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카, 아니 대공께서 이 집에 내일까지 계시기로 한 겁니까?”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이름을 부르는 실수를 할 뻔했다.
한데 묻는 소리에 솔친 후작은 주책맞다 싶을 정도로 너무 티 나게 흐뭇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대공께서 보내온 기사가 그런 말을 하긴 하더군. 방은 소공작의 옆방으로 준비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
손님으로 쉬고 가는 신세에 방 위치에 대한 푸념을 할 정도로 염치없이 굴 수는 없어 이온도 더 입을 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후작이 대운하 사건으로 버니언한테 맺힌 게 많은가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솔친 후작가와 바스커스 후작가는 둘 다 버니언이 하는 일을 이전부터 열렬히 지지해 왔던 양대 가문이었다. 하지만 황실이 결정적일 때 바스커스 후작가를 편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배신감이 더 클 것은 자명했다.
‘뒤에서 조작한 게 나라는 게 알려지면 난리 나겠네…….’
이온은 웃는 얼굴 뒤로 그런 생각을 하며 후작과 나란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스무 명 이상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넉넉한 테이블에 솔친 후작 부인과 안드레아 부부는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이온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일어나 자신의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여기 네 자리를 준비했어, 이온.”
“고마워요, 형.”
하인이 빼 주는 의자에 앉으며 이온은 식당 문 근처를 살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먼저 설명했다.
“네 기사와 버틀러의 식사는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아, 네…….”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안드레아의 발언에 이온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방을 나설 때는 분명히 에렌스트 경도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챘다.
이온이 찾던 사람은, 실은 카밀루스였다. 혹시나 이동 마법으로 바로 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보좌하는 이들과 함께 천천히 마차를 타고 오는 모양이었다.
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각하.”
마침 후작가의 집사장이 잰걸음으로 식당 안을 가로질러 왔다. 귀엣말을 듣고 후작의 얼굴이 펴지는 것을 보며 이온은 집사장이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눈치챘다.
“대공께서 벌써 오신 모양이구나, 안드레아!”
역시나.
기사가 나가고 나서 이온이 고작 저택 2층에서 식당으로 걸어 내려오는 정도의 시간밖에는 지나지 않았다.
한데 뭐가 그렇게 급한지 너무 일찍 온 방문 소식에 솔친 후작도 안드레아도 조금 경황이 없어 보였다.
“여긴 제가 있겠습니다. 손님은 안에도 있으니까요.”
안드레아의 말에 솔친 후작이 얼른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고요한 식당 안에서 안드레아와 어색히 앉아 있는데, 얼마 안 가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온은 카밀루스를 발견하자마자 안드레아와 더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의 눈조차 털지 않고 안에 들어온 탓에 따라온 후작가의 버틀러가 뒤늦게 카밀루스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부드러운 천으로 털어 주었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한 카밀루스가 이내 이온과 스치듯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거둔 그는 후작가의 후계자인 안드레아를 바라보며 겸양의 말을 흘렸다.
“미리 소식도 없이 와 미안합니다. 결례를 용서하여 주길.”
그러면서 하얀 장갑을 낀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아가 그런 그에게 허리를 바짝 숙이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전하. 전하의 오랜 벗이 아파 집에도 못 돌아간다는데 충분히 걱정이 되실 만하지요.”
“이해해 주어서 고맙군.”
고작 이틀하고 반 정도밖에는 보지 않았다. 한데도 그의 울림 있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이온은 괜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크레이거 공작 저에서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잘생겼단 말이지.’
옆에 있는 후작도 그 나름대로는 곱게 늙은 중년이었고, 근처의 안드레아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들이 오징어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루미에르홀에서는 꽤 편안해 보이는 차림과 머리 스타일로 있었는데, 처음 보는 곳에 온다고 신경 쓴 모양인지 정복도 제대로 차려입고 머리를 올렸다.
이마가 드러나니 키도 더 커 보이는, 이상한 보정 효과가 있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이온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돌았다. 거울은 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귀 끝이 빨개졌을지도 몰랐다.
각자와 인사를 나눈 뒤 카밀루스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후작이 상석 쪽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전하의 자리는 여기…….”
그러나 카밀루스의 발이 향한 곳은 이온의 옆이었다. 후작은 제가 가리킨 방향과 카밀루스가 향한 방향이 엇갈리자 눈을 크게 떴다.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손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온의 옆에 자리를 잡으려는 카밀루스를 보면서 난처해하는 빛을 띤 건 비단 솔친 후작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집 내외보다 더 상석에 앉는 건 불편할 것 같아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함께 제 옆의 의자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이온도 어깨를 움찔했다. 카밀루스는 순간 정적이 도는 식당 안에서 태연히 물었다.
“내가 이 자리에 앉는 게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문제가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건 단연 카밀루스였다. 그것도 조금 차이 나는 정도가 아니니 상석에 앉아야 마땅한데, 카밀루스가 지금 앉겠다고 하는 자리는 심지어 솔친 후작 부인의 맞은편 자리였다.
물론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구의 맞은편인 게 아니라 ‘이온의 옆자리’라는 사실인 듯하지만.
수많은 손님을 모셔 봤을 후작도 이런 경우는 처음 경험하는 것 같았으나 다행히 능숙하게 대응했다.
“겨우 자리 같은 게 문제가 될 리 있겠습니까. 앉으시지요.”
“그러지.”
카밀루스가 앉은 뒤 이온도 따라 몸을 내렸다. 한데 그러자마자 이온은 남몰래 숨을 삼켜야만 했다.
오른손이 강한 힘에 의해 확 딸려 갔기 때문이었다. 카밀루스가 식탁 밑에서 이온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낀 것이다.
이온은 식탁 밑의 손을 털어내지도 못하고, 손이 잡힌 걸 드러내지도 못했다. 결정적으로 카밀루스가 밑에서 무슨 일이 있냐는 양 솔친 후작을 태연히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후작에게서 급하게 편지가 왔다기에, 소공작의 상태가 심각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아서 다행입니다.”
“제가 공작에게 보낸 내용을 따로 보신 겁니까?”
“그런 무례한 짓을 했을 리가 있습니까. 단지 공작이 걱정하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연유를 물었을 뿐입니다.”
대화를 나누던 카밀루스의 눈길이 문득 이온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휘는 것이 보였다.
옆에 앉아 손까지 몰래 잡고 자신에게 다정히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온은 왠지 제가 대공비라도 된 느낌이라 민망해졌다.
하여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프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아시다시피 소공작이 모두의 걱정을 사는 사람이라…….”
이온이 카밀루스를 마주 보며 작게 아하하, 하고 웃었다. 이런 자기가 좀 멍청해 보이지 않을까 염려가 됐지만 지금은 이런 반응 외에는 하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이 식당 안에 모인 후작가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음식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속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거리를 찾는데, 때마침 식당의 문을 열고 소란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온은 음식 접시들을 내오는 하녀들이 보기 전에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카밀루스는 절대 안 놓겠다는 듯 오히려 당겨 버렸다.
그러고 긴 손가락을 굽혀 손등을 긁으면서 가볍게 손장난까지 쳐 오는 것에, 이온이 흠칫했다. 이어 손끝으로 부드럽게 누르며 애무해 주는 손길이 왠지 모르게 노골적으로 느껴져 참다못한 이온이 ‘왜 이래?’ 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온은 안 되겠다 싶어 한 박자 늦게 아까 전의 말에 대꾸했다.
“그게…… 후작가에서 워낙 잘 돌봐 주셔서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전하.”
그러니까 그만 놓으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기어이 뒤로 누군가 바짝 다가올 때까지 버티다가 해방해 주었다. 이어 들려온 이야기는 어이없게도 서러움을 토로하는 말이었다.
“나만 돌봐 줄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꽤 서운합니다, 소공작.”
“…….”
그래도 다행히 이온의 구원자는 존재했다. 이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드레아가 사레가 들린 척 작게 헛기침을 흘렸다.
“음, 음…… 그, 어렸을 적부터 대공께서 소공작을 각별히 여기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소공작이 매번 차고 다니는 목걸이의 보석이 사실은 대공께서 만든 마나석이라는 뜬소문까지 있던데요.”
‘그거 아니야…….’
차라리 뒷말은 안 붙였으면 좋았을걸.
혈관의 피가 바싹 마르는 느낌에 이온은 제 앞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 그러면서 카밀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이 마나석을 진짜로 자기가 만들었다고 선언해 버리면.
“단지 뜬소문이 아닙니다. 실제 내 피를 모아서 만든 마나석이니.”
……그러면 진짜로 카밀루스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카밀루스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사실을 밝혔다.
그러고는 이온의 동의까지 요구해 왔다.
“내 목숨을 준 거나 마찬가지지.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