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34)화 (134/317)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크레이거 공작이 환한 얼굴로 이온을 맞이하며 앞으로 걸어왔다. 

“이온, 다행히 별일 없는 모양이구나.”

이온은 그에 어색하게 웃으며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도 하루 동안 별일 없으셨죠?”

한마디 뱉고 나니 목이 간지러워진 이온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가볍게 기침을 했다.공작의 집무실은 그 용도에 걸맞게 사방의 책장에 책이 빼곡했는데, 그 때문인지 공작의 집무실은 공기가 늘 탁하게 느껴졌다.

이온이 기침하는 모습에 공작은 다시 창문 쪽으로 돌아가 살짝만 문을 열어 둔 뒤 되돌아와 이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의 티포트에서 식은 물을 따라 이온에게 내주며 먼저 가볍게 잡담으로 운을 띄웠다.

“솔친 후작은 어디 잘 지내더냐?”

솔친 후작이 귀족파로 돌아선 뒤 연락 한 번 없었던 일 때문에 정말로 서운해했던 공작인 터라, 묻는 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이온은 물을 한 모금 머금은 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안드레아 형 부인도 아주 미인이던데요.”

“그래, 해서 원하던 것은 얻었고?”

“솔친 후작 쪽은 역시 제가 아니라 대공과 대화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대공이 찾아온 덕분에 도움도 좀 받게 되었죠.”

적당히 잘 풀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돌려 말하자, 공작은 몸까지 기울여 가며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이온이 처음 사업에 손을 댔을 때 불안해하던 크레이거 공작은 이젠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이 하는 일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이온이 뭔가 잘한다 싶으면 혼자서 뿌듯해하는 게 요즘 공작의 일상이다.

이온의 앞에서는 직접적인 칭찬의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사교 모임 같은 데에 나가는 이유가 혹시 이온의 자랑을 하러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고 다니곤 했다.

“북부 쪽으로 교역로를 건설할까 싶어요. 대공의 허락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조만간 실측 인원을 보낼 계획입니다.”

“그래, 일이 잘 풀린 것 같구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이번에도 역시 작게 눈웃음만 짓고 신뢰의 말을 읊어 준 게 전부였다. 그가 속으로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온은 평소처럼 함께 웃지는 않았다.

대신 물잔을 비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크레이거 공작이 아들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왜, 아비한테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사실 솔친 후작 저택에 간 건 그 용건 때문이 아니에요.”

공작은 이온이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용건도 잘 해결했니?”

물음에 이온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짧게 한 마디만 뱉었다. 앞으로 해 나갈 말 때문인지 대답이 조금 힘들었다.

“……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리 어두워?”

공작은 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온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반응해 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심장이 요동침을 느꼈다.

공작은 자신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헌신적인 데다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고, 무엇보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신뢰해 주었다.

그래서 제 앞에 내던져진, 그리고 내던져질 진실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이온은 티포트를 들어 다시 물을 따랐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다행히 공작은 가만히 지켜만 볼 뿐 별다른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짧은 순간 제 아들의 고민 상담을 해 주는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온은 혹시 물에도 체할세라, 한숨을 내쉬어 일단 가슴을 진정시킨 뒤 목으로 넘겼다. 분명 아무 잎도 우려내지 않은 맹물인데 유독 쓰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컵을 내려놓은 이온이 이윽고 공작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온의 초록빛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게 식어 있었다.

“저, 대공이 왜 황실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요.”

첫마디를 듣고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아직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제대로 맥을 짚지 못한 듯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선황께선 지금의 황제,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을 후계로 정했으니 그보다 더 계승 서열이 높은 적통의 황자 따위, 있어선 안 되는 존재였겠죠.”

낮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이온의 말을 듣고도 공작은 한참이나 반응하지 못하고 헤맸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신음처럼 한마디를 뱉어 냈다.

“이온, 그걸 대체 어떻게…….”

벌써 25년이나 지난 뒤다. 카밀루스가 태어났을 당시, 그 일을 알고 있을 이들은 대부분 늙어 죽었을 나이가 됐을 터이다. 그게 아니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죽였을지도 모르고.

어찌 되었든 공작은 선황도 죽은 시점에 카밀루스의 탄생 비화를 알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세상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온은 더 배신감이 컸다. 카밀루스의 출생에 대해서 아는, 딱 하나 남은 사람이 제 아버지라는 것에.

그 일을 알고 있는 연유가 어찌 되는지는 사실 상관없다. 그저 크레이거 공작이 카밀루스가 당한 학대의 방관자라는 사실이 충격을 줄 뿐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방조자일지도 모른다.

이온은 입술을 한 번 깨물어 떨림을 지워 냈다.

“선황은 대공이 미워서 그랬다고 쳐도…… 아버진 왜 알면서도 끝까지 숨기셨어요? 선황에 대한 충성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시죠?”

“……!”

챙그랑!

공작의 손에서 들고 있던 잔이 툭 떨어졌다. 하지만 깨진 잔을 신경 쓰는 이가 둘 중엔 없었다.

이온의 침착했던 목소리는 점점 화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10년도 넘게 탑에 갇혀 있던 아이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심지어는 그 아이가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의 아들이라는 것도요.”

“이온!”

이온의 입에서 끝내 로제니아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이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거칠어지는 숨만 한 번 갈무리했을 뿐,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

물론 유쾌해서 웃는 건 아니었다. 비웃음이나 자조, 혹은 쓴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도 설마 그 빌어먹을 탑에 카밀루스를 가둔 공범이세요?”

“당장 닥치지 못해!”

정곡이라도 찔린 모양인지, 크레이거 공작이 노성을 내리질렀다. 덕분에 이온은 잠시 주춤했다.

아들이 놀란 것을 보고 공작은 깊은숨을 내쉬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듯이,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태 이상: 호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플레이어에게 깊은 호의를 느낍니다.]

그사이 아버지의 호의 수치가 조정되어 ‘극도의’라는 표현이 ‘깊은’으로 변경되었다.

잠시 뒤, 탁자를 짚은 손으로 주먹을 쥔 크레이거 공작은 이내 감정을 추슬러 다시금 이온과 눈을 마주쳤다.

“이온,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만.”

입을 연 때에 공작의 눈빛이 차가웠다.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건…… 세상에 나와선 아니 되는 진실이다.”

그 저변엔 지독한 무정함이 깔려 있었다.

이온은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문득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다.

카밀루스가 북부로 떠나고, 자신이 처음 눈을 떴던 그때를.

〈네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온. 하마터면 이 아비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뻔했어.〉

당시 크레이거 공작은 겨우 깨어난 이온의 앞에서 울었다. 그때 그의 모습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온은 그 이면에 있는 지독히도 냉혹한 아비의 모습에 떨어야 했다.

그건 불행을 겪는 게 내 아들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발로한 가혹함이었다.

하여 이온은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당시의 상황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이전으로도, 이후로도 그만큼 부끄러운 날은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이온은 그때와 달라졌다.

더 이상은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 않을 터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 사는 것은 그 한 번으로도 과분했으니.

“왜 세상에 나와선 안 된다는 거예요? 대공이 돌연변이라서요? 아니면 거기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요?”

“대공은.”

이온에게서 질문이 연이어 흘러나왔으나 크레이거 공작은 단 한 마디로 갈무리했다.

“원래라면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온은 그런 말이 제 아비의 입에서 나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충격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세요? 게다가 대공은 엄연히 클로델 황가의 핏줄입니다, 공작 각하!”

“그래, 막말이지. 하지만 사실이다. 그러니 네가 알게 된 그건 잊어라.”

“…….”

이온의 지적에도 크레이거 공작은 실언이라고 정정하지 않았다. 그에 이온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제 아비가 이토록 남에게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이온은 눈동자를 굴려 문 쪽을 힐끗했다.

따라와 달라고 했으니 분명 밖에 카밀루스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경멸 어린 말을 듣게 할 요량은 아니었기에 이온도 당혹스러웠다.

차라리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따지기라도 했으면 나았을 텐데, 카밀루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서서 이 말을 전부 다 듣고 있으리란 상상을 하니 제 손이 다 떨릴 지경이다.

그렇지만 역시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건 곧 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겠다는 의미이니까.

“그럴 수 없다면요? 제가 못 잊겠다면요?”

“이온……!”

크레이거 공작이 무언가 뒷말을 이으려 한 찰나였다. 이온이 공작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한마디를 꺼냈다.

“저, 대공이랑 잤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