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대공이랑 잤어요.”
“뭐야?”
이제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에선 처음 이온을 맞이했을 때의 따스함과 애정 따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허탈해하는 얼굴로 이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대체 무슨 말을 들었냐는 양.
공작 또한 카밀루스와 이온이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선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나 공작이 믿었던 건 제 아들이었다. 제 아들은, 이온은 그렇게 사랑에 눈멀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온은 그런 아버지의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버렸다. 그것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곤조곤한 어투로.
“카밀루스가 계속 안 된다고 하는데 어젯밤에 제가 먼저 유혹했어요. 절 가져 달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그 태어나면 안 됐던 그 녀석한테 엉덩이를…….”
흔들어 줬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찰나, 공작이 벌떡 일어나 소릴 질렀다.
“네놈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밀려오는 실망감과 분노가 응축된 외침이었다. 이온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공작의 손이 위로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최초로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뺨을 맞았던 그때처럼 매서운 따귀가 날아올 것 같았다.
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만 골라 썼다. 말할 때부터 이 정도는 각오했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만 순간 벌컥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발소리가 난입했다. 그러고 공작의 앞을 막은 게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탁!
카밀루스가 끼어들어 공작의 손목을 붙들어 막았다. 힘으로 억눌러 손목을 내리게 한 그가 공작에게 일침을 놓았다.
“너무 흥분했습니다, 공작.”
“…….”
손목을 풀어 주자 공작은 잡힌 곳이 아팠는지 그곳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조금이나마 감정을 진정시킨 뒤 중얼거렸다.
“막아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대공께서 대답해 주시지요.”
카밀루스가 말하라는 의미의 눈짓을 보내자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분노로 목소리를 떠는 중이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제, 제 아들놈이랑…….”
진짜로 붙어먹었냐고.
하지만 문이 열린 지금 공작이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다 알아들은 카밀루스는 결코 상황을 에두르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사실입니다, 공작.”
금세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공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기실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야 어찌 되든 하등 상관없었다. 이온을 놔두고 알아서 결혼을 하든, 북부로 돌아가서 혼자 살든. 과정 중에 이온이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결국 이겨 낼 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이서 잤다니? 심지어는 어제저녁에 그랬다는 말을 들으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 그래도 아픈 몸 때문에 좋은 혼처도 못 구하는 신세인데, 그런 소문까지 돌면 이온의 사교계 평판은 땅에 처박힐 게 틀림없었다.
귀족의 몸에는 전쟁에서의 상처 외에는 어느 흠결도 없어야 하는 법이다. 한데 카밀루스와 잤다는 건…….
그야말로 끔찍한 기분에 휩싸인 공작이 이온을 돌아보며 분노를 내질렀다.
“네놈이 지금 인생을 망치려고 환장한 게냐! 도대체가 대공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야!”
그러고 다시 카밀루스에게 원망의 소리를 쏟아 냈다.
“그리고 대체 대공께선 뭘 원하셨던 겁니까? 소중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아들이 그리도 소중하다고!”
“미…….”
카밀루스가 반사적으로 미안하다 하려 했으나 이온이 저지했다.
“사과하지 마세요, 대공.”
“…….”
카밀루스가 난처함이 어린 얼굴로 이온을 돌아봤다. 왜 하필 이런 식으로 말을 해서 사달을 내냐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두 사람분의 눈총을 받은 이온은, 그럼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대신 태연히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나 이쪽에서 큰소리가 나자 호기심이 동했던지 다들 근처로 몰려들었다. 특히 복도 끝에 에밀리와 그 시녀가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 그녀에게 이온은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대답을 거절했다. 그러고 세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몰려든 이들에게 외쳤다.
“구경할 생각 말고 모두 물러나!”
도로 문을 닫아 버린 이온은 자신의 입을 주목하는 크레이거 공작과 카밀루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시선이 먼저 도달한 곳은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이제 제 앞에선 대공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온.”
“저 카밀루스 좋아해요.”
아들의 고백을 들은 공작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발견한 카밀루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온 앞으로 와 시야를 가렸다.
“이 정도면 됐어. 그만해.”
그러고 앉아서 대화하자며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나마 셋 중 카밀루스가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다행인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이온은 제 어깨를 잡은 카밀루스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의자에 나란히 앉으면서도 표정을 풀지 못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벌써부터 탈력감이라도 왔는지 소파에 반쯤 주저앉았다. 골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 안 한다. 둘은 절대 안 돼.”
“전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닌데요. 제 마음, 남의 것 아니거든요.”
이온과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공작이 이번에도 카밀루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설마 대공께서도 같은 생각이신 겁니까?”
한데 질문을 받은 카밀루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엔 이온이 옆에서 팔을 치며 그를 채근했다.
“대답 안 하고 뭐 하십니까?”
“…….”
“대공.”
침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어 이온이 불안해 다시 그를 불렀지만 카밀루스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공작과 눈을 마주친 그가 어쩐지 긴장한 표정으로 질문 하나를 토해 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공작.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의 벽이 세워졌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고, 누구도 선뜻 말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카밀루스로서는 답이 꼭 필요한 말이었다. 죽기 전에 아이오딘을 찾아온 선황 역시도,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존재 자체가 죄악이다.
선황은 그렇게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저주를 퍼부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어릴 때 탑에 가둬 둔 것에 대한 사죄의 말은 물론 그 비슷한 것조차 하지 않았다.
선황은 제 아들을 이름 없는 탑에 가둬 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던 거다. 반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왤까.
그 이후로 계속 고민해 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혹, 어머니가 나 때문에 죽었습니까?”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죽은 선황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했다.
어머니와 닮았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얼마 전 태후궁에 가 회랑에 늘어서 있던 초상화를 본 뒤, 카밀루스는 실제로 로제니아의 초상화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다행히 드나들고 있는 황실 도서관에 역대 황후들의 초상을 엮은 일람이 있었다.
워낙 작은 초상화라 얼마나 똑같이 묘사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솔직히 특징적으로 묘사된 부분만 보면 로제니아 클로델은 그렇게 제 얼굴을 보고 그리워할 정도로 똑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와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 계란형의 얼굴 윤곽 안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미인이었다. 코 길이도 짧아서 언뜻 귀엽게도 보였다.
어릴 때라면 모를까, 이미 성년이 된 카밀루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저 눈매가 조금 닮았나, 아니면 귀 모양이 좀 비슷한가 하는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아들인 줄도 몰랐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선황은 사랑했던 부인의 흔적을 아들의 작은 한구석에서라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닮았다고 말했다.
대체 얼마나 사랑했으면,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증오하는 아들에게서라도 그 부분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싶게.
그러니 추측은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선황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들 때문에 잃은 것이다…….
학대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그 이유로는 그럴듯해 보였다.
한데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자, 카밀루스가 공작을 채근했다.
“공작, 대답을.”
크레이거 공작은 그제야 겨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산고 끝에 돌아가셨다거나 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대공이 태어난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황후 폐하의 자살에는 영향을 미치셨지요. 그때에도 대공은 탑에 갇혀 있었고, 그걸 안 황후께서 선황께 꺼내 달라 내내 청하셨습니다.”
카밀루스는 제가 사리 분별 못 하는 아기 때부터 갇혀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할 법했지만, 그 부분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대신 다른 부분을 먼저 물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면 안 되는’ 아이이기 때문에 선황은 매번 거절을 했고, 결국 황후는 내가 있는 탑으로 와 자살을 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건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하…….”
예상보다 더 어이없는 결말에 카밀루스는 크게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표정을 싹 굳힌 뒤 낮게 뇌까렸다.
“선황도 아주, 개지랄을 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