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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27)화 (127/317)

별로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때 열심히 물을 들이켜서 가라앉혀 놓은 목구멍이 또다시 간질거려 오는 것 같아, 이온은 침을 모아 삼켰다.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오자, 그것을 본 카밀루스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긴장해, 이온?”

“그야, 여긴 남의 집이기도 하고.”

게다가 흔들의자 너머에서 욤뇽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드래곤 주제에 게을러 빠져서는 평소 어두운 곳에 놔두면 금방 잠들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말똥말똥하다.

이온은 녀석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따.

“욤뇽이도 다 보고 있는데…….”

그에 뒤를 힐끗 돌아본 카밀루스가 이온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 녀석 잠재워 버릴까? 그리고 방에는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방음 마법 걸었어. 저 녀석이 쓸데없이 시끄럽게 굴 게 뻔하니까.”

“방음? 그런 것도 가능한 거였어?”

물어보면서 이온은 대체 얼마나 격렬하게 할 생각인가 싶어 두려워졌다. 카밀루스는 어떤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약간 입가를 비틀며 비웃음 같은 것을 비쳤다.

“그래. 뭐, 여러모로 유용한 마법이지.”

“…….”

이쯤에서 이온은 문득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린 과연 같은 대화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의문과 함께.

해서 이온은 불편한 자세를 고치는 척하며 그의 중심에서부터 조금 멀어졌다.

“최근에 어디 딴 데서도 쓴 적 있나 봐?”

떨어질 기색을 보이면 카밀루스가 분명 다시 바짝 끌어당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러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 또한 무척 담백한 어조였다.

“별건 아니야. 누굴 겁줄 일이 좀 있어서.”

반면 얼굴 표정은 좀 살벌했다. 안 좋은 일이나 매우 싫어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양.

“겁을 줘?”

넌지시 되묻는 말에 카밀루스는 걱정 말라는 양 눈웃음을 지으며 잘라 말했다.

“알아 봤자 별로 좋을 건 없는 얘기라.”

“…….”

이온이야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보니 그가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에게처럼 무조건 져 주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이온도 지금 이 자리에서 카밀루스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원류로 되돌아갔다.

“저기, 카밀루스, 그래도 그…… 남의 집이라 너무 예의 없는 짓을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 씻기도 어렵고, 내일 일어나기도 힘들면 어떡해?”

게다가 시트도 분명히 더러워질 텐데, 남의 집에서 세상 그런 민폐가 따로 없는 데다 그거야말로 카밀루스와 이온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터였다.

설마 카밀루스가 그 많은 걸 고려 못 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의 나무를 키워 나갈 무렵이었다. 카밀루스가 무슨 소릴 하느냐는 말투로 이온의 말을 곱씹었다.

“내일 힘들어……?”

확실한 물음표가 뒤따라오는 것에 이온은 순간 열이 올랐던 머리가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응?”

이온의 외마디 감탄사를 들은 카밀루스는 상황을 되짚듯이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마구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하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이온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개졌다.

‘젠장…….’

역시 아까부터 뭔가 말하는 게 안 맞는다 싶었는데, 이게 아니었나 보다.

이온의 민망해하는 얼굴을 보고서도 카밀루스는 웃음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재밌어하는 건지, 말하는 중간에도 계속 웃음소리가 섞였다.

“이온, 혹, 하하, 혹시, 하…… 나랑 나쁜 짓이 하고 싶어?”

뱉은 말을 수습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온도 이미 너무 많은 말들을 주섬주섬 꺼내 놓은 탓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해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어떻게 오해일 수 있냐는 반론을 펼치는 일뿐이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너 여기.”

이온은 그의 심상치 않은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뒷말은 카밀루스의 상상에 맡겼다. 그에 카밀루스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미치겠다.”

양팔로 이온을 꽉 안은 그가 이온의 뺨에 연신 키스를 쏟아 냈다. 입술이 여러 번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이온이 뺨 근육을 굳히며 카밀루스를 왠지 억울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카밀루스는 또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너무너무 귀여워서 어떡하지?”

“…….”

미치겠네, 하는 소리가 카밀루스의 입술 사이로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런 뒤 그는 제가 입을 맞추었던 이온의 뺨을 다시 살짝 꼬집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카밀루스는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다행히 방금 전보다는 진지한 목소리로 변명을 입에 올렸다.

“기대에 부응 못 해서 미안, 이온……. 근데 어떡하지, 나 진짜로 안 돼. 사고 안 칠 자신이 없거든.”

“그게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야. 자제 못 하다가 네가 이 몸으로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안 된다고. 난 내 2세보다 네 몸이 훨씬 소중한데, 그렇다고 애를 없앨 수도 없는 거고.”

아.

이온은 속으로 탄식했다.

임신. 그래, 임신.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저주로 인해 제가 그런 신세가 됐다는 걸, 의식하지 않으면 이온도 자주 잊었다.

대체 어떻게 제가 임신할 수 있는지 원리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여하튼 주머니에 씨를 넣는다는 원리는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까, 카밀루스는…….

‘자제를 못 한다고.’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전까지는 못 마친다는 소리였다.

저번에 그럼 끝까지 안 간 이유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열기에 질식될 것 같았던 며칠 전의 상황이 그의 말에 오버랩되니 그건 그것대로 야릇하게 들렸다.

결국 귀 끝까지 붉게 물들어 버린 이온이 카밀루스를 밀쳐 내고는 흔들의자에서 벗어났다. 이온이 주춤주춤 두어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다른 건 뭐였는데?”

“그야 네가 그 시시한 거래를 내세워서 뒤에 숨긴 비밀이 뭔지 알려 주는 거였지……?”

어이가 없어진 이온의 입을 벌렸다. 카밀루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턱이 떨어진 줄도 모른다는 표현을 여기다 쓰는 거구나 싶었다.

“어떻게 그게 그렇게 연결이 돼? 그리고 그런 거면 말을 똑바로 했어야 오해가 없지! 너,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골탕이라…….”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 카밀루스가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일부러 그런 게 맞는 거지?

이온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휙 뒤돌아서서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카밀루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쫓아오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네가 이렇게 바로 걸려들 줄은 몰랐지.”

이온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걸 어떻게든 쥐어박고 싶은데, 제 손이 더 아플 게 뻔해서 차마 휘두르지는 못해 그저 카밀루스를 곁눈질로 흘기며 쏘아붙였다.

“걸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나 보네?”

카밀루스가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짓다가 얼른 먼저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 눌어붙어 있던 욤뇽이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욤뇽이는 가만히 누워 게으름 부리느라 귀는 닫고 있었던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이온과 카밀루스를 번갈아 보며 동그란 물빛 눈을 깜빡거렸다. 카밀루스는 그런 녀석이 오랜만에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긋거리는 얄미운 표정으로 침대 밖에 서 있는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너 그런 쪽으로는 관심 없잖아. 그래서 당연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혼란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뀨……?”

둘 사이에 낀 욤뇽이는 카밀루스의 말을 듣고도 역시나 이게 뭔 상황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온은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욤뇽이의 그 모습에 몸 안의 화기가 수그러듦을 느꼈다.

저 말랑말랑한 생명체가, 너무 귀여운 게 문제였다. 카밀루스도 아마 그걸 알고 제 무릎 위에 올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애써 미간에 힘을 주었다.

“내가 뭔지 모르면 넌 또 나 놀리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크레이거 공작 저로 들어온 이후로 종종 에밀리랑 가까이 지내는 것 같더라니, 지금에 와선 완전히 한패가 된 게 분명하다. 시도 때도 없이 이온을 놀리려고 들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그런데 나랑 그렇게 자고 싶었어, 이온?”

“…….”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이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침대를 툭툭 쳤다.

“여기서 꼬셨으면 결국 했을 거란 소린가.”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 흐릿한 뒷말을 흘려보냈다.

“여러모로 안 되는 이유가 많은데도?”

이온은 순간 목구멍으로 울컥 말소리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야.

그야 그만큼…….

‘널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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