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다들 잔을 내려놓자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가 재개되었다. 이온은 혹시 기침이 나올까 싶어 중간중간 계속 물을 마시다가, 이내 식기를 내려놓고 먼저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하면 대공, 마침 저희 공국의 상단 하나가 이엘라엠 횡단길 개척에 관심을 가지더군요. 이엘라엠 동북쪽에 위치한 비아트리스에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아직 실제로 그런 곳은 없었다. 그러나 여차하면 가문에서 관리하는 상단 하나를 움직여 일을 처리해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에 카밀루스가 고기를 썰던 손을 멈추고 이온을 돌아보았다.
“글쎄, 아마 큰 문제는 안 될 겁니다. 이엘라엠과 비아트리스는 북부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 따뜻한 편이니. 게다가 둘을 가로지르는 레먼강을 정비한다면 대운하 사업을 해 보아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요.”
이온은 그의 입에서 레먼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는 겨우 아이오딘 하나를 지키는 변경백이었던 카밀루스였기에, 그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의 강 이름까지 술술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영지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계획을 세워 두신 게 있는가 보군요.”
“계획,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이온의 중얼거림에 대꾸한 카밀루스가 본격적으로 말을 이어 갈 생각인지, 냅킨으로 입가를 훑은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솔친 후작가 사람들의 이목도 순간적으로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곳들보다 한참 더 북쪽에 있는 아이오딘에서 8년을 살다 보니 느낀 게 있습니다. 아이오딘의 사람들에겐 몬스터를 잡아서 얻은 고기가 가장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성찬이거든.”
“몬스터의 고기를 먹는다고요?”
반문한 것은 솔찬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야만적인 행위가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부인. 아마 황도엔 먹을 것이 손 닿는 곳에 널려 있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먹거리들을 가지고 아이오딘의 매서운 추위와 두꺼운 빙벽을 뚫고 올 상인들이 없으니 그곳 사람들은 몬스터의 살점을 뜯어먹지 못하면 삶을 유지하기조차 힘듭니다.”
“어머나, 그럼…….”
후작 부인이 입을 가리며 뒷말을 흐렸다. 설마 카밀루스도 몬스터의 고기를 먹은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그런 무례한 발언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서 알아챘을 것이다. 카밀루스는 이미 수십 번, 아니 어쩌면 수백 번 몬스터의 살코기를 파먹었으리란 걸.
이온은 담담한 태도의 카밀루스를 보며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음을 느꼈다. 목소리에 그 저조한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서 천천히 북부를 개척하고 싶으신 거군요, 대공께선.”
“개척이라는 말은 바르지 않아요, 소공작. 나도 아이오딘에서 살았으니 그곳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알고 있습니다. 함부로 드나들다가는 누군가 목숨을 잃을지 모르지.”
“…….”
식탁 위에 있는 손을 살며시 내린 이온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손등 위로 몰래 제 손을 덮더니, 손가락을 밀어 넣어 주먹을 풀었다.
날 그렇게 안쓰러워하지 말라는 신호인 듯했다.
“하여 그저 잠시 눈보라가 멈추었을 때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길 하나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누군가가 식량을 사러 나갈 수 있게요. 혹시나 눈 폭풍을 만나면 잠시 안전히 쉴 수 있는 거점들도 있으면 좋겠지.”
말이 끝나자 다행히 카밀루스는 손에서 힘을 뺐다. 그에 이온이 컵을 쥐고 다시 물을 홀짝이는데, 안드레아가 그들의 대화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북부 지역도 좀 더 적극적으로 길을 정비하셔야 할 텐데요.”
“북부가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가치 있는 물건이 아예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길을 만들어 두면 식량 외에도 거래품이 하나둘씩 생길 겁니다. 당장 북부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가죽이나 털들은 못 구해서 안달 아니던가?”
하지만 듣다 보니 너무 이상론이다.
이온은 옆에서 참지 못하고 “대공.” 하고 카밀루스를 불렀다. 그러자 파란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칼칼한 목을 한 번 가다듬은 이온이 고개를 틀어 카밀루스를 마주 보며 냉정히 현실을 지적했다.
“북부는 지금 자금이 부족한 형편이니 길을 하나 만든다 해도 다른 지역의 물자를 끌어와야 하겠죠.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니 만만치 않은 자금이 투입될 거고, 그럼 여러 이권들이 그곳에 몰릴 거예요. 사공이 많은 곳엔 원래 말들이 많은 법이죠. 행여나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그 개발권에 한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한쪽에만 힘을 실어 줄 겁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간섭하지 못하도록 상호 불가침 조약을 쓰게 되겠지요. 단, 확실한 투자가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물자를 대는 쪽에서 중간에 그만두기라도 하면 대공령 또한 땅만 더럽히는 꼴이 될 테니 말입니다.”
식사하는 중간에 갑자기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자 솔친 후작도, 안드레아도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둘의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냐는 듯, 각자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만 이온은 그들의 어리둥절함을 해소해 주지 않고 할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단순히 길을 만드는 데에서만 그친다면 그 또한 가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상인들로서는 본인이 가던 익숙한 길을 포기하고 북부로 향하는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인데 다른 지역과의 경쟁력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북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아직 개발되지 않은 여러 광산들이 있습니다. 이엘라엠보다 더 혹독한 환경이라 캐내기가 어려운 것일 뿐, 가치가 더 높은 것들은 얼마든지 있지요. 또, 북부의 바다에는 남부에 없는 수많은 어종이 있고요.”
카밀루스의 입에서 대답을 준비해 온 듯이 술술 나오는 것에, 이온은 또 한 번 놀랐다.
사실 황도의 거의 모든 소문을 듣고 있는 이온조차도 북부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아는 편이 아니었다. 크레이거 가문과 거래가 있는 곳 위주로 주요 사항을 짚고 있는 것뿐.
하여 이온은 이쯤에서 선문답 같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대공의 말씀이 허황한 것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실제로 가 봐야 알겠군요.”
한데 카밀루스는 이 불씨를 끝내 꺼뜨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온과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꽤 즐거운 것일지도 몰랐다.
“투자 전에 가치 측정이 필요한 거라면 실측 인원을 보내도 될 겁니다.”
덧붙여 오는 말에 이온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전하께서는 대공령의 가신들과 아직 교류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공이 된 지 이제 고작 한 달 정도 됐을까. 아이오딘에서 황제의 시신을 운구해 오고 나서 내내 황도에 있었으니, 당연히 대공령의 일을 정리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해 한 말이었다.
한데 카밀루스의 대꾸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내가 8년 동안 아이오딘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설마 말조차 전하지 못했겠습니까?”
‘……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그건.”
대공령으로 선포되기 전부터 이미 교류가 있었다는 의미인가?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니 카밀루스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비쳤다.
“아이오딘이야 말할 것 없을 테고 일단 이엘라엠과 비아트리스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소공작.”
그리고 솔친 후작을 돌아보며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후작. 그럼 나와는 더 이야기할 것이 없어 보이는데, 맞습니까?”
그러니까, 카밀루스도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솔친 후작이 자기 때문에 크레이거 공작가에 편지를 보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갑자기 오겠다고…….’
이온은 의외로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는 카밀루스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도 카밀루스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벌어지는 상황을 전부 다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하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솔친 후작은 제 속내가 까발려진 것에 당혹한 듯했으나, 겉으로는 짧은 말로 잘 갈무리했다.
“예, 대공 전하의 고견은 잘 들었습니다.”
이후 다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가벼운 친교의 말이 오가고, 밤이 깊어서야 그들 모두 식당 밖으로 나왔다.
카밀루스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이온도 그 옆방으로 몸을 들였다.
방문을 닫기 전에 카밀루스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일어, 문을 닫고 혼자 남자마자 그는 불퉁한 표정이 되었다.
지친 이온이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지려 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딱딱한 뭔가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와 뭔가 하고 창문 쪽을 보니 작고 통통한 것이 보였다.
이온이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욤뇽이가 안으로 뛰어들어 오며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꾸!”
“욤뇽이? 여기 어떻게 왔어? 설마 카밀루스가 데려다준 거야?”
“꾸, 꾸우!”
분명히 집에 두고 왔는데, 웬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욤뇽이가 물빛 눈에 눈물을 가득 쌓았다. 두고 가서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이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욤뇽이의 눈가를 손으로 훑어 주었다.
그러고 달래는 말을 하려는데…….
“나는 안 안아 줘?”
불쑥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온이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벽이라도 통과해서 온 건지 카밀루스가 소리도 없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너…….”
이온이 뭐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일어나 성큼 다가온 카밀루스가 이온을 거세게 안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