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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24)화 (124/317)

“내 목숨을 준 거나 마찬가지지. 그렇지 않습니까, 소공작?” 

솔친 후작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 이 발언은 아예 ‘비렌시움 대공과 크레이거 공작가는 한 패거리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아니면 ‘내 약점은 이온입니다.’인가.

“그걸 이 자리에서 밝히시다니 좀 당혹스럽습니다.”

이온이 그만하라는 의미로 그리 말했다. 또다시 기침이 쏟아질 것 같아 물을 마시며 맞은편을 보니 안드레아 부부가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 읽은 듯 마찬가지로 목을 축이는 중이었다.

한데 솔친 후작이 수습해 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더 불을 지르려는 의도인지 모를 방향으로 화제를 돌렸다.

“대공께선 혼처는 따로 아니 정하십니까? 저희 가문 아이들은 다들 혼기가 차거나 약혼자가 있어서 아쉽게 됐습니다만, 듣자 하니 대공께서 이리 훤칠한 미남이신 데다 아이오딘에서의 위명도 있으시어 뭇 레이디들이 가슴 설레 한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들려옵니다.”

물론 이온은 후작이 그렇게까지 악랄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전자라고 생각했지만, 카밀루스가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후작, 내가 전혀 관심 없어 하는 게 딱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선황이 천국을 갔는지 지옥을 갔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온은 다음에 튀어나올 단어가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여자.”

“…….”

“누굴 봐도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더군요.”

‘아예 남색가라고 소문을 내시지 그래.’

카밀루스가 제아무리 황도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해도 사교계가 얼마나 유행과 소문에 민감한 곳인지 몰라서 이러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온은 마치 복수전을 치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카밀루스가 남겨 둔 흔적을 달고 하인들 앞에서 몸을 보였던 그 일에 대한 복수전.

아마 두 가지가 합쳐지면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카밀루스와 이온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상상의 나래를 열심히 펼칠 터였다.

카밀루스의 말은 실제로 그 상상에 구체적인 무언가를 더해 주기에 아주 적절했다.

“난 관심 없는 것엔 시간을 쏟지 않습니다. 그러니 피차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해서 서로 아까운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솔친 후작가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의 카밀루스가 이온에게 그 ‘시간’이라는 걸 몹시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대체 누가 친구가 아프다는 이유로 귀족가에 미리 기별도 없이 찾아온단 말인가. 보통은 일주일 전쯤에 방문을 하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고, 상대가 그 청을 승낙하면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솔친 후작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겠으나 다행히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인내심 있게 주제를 이어 갔다. 아마도 마지막 질문이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이제는 대공국을 물려받으셨으니 후사를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질문엔 제발 똑바로 대답하라고, 이온은 속으로 주문을 외었다.

카밀루스는 옆에서 죽 쑨 표정을 짓고 있는 이온을 한 번 힐끗했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게 꼭 필요하다면 양자를 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황실에서 곱게 자라지 못한 탓에 성교육조차 못 받아 그런가, 그런 쪽으로는 영 관심이 안 가더군. 본래 무지한 것엔 호기심도 일지 않는 법이니.”

이번 대답으로는 대공 고자설이 돌겠다.

마침 물을 넘기고 있던 안드레아의 부인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컵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

이온의 뇌리에 얼마 전에 들었던 카밀루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진짜 미안, 미안해. 근데 네가 너무 예뻐서……. 만지고 싶어.〉

주체하지 못한 흥분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그 음성이.

하지만 그런 속사정은 전혀 모를 후작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카밀루스가 낯빛 한 번 안 변한 채로 하는 말을 어느 정도로 신뢰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화제를 마무리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여 이온이 서둘러 전면에 나섰다.

“그러고 보니 각하, 솔친 후작가의 영지에서 나는 밀가루가 꽤 질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후작도 마침 잘됐다는 듯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 그 말은 사실이라네. 우리 영지는 대부분이 넓은 평지인 데다 큰 강을 가운데 끼고 있어 무척 비옥한 땅이지. 여기 이 빵도 우리 영지에서 난 밀가루로 만들었다네.”

솔친 후작이 식사 시작을 유도하기 위해 식전 빵을 먼저 잡았다. 이에 이온도 따라서 제 앞의 잘 구워진 빵을 갈랐다. 그러자 고소한 냄새가 확 퍼져 코 속에 닿았다.

그 냄새를 맡자 허기짐이 느껴져 이온은 조심히 입을 벌려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맛있지 않으냐고 묻는 후작의 자부심 어린 말에, 이온은 작게 미소만 지었다.

듣기 원하는 말을 이온이 쉽게 내어 주지 않자, 솔친 후작은 관심을 거둔 척 식기를 들었다. 아마 자신보다 30살은 족히 어린 이온에게 드러내 놓고 부탁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돕기 위해 안드레아가 끼어들었다.

“이온, 너희 공국에서도 밀가루는 많이 나고 있지 않니?”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것 아니라는 양 상황을 읊었다.

“그래서 절반 정도는 황도 쪽에 판매하고 있어요. 그 나머지의 절반은 동부로 가기도 하죠.”

“그래? 북부는 매년 식량난이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솔친 후작가는 창고에 썩어나는 예의 밀가루를 북부에다가 팔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카밀루스를 환대했던 건가…….’

선황의 유언으로 북부 대부분이 비렌시움 대공이 이끌 대공국으로 편입되었다. 다만 문제는 오브라이언의 북부가 아직도 제대로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땅이라는 점이었다.

“북부는 아직 상업 가도가 그렇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있다 해도 위험한 길들뿐이지. 산이 워낙 많고, 몬스터들도 출몰하니.”

카밀루스가 하는 말을 듣고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전하의 말씀대로예요, 형. 북부는 돈 자체가 부족하다 보니 화폐 가치가 높죠. 황도에 비하면 시세도 워낙 싸서 팔아 봤자 이문이 거의 남지도 않아요. 비싸게 팔려고 해도 그건 상대 주머니가 차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한마디로 북부는 상업적 가치가 크지 않은 땅이었다. 애초에 인구수도 적을뿐더러, 땅에서 나는 가치 있는 먹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거대 도시와 거래할 수 있는 품목 자체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엘라엠과는 교류를 하고 있지 않니?”

“이엘라엠? 뭐, 거기야 북서부의 끄트머리라 저희 공국과 가깝기도 하고, 보석 광산이 있으니 부유하죠. 황도에 있는 레이디들의 보석함에 이엘라엠산 보석이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온이 잠시 말을 끊고 카밀루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긴 얼마 전에 대공국에 부속되어서, 저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에, 카밀루스는 이온과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북부는 이엘라엠조차도 식량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다른 지역과의 교류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소공작.”

지금의 발언으로 카밀루스는 앞으로 대공국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오브라이언이라는 한 덩이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공국끼리 알력 싸움이 심한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나 클로델 왕조가 들어선 뒤로 황실은 조율자로서의 역할을 거의 방기하다시피 했다. 그편이 본인들이 공국들을 제어하기 더 쉽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갈등 상황을 만들어야 본인들이 그 틈에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카밀루스는 방금 그 말로 다른 공국들을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다.

“거래를 계속 허해 주신다는 말씀이시군요.”

“크레이거 공작가에서 황도에 올라온 나를 처음으로 받아 주었으니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되겠지?”

‘은혜라니…….’

예상보다 더 진일보한 시각이었다.

솔친 후작 역시 카밀루스의 말들에서 어떤 대답을 얻게 되었는지, 근처의 하인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거, 잔에 술을 채워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 그렇지 않나, 소공작?”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이온이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저희 아버지께서 초대장을 보시고는 후작 각하께서 오랜만에 불러 준다며 한탄하시던데요. 몇 년 전만 해도 좋은 친구 사이였는데, 하시면서요.”

최근 연락이 거의 끊기다시피 한, 소원했던 두 집안의 관계에 대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후작가에서 안드레아의 결혼식 때 초대장 한 장 보내오지 않자 크레이거 공작이 꽤 불편해했었다.

한데 이온의 말에 답을 내놓은 것은 안드레아였다. 그가 투명한 금빛 술이 채워진 잔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건 내 실수야, 이온.”

“형의?”

“난 네가 이렇게 건강해졌을 줄은 몰랐어. 그래서 결혼식도 못 올 거라고 지레짐작했었지.”

건강을 들먹이며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황실파의 수장 격인 크레이거 공작가는 참석 안 했을 거 아니었냐는 의미였다.

이온은 뻔히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잔을 안드레아 쪽으로 기울이며 대꾸했다.

“뭐, 그때 제가 병석에 누워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조금이나마 건강해져서 보기 좋구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온은 와인엔 예의상 입만 댔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자리에서 필요한 의사 표현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실파였던 크레이거 공작가의 전향이 확실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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