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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28)화 (128/317)

얼마 전의 몸을 섞은 것도 아니고 안 섞은 것도 아닌 그 미묘한 날 이후로 이온은 제 안에 있던 빗장 하나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아니, 이건 흰 눈밭에 첫 발자국을 새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날 이후로 제 안의 무언가가 바뀐 것은 틀림없었다. 난생처음 누군가를 떠올리며 제 몸을 달아오르게 했으니까.

지금도 카밀루스를 앞에 두고 있으니 하체가 뜨거워지는 감각이 들었다.

살면서 사람을 그런 감정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으니, 육체적인 반응까지도 예의 마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는데.

‘근데 자꾸 의식하게 되잖아…….’

생각 끝에 이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심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이온의 표정 변화를 뭐라고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무슨 징후라도 있었던 것인지 방금까지 조금 장난을 치는 투였던 카밀루스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가 욤뇽이를 매정히 옆에다 밀어 놓고는 얼른 바닥으로 내려와 이온의 팔을 붙잡았다.

“방이 추운가 보다, 이온. 그러고 보니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꾸우…….”

뒤에서 갑자기 밀려난 욤뇽이가 침대 위에 엎드려 삐친 듯한 소리를 냈지만 카밀루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빨리 올라오라는 듯이 이온을 침대 위로 이끌었다.

그에 이온이 얼떨결에 침대 안쪽에 엉덩이를 대자 카밀루스가 옆으로 몸을 붙이며 슬리퍼까지 제 손으로 벗겨 주었다. 그러고는 이온의 눈치를 살폈다.

“많이 추우면 내 옷이라도 걸쳐 줄까?”

여태 실컷 놀려 놓고 뒤늦게 비위를 맞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묻고는 진짜로 겉옷 단추를 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이온은 카밀루스의 손을 잡았다.

“됐어, 괜찮아.”

“넌 못 보니까 모르는 모양인데, 입술이 하얘졌어.”

“그래……?”

카밀루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온의 오른손을 제 왼손으로 덮어 왔다. 그제야 이온은 제 손끝이 차갑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니까 이불이라도 덮자.”

말한 뒤 카밀루스는 침대 헤드 쪽을 두드리며 이온더러 몸을 옮기게 했다. 이온은 중간에 욤뇽이를 주워 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침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마자 카밀루스가 두꺼운 이불을 끌어다 이온의 몸을 덮어 주었다.

바람이 안 들어가도록 꼼꼼하게 확인한 카밀루스가 이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런 장난 안 칠게.”

그러고 열을 재듯이 이온의 뺨을 감쌌다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온은 따듯하게 느껴지는 두툼한 손의 온도에 약간 나른함을 느끼면서도 카밀루스를 살짝 흘겼다.

“너무했다는 건 아나 봐?”

“그게, 변명을 하자면, 너무 어색할까 봐 그랬다고 해야 하나…….”

그의 말뜻을 이온은 바로 알아들었다. 문득 쓴 물을 들이켠 것처럼 입 안이 떫어졌다.

하여 겸연쩍어하는 카밀루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가 왜인지 선뜻 입을 못 열고 머뭇거렸다. 조금 전까지 웃기도 하고 가볍게 농담도 건넨 그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모양새였다.

아마 실제로는 그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온은 카밀루스가 제 입으로 막았던 사과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야 마땅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

기어이 그 말을 입에 올려놓자 카밀루스가 미간을 좁혔다.

“……너도 참 고집이 세. 그런 말 듣기 싫다고 했는데 굳이 하네.”

“네가 날 얼마나 진지하게 좋아하는지 잘 아니까.”

카밀루스의 두 눈에 심란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제 마음을 아는데도 이온이 밀어 낸 것의 의미를, 아마 그리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일 터였다.

그에 이온은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

“근데 그건 그냥 내가 불안해서…….”

“…….”

“그래서 못나게 군 거였어. 방식이 나빴다는 거 인정해.”

이온으로서는 제 나름대로 어렵게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듣고 나서 대체 뭐가 불안했냐고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아마 이온이 스스로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온은 아직 거기까지 솔직해지진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곧 카밀루스에게 제가 준비한 ‘답’을 내줄 것이다.

그의 대가 없는 희생에 대한 답을.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확실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온이 카밀루스에게로 조금 몸을 틀더니, 양팔을 뻗어 그의 어깨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푹 기대자 카밀루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품에 안긴 채 그의 청명한 파란 눈이 흔들리는 것을 올려다보며 이온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 네가…… 네가 좋아.”

“……이온.”

저번에 분명히 이온의 이 말을 기다린다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카밀루스의 얼굴에 올라온 감정은 명백히 당혹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깊게 들이쉬는 숨소리와 오르내리는 목울대, 몸을 감싸 오는 단단한 팔,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통해 그가 조금 흥분한 것도 느껴졌다.

카밀루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에, 이온은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뒷말은 도저히 그의 눈을 보면서 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네가 없는 동안 늘 궁금했어. 잘 살고는 있는 건지, 그리고 날 원망하지는 않는지…….”

“내가 왜 널 원망해?”

“나 때문에, 내가 약해서 네가 그렇게 된 거니까.”

“그건, 이온.”

카밀루스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이온은 제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네가 나 때문에 떠났다는 걸 알고도 난 어디 가서 따지지도 못했어. 그만큼 겁쟁이였고, 비겁했어.”

말하는 이온의 어깨가 살며시 떨렸다.

얼마 전에 에렌스트 경도 지적했듯이 카밀루스가 떠나간 뒤, 몸이 회복되었는데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의 무기력함에 파묻혀서 어떤 것도 할 의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인 크레이거 공작은 자신이 깨어났으니 그만이라고 했지만, 이온의 입장에서는 그 말은 곧 치졸함 그 자체였다.

카밀루스는 더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하루하루 그에게 목숨을 빚지고 사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도 그 부채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심지어는 지금도 제 목에서 카밀루스의 마나석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세이기도 하지 않던가.

“그래서, 자격이 없다고. 네 희생을 받을, 너한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이온의 말소리에 울먹임이 섞이기 시작하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더 꽉 안아 왔다. 마치 옭아매는 듯한 강한 포옹이었다.

“알았어. 그만 말해도 돼. 다 이해했으니 더는 말하지 마.”

“……미안.”

이온의 입에서 또다시 사과의 말이 나오자 카밀루스가 그게 아니라는 양 고개를 저었다. 곧 그가 단호하게 잘랐다.

“분명히 말할게. 북부행은 내가 선택한 길이야. 난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악이 아니야, 최선이었다고. 알았어?”

“…….”

이온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카밀루스가 깊은숨을 토했다. 그러고 이온을 품에서 뗴어 낸 뒤 양어깨를 잡았다.

이온의 눈가에 옅게 비치는 물기를 발견한 카밀루스가 표정을 굳히더니, 제 검지로 눈물을 거두어 냈다. 그런 뒤 또렷한 목소리로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러고 난 북부에서 내가 계획한 대로 잘 살았어. 자, 지금 봐. 내가 무엇 하나 손해 본 게 있어?”

카밀루스의 물음에 이온은 입술만 달싹이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시점에서 그가 손해 본 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황위 빼고 거의 모든 걸 가지긴 했으니까.

“말 못 하겠지? 봐 봐, 해피엔딩이잖아.”

“응.”

설득하는 말에 결국 이온이 끄덕이자 카밀루스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온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여 왔다.

“그러니까 그런 걸로 널 원망할 일은 절대 없어. 게다가 그땐…… 넌 어렸잖아. 너무 무서우면 회피할 수도 있지, 어린애한테 그런 것도 잘못했다고 혼내는 어른이 있어?”

이온이 이번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 틀린 데 없지?”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다시 제게 동의해 달라고 묻는 말에 대답할 때는, 이온의 목소리가 꽉 메어 있었다.

“……응.”

게다가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카밀루스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눈가를 훔쳐 주려 했을 때였다.

이온의 입술 사이로 고백의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카밀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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