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방의 창 쪽에 커튼이 드리운 것을 확인하고는 난로 앞에 서 있는 나이 지긋한 하녀를 바라보았다.
에린은 나이가 쉰 정도 되었을까.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기도 하고, 제 어머니와도 비슷한 나이인 터라 왜인지 경계심이 일지는 않았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이온이 가만히 눈을 마주치자, 에린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래 하녀 일을 해 왔고, 하녀장의 지위까지 오른 터라 과연 예법에는 능숙해 보였다.
그녀가 지근거리에서 발을 멈추자 이온은 그녀가 옷시중을 들기 편하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온의 허리 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굽힌 에린이 몸을 한껏 낮추었을 때였다. 혹시나 옆방이나 복도에서 누군가 엿듣지 못하도록 이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미아블레 후작가에서 일했었다는 하녀장이 맞나?”
그녀의 입장에서 이 질문은 당연히 갑작스럽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을 터다. 에린이 고개를 들어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물처럼 고요할 것만 같던 그녀의 얼굴 위로 동요의 기운이 일었다.
“그걸 어떻게…….”
입가에 미소를 비친 이온이 막 허리띠의 버클을 풀려던 에린의 손을 제 손으로 살짝 밀어냈다.
“옷시중은 천천히 들어도 되니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에린의 손이 떨어져 허공을 방황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금세 표정과 몸을 수습했다. 한 발짝 물러난 그녀를 마주 보며 이온은 제 안쪽 주머니에서 손바닥의 3분의 2 정도 되는 작은 회중시계 꺼냈다.
찰랑, 하고 그곳에 달린 긴 금색 줄이 늘어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온은 화려하게 장식된 회중시계의 뚜껑을 에린에게 보이고는, 시계를 쥔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가치를 아는 자에게 가져다 팔면 황도에 집 두 채 정도는 거뜬히 구할 수 있을 거야.”
이온이 갑자기 뇌물을 건넬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에린의 얼굴엔 경계의 빛이 올라왔다.
“저는 주인집이나 미아블레 가문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며 이온의 제안을 먼저 거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다.
황도에 집 두 채라는데, 욕심을 내지 않는다니 꽤 대단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온은 지금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필요했다.
이온이 에린이 물러난 만큼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원하는 건 지금 솔친 후작가나 미아블레 후작가에서의 일이 아니야. 그래도 어렵겠나?”
“…….”
둘 다 아니라면 어떤 걸 원하느냐는 눈빛으로 에린이 이온을 바라보았다. 이온은 그것을 승낙의 의미로 알아듣고 몸을 더 바짝 붙였다. 그가 에린의 작은 귀에 대고 귀엣말을 속삭였다.
“25년 전에서 24년 전 사이에 혹시 미아블레 가문에서 황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지 궁금한데…….”
이온은 말끝을 흐리며 에린의 낯색을 살폈다. 아직은 말할지 말지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에린의 앞치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 제 회중시계를 넣어 주었다. 삐져나온 줄을 주머니 안쪽으로 예쁘게 갈무리해 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 기억이 희석됐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에린은 그런 제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무거운 줄 알았던 그녀의 입이 살며시 열렸다.
“……24년 전이면 황후께서 돌아가셔서 미아블레 가문은 그저 슬픔에 빠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 전엔?”
“그 전에는…… 황후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면서 남부로 긴 요양을 가셨다는 이야기가 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부로, 요양?’
이온이 로제니아 황후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꽤 근시일이었다. 한데 황실로 들어간 황후의 행적은 본래 비밀에 부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황실에도 그렇게 기록을 많이 남겨 두지 않는다. 있다 해도 전부 황실 도서관에만 기록을 보관하다 보니 그 일원이 아닐 경우 썩 접근하기가 힘든 정보다. 심지어 이온이 필요한 것은 24년 전의 일이기도 하니 더했다.
기실 로제니아 황후가 죽기 직전 해에 언젠가 요양을 할 정도로 아팠다는 것은 이미 파악했던 정보이지만, 남부로 향했다는 세부적인 부분은 아직 몰랐었다.
“남부로? 어느 지역이었는지는 알고 있나?”
이번 질문에 에린은 기억을 더듬는 듯 입을 다문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사이 이온도 제가 그동안 보았던 서류들을 머릿속으로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러다 얼마 전 에렌스트 경이 가져왔던 산파들의 동향 중에 한 부분이 떠올랐다.
이온은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의심되는 지역명을 바로 입에 올렸다.
“혹시…… 리아라냐인가?”
물음에 에린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제가 남부 지방의 지명은 잘 아는 편이 아니라서…….”
“…….”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재차 강조하는 그녀의 대답은 분명히 이온에게 어떤 답이 되어 주었다.
그것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은.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단순 호불호의 문제일 뿐, 그것이 가리키는 진실이 무엇인가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이온이 얼굴을 굳히자, 에린은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그때는 빨래하던 말단 하녀였던지라, 집안분들을 가까이서 모시지 않았습니다.”
약간은 주름이 지고, 또 약간은 관절이 굽은 에린의 손에는 회중시계가 들렸다. 그것을 이온에게 도로 내밀며 에린이 지금의 화제를 마무리할 것을 요청했다.
“더는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고, 방금까지의 질문은 소공작께 그렇게 가치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 이 정도라도 충분했다.”
계속 사양을 하겠다고 하면 이온도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단지 그녀의 입을 좀 더 가볍게 해 줄 장치에 불과하긴 했으니까.
그는 회중시계를 돌려받았고, 에린은 다시금 몸을 낮추어 이온의 젖은 바지를 벗겨 주었다. 그러다 뜨거운 것에 데어서 빨개진 허벅지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들갑 떨지 말라는 의미로 이온이 눈썹만 까딱하자, 영리하게 알아들은 에린이 수건으로 물기만 닦아 준 뒤 임시로 입을 바지를 입혀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품이 넉넉하긴 했어도, 방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이상 없을 차림이었다.
옷시중을 모두 받은 이온이 난로 앞의 의자에 앉자 에린은 그만 고개를 꾸벅하고 나갔다.
“그럼 일이 있으시면 종을 울리십시오.”
이온은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대신 에렌스트 경이 들어오기 전까지 좀 멍한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리아라냐…….’
속으로 곱씹으며 제국 남부의 여러 지역명을 떠올려 봤지만, 발음상 그와 헷갈릴 만한 다른 지명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이온이 카밀루스의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 ‘리아라냐’라는 명칭을 접했던 적은 딱 한 번이었다.
“도련님, 접니다.”
“들어와.”
이온의 대답에 에렌스트 경이 난로 앞에서 불을 쬐고 있는 이온의 옆으로 다가왔다.
품이 조금 넉넉한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작게 웃자, 이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렉, 사람 인식이라는 게 참 무서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마다 옷 입는 스타일도 다르고, 보는 눈도 다르잖아.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좀 괴괴한 스타일로 입는 사람은 왜 자꾸만 그런 옷을 고집할까.”
선문답을 요구하는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은 뭔가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성실히 답했다.
“그야, 본인 눈에는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서겠죠.”
“역시 그렇지? 나도 이런 옷을 계속 입었으면 이게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거야. 어쩌면 알렉 너도.”
이온이 넉넉한 바지 자락을 당기며 그렇지 않으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대강이나마 맥락을 파악한 에렌스트 경이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녀장과의 이야기에서 쓸 만한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에 이온의 눈썹이 조금 실그러졌다.
“사실 에린이 알려 준 내용은 그렇게 엄청난 건 아니었어. 아니야, 실은 엄청난 거긴 한가…….”
이온은 제가 횡설수설하는 이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게 결론을 내리는 데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온은 아버지인 크레이거 공작이 나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추론한 것이 맞는다면 크레이거 공작은 적어도 카밀루스에게는, 아주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온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혹시 대공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게 되신 겁니까?”
이온은 제 앞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제 머릿속에서 넘어갔던 종잇장을 저 불에 태워 버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봐 버린 진실은 소각되지 않는다.
이온은 밝히고도 싶고, 안 밝히고도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카밀루스에 대한 정보가 틀렸다는 것도 깨닫게 됐어…….”
말하는 중간에 시스템 창이 활성화됐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나이 : 24세
직업 : 대공, 대마법사
특이 사항 : 전 황제의 사생아. 마녀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이온의 생각에 따라 잠시 뒤 몇 가지 정보가 수정되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나이 : 25세
직업 : 대공, 대마법사
특이 사항 : 로제니아 클로델의 아들이다.]
나이와 특이 사항이 변경되자마자 또 다른 창이 올라왔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조건을 충족하여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외 본 퀘스트와 연관이 있는 사람을 만날 경우 적의 및 호의 수치가 조정됩니다.]
퀘스트가 완료됐지만 왜인지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온의 눈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강한 결의가 올라왔다.
“알렉.”
“예, 도련님.”
이온의 말소리가 평소보다 진지한 것에, 에렌스트 경이 경의의 뜻을 담아 뒷짐을 지며 고개를 숙였다.
곧 이온의 입에서 결정적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내가 섬길 주군이 누군지는, 내 손으로 선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