 방 밖으로 나서기 전에 에린에게 당부했다.

“혹시 도련님께 이상이 있으면 꼭 불러 주십시오.”

알겠다는 의미로 에린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뚜벅뚜벅 발소리가 지나갔다. 곧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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