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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33)화 (133/317)

* * * 

아침 일찍부터 후작 저를 나섰지만 크레이거 공작 저와는 거리가 꽤 되는 탓에 이온과 카밀루스가 탄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해가 하늘 한가운데 올라간 다음이었다.

떠나올 때만 해도 어두웠던 사위가 밝아진 것을 확인하고 이온이 열린 마차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먼저 저택의 정원에 마차를 세운 카밀루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카밀루스에게서는 벌써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그는 잘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 아래, 매력적인 파란 눈동자에 약간의 웃음기를 비치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고 에렌스트 경이 알아서 옆으로 물러나자 마차에서 내리려는 이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온은 잠시 멈칫했으나, 일부러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대공께서 체면도 없이 제게 먼저 손을 내밀다니요.”

이온의 지적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 어떻습니까, 항상 이랬는데요.”

“……앞으로는 자중하십시오, 전하.”

자중하라고 하면서도 이온은 일단 그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몸이 가까워지자 카밀루스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바로 옆에 있는 페드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 또 밀당 당하는 겁니까, 소공작?”

이온은 카밀루스를 곁눈으로 한 번 힐끗하더니, 빨리 가자는 듯이 저택의 현관 쪽으로 그를 이끌며 대꾸했다.

“아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남들 보는 앞에서는 체면 좀 차리시라고요.”

“새삼스럽게?”

“앞으로는 그래야 하니까요.”

계속 존댓말을 하는 이온이 낯선 듯, 카밀루스가 왜 그러냐는 의미를 담아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살짝 기울였다.

“혹시 그게 이온 크레이거의 부군으로서의 체면 같은 건가? 그런 거면 고려해 보고.”

“……장난은.”

이온이 재미없다는 듯이 눈을 흘기자 카밀루스가 에스코트를 위해 맞잡고 있던 손을 꽉 쥐어 왔다.

“허리는 괜찮아?”

불쑥 던져진 질문에 이온은 손을 털며 제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확 찔렀다.

“네 걱정이나 해.”

“……내 걱정? 할 게 뭐가 있는데?”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자기는 말짱하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이온은 그에 코웃음을 친 뒤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하인들이 기다리는 홀을 지나가는데, 겨우 하루밖에는 지나지 않았음에도 집이 몹시도 낯설게 느껴졌다.

하여 이온은 괜스레 제 방이 있는 2층의 복도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때마침 눈이 마주친 에밀리가 쪼르르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오라버니! 몸은 괜찮은 거야?”

저와 닮은 밀빛 머리를 흔들며 앞으로 다가선 그녀를 보며 이온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안타깝게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 나름대로는 장난처럼 한 말이었는데, 에밀리는 이온의 말투에 약간의 가시가 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 그래? 아버지도 어머니도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에밀리가 말끝을 흐리며 이온의 옆에 있는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소공작의 말대로입니다, 크레이거 양.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는 오빠의 말보다 카밀루스의 말이 더 신뢰가 가는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밀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온이 곧바로 근처의 집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집무실에 계십니다. 안 그래도 내내 도련님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위치를 확인한 이온이 카밀루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전하, 실례지만 제가 각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잠시 집무실 문밖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상황인 셈인데, 문밖에 서 있으라니. 묘한 제안이었던 터라 카밀루스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수락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이온은 감사하다는 말까지 덧붙인 뒤 금세 집사장을 따라 크레이거 공작이 있다는 집무실로 걸어갔다.

그러자 성큼성큼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이온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에밀리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네요…….”

그에 카밀루스가 이온을 따라가려던 걸음을 멈칫했다.

“뭐가 말입니까?”

에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팔짱을 끼었다.

“이온 오라버니, 아주 화난 것처럼 보여요.”

안 그래도 마차에서 내린 뒤 카밀루스는 이온의 표정이 묘하다 싶었다. 게다가 왜인지 계속해서 말이 뾰족하다 생각했었는데.

에밀리의 말을 듣고 나니 이온이 왜 그랬는지 명쾌해졌다. 이온은 지금 화가 난 상태가 맞았다.

카밀루스는 에밀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아버지와 크게 싸우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크레이거 양. 너무 흥분하지 않게 할 테니.”

그에 에밀리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그럼 부탁드려요, 대공 전하.”

오빠를 놀릴 때는 마냥 어린 소녀처럼 보였는데, 이럴 때는 또 아니다.

카밀루스는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작게 웃고는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부관에겐 홀에 남아 있으라 고갯짓을 한 그는 이내 회랑을 돌아 들어갔다.

잠시 에밀리와 대화를 나눈 사이 이온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회랑에 그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중간에 이온을 데려다주고 나오는 집사장과 잠시 눈인사를 한 그는 천천히 공작의 집무실 앞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의문을 떠올렸다.

‘대체 뭐지?’

이온이 왜 화가 났을까.

생각해 보면 이온은 어제부터 조금 달랐다.

불과 나흘 전만 해도 그토록 자신을 밀어내던 그인데, 돌연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태도의 변화는 분명 어떠한 계기로 말미암은 것일 터였다.

‘사실 솔친 후작과의 저녁 식사 때도.’

왜 갑자기 북부에 관심을 두는 건지.

그 자리에서 한 말들이 단순히 솔친 후작 쪽에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과했다.

아니, 일단 이온이 솔친 후작 저택에 찾아간 것 자체가 사실은 굉장히 개연성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카밀루스도 애초에 이온에게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간 게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이온도 부정하지 않았고.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카밀루스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너무나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전혀 짐작이 안 되었다.

이온을 변화하게 한 그 진실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카밀루스는 내심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이온이라고 해도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애써 부정했다.

저벅, 저벅…….

공작의 집무실은 1층의 홀과 조금 거리가 있는 조용한 안쪽에 위치했다.

은근히 빛이 덜 들어오는 복도의 분위기 때문인지 어두웠고, 발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 탓에 카밀루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마침내 공작의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카밀루스는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크레이거 가문의 한 하인을 잠시 돌아보았다.

다행히 멈추라는 신호를 알아들은 영민한 상대를 확인하고, 그는 천천히 공작의 집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이온은 어째서 굳이 이곳 앞에 서 있으라고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기 전이라 아직은 웅성임처럼 희미하게 들려오는 안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온의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한 소리로 귓가에 울려왔다.

“저, 대공이 왜 황실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요.”

“…….”

그리고 첫마디를 듣자마자 카밀루스는 제가 복도를 걸어오면서 떠올렸던, 아닐 거라고 부정했던 그 가정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 * *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어제의 후유증은 그저 뻐근하고 불편한 정도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 걷다 보니 문득 허벅지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여 크레이거 공작의 집무실 문을 노크하기 전 이온은 괜스레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기절하기 전에 분명 카밀루스의 것이 뿌려진 게 느껴졌던 그곳을.

‘정말 아이가 생길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지면 배가 불러 오려나?

그런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망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보통의 경우와 같다면 고작 잠자리 한 번에 아이가 안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이온도 어젯밤 단 하루로 그의 아이를 가지는 우연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기실 생겨도 현재 자신이 진짜로 낳을 수 있는 몸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결국 저를 안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걸로 자신조차 더는 돌아갈 길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그거였다.

절대로 뒤돌아봐서는 안 되는 절박함 말이다.

이온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예요.”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고, 문을 연 이온의 눈앞에 곧장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상태 이상: 호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이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짧게 아버지의 호의 상태를 알려 준 시스템은 이내 한 가지 메시지를 더 띄웠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퀘스트가 완료됨에 따라 본 만남 중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호의 수치가 조정됩니다.]

그 텍스트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 이온은 덤덤한 표정으로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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