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황도 아주, 개지랄을 하셨군.”
그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옆에서 듣던 이온이 순간 기도로 먼지를 잔뜩 들이켜 버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콜록거렸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얼른 몸을 틀어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까, 소공작?”
금세 얼굴이 새빨개진 이온은 기침을 하느라 대답 대신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댔다.
한데 둘이 그러는 꼴을 보고 비위가 상했는지 공작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하던 방금 전의 말을 이었다.
“선황께서는 대공 전하가 탑 밖에, 세상에 나오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결코.”
카밀루스의 짙은 파란색 눈이 크레이거 공작에게로 향했다.
저리 말할 만큼 선황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의 아들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은 역시나 너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대꾸했다.
“하지만 이미 나온 이상 그런 건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지.”
그때, 겨우 기침을 진정시킨 이온은 입 안의 침을 모아 목을 가다듬고는 카밀루스의 말에 동조했다.
“아버지가 충성을 바쳤던 선황은 떠났어요. 그리고 대공 역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뿐인가요? 원래라면 현 황제보다 계승 서열이 더 높았던 적통이죠.”
당연하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말에 어느 하나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듯, 반박을 듣고도 눈썹만 한 번 까딱할 뿐 여전히 완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화의 흐름을 완전히 놓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이온,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게지? 이 아비의 방에 들어온 목적 말이다.”
설득이 안 되어서 그렇지 말이 아예 안 통하는 것은 아니라 다행한 것인지, 아니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설득이 안 되는 이 상황이 오히려 불행한 것인지…… 판단이 잘 안 섰다.
여태껏 그의 지지와 사랑만 받아 왔던 이온은 제 아버지라는 벽 앞에서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다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레 겁을 먹어 물러나는 것 역시 성미에 안 맞았다.
이온은 공작에게 청했다.
“아버지가 절 도와주셔야겠어요.”
아니, 그건 ‘청’ 같은 게 아니라 통보나 협박에 가까웠다.
“대공을 돕는 게 그렇게 꺼려지시면 다른 시점으로 생각하세요. 아들 인생을 진짜로 망치고 싶은가, 아닌가.”
“…….”
제 인생을 도박장의 한가운데에 던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구하러 올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롯이 공작의 몫이지만.
“아버지도 제대로 판단하셔야 할 거예요. 대공이 태어난 상황이 얼마나 불결하고 저주스러웠는가가 현재를 바꾸진 않을 테니까요.”
“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는 게다.”
“……그럼 말씀해 주실래요? 대공이 얼마나 비극적인 존재인지?”
설령 듣는다고 해도 제 생각이 바뀔까 싶었지만 이온은 일단은 이 지루한 반복을 끝내기 위해 물었다.
옆에 있는 카밀루스도 그토록 기다렸던 때였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공작은 이번에도 그런 그들의 기대를 배반했다.
공작이 더는 대화하기 싫다는 양 의자에서 일어나 버렸다.
구두 아래로 깨진 컵을 밟아 와작,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 뒤로 걸어간 그가 등을 보였다.
“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엔 그 일을 이 입으로 말할 일은 없다.”
“아버지!”
이온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공작이 확 돌아서며 손끝으로 카밀루스를 가리켰다.
“저건……!”
삿대질까지 받으면서 사람의 호칭도 아닌 것으로 지칭되자, 순간 카밀루스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싸늘했던 집무실의 공기가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크레이거 공작의 손가락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렇지만 공작과 카밀루스는 숨이 막히는 적막 속에서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건 카밀루스였다.
“내가 당신 아들을 봐서 어디까지 참아 줄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공작은 흥분했던 것을 인정하는 듯, 호칭을 정정했다.
“대공께서도.”
끝내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썩 만족스러운 행태는 아니었기에 카밀루스는 눈썹을 꿈틀했지만, 말을 막지는 않았다.
“황실의, 오브라이언의 치부를 들추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그 말에 배어 있는 심의를 파악한 카밀루스가 되물었다.
“선황의 치부가 아니라, 황실의 치부다?”
카밀루스 클로델이.
그에 공작은 대답하지 않고 도로 몸을 돌려 버림으로써 그렇다는 뜻을 내비쳤다.
대화를 할수록 카밀루스의 안색이 점점 희어지는 것을 걱정스럽게 보던 이온이 그 순간 옆에 도로 앉아 손을 잡아 주었다.
흠칫한 카밀루스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고서야 얼굴을 살짝 허물어뜨리자, 이온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에는 다시 표정을 굳힌 그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럼 아버지, 선황은 왜 그런 저주스러운 아들에게 대공위를 내렸을까요?”
“내가 그 속을 어찌 다 알겠느냐.”
이온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철저한 황실파로서 늘 선황의 편을 들었던 그가 이런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모르쇠를 드는 게 우스웠던 탓이었다.
그 맹점을 이온은 정확히 짚어 냈다.
“맞아요. 죽은 자는 말이 없죠. 그러니 그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하느냐는 남은 사람의 몫일 거고요. 아버지도 선황이 설마 그걸 모르고 대공위를 내렸다고 생각하진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이온, 네가 내린 결론이 따로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네. 저는, 오브라이언의 황좌를 대공의 것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이온이 내린 결론을 듣고 공작이 다시금 뒤돌아섰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얼이 빠진 표정의 공작이 제가 이해한 뜻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들었다.
“대놓고 반역을 하겠다고?”
하지만 이온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왜요, 현 황제에게 아들을 밀고라도 하실 건가요?”
“…….”
공작의 입술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들이 당장 단두대에 끌려가는 걸 원하지 않는 이상에야, 당연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온은 팔짱을 끼며 상황을 냉정히 지적했다.
“아버지, 솔직해지세요. 버니언을 선황만큼, 그렇게 절대적으로 섬길 수 없으시잖아요?”
크레이거 공작이 지그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리 크레이거 가문은.”
설교가 시작될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온은 제가 대신 말을 이으며 그마저도 차단했다.
“오브라이언의 절대적 2인자, 가장 충직한 황실의 개. 수백년간 황실을 절대 배신하지 않은 공신 가문……. 그게 크레이거가의 정체성이자 긍지이죠.”
물론 대를 거듭하면서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오브라이언 건국 시절의 영광을 기억하는 이는 모두 스러졌다. 두 개의 왕조는 지나가고, 벌써 세 번째 왕조가 열렸다.
크레이거 가문도 한때는 황실마저 위협스럽다 생각했을 만큼 강했던 공국의 군사적 기반을 잃고, 이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개 귀족 가문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여 이온은 충성이나 공적 같은 말은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모두 말뿐인 허상들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누군가에겐 그것이 목숨만큼 소중할 수 있으니 그 신념까지 꺾을 요량은 아니었다.
“잘 알고 있구나, 이온. 그럼 결론은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다만 공작 스스로가 만들어 낸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대공 역시 클로델 황가의 사람이에요.”
공작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자, 이온이 질문을 덧붙였다.
“불순물이 누군가요, 아버지?”
“…….”
“물론 아버지가 협조하지 않으셔도 전 제 갈 길 갈 거예요. 말씀드린 건 그래도 아버지니까, 한편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이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단지 기회를 주려 한 것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속죄할 기회를.
그래서 거절당한 마음이 유독 아팠다.
“과거에 대공이 왜 그렇게 학대를 받아야만 했는지 저는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게 대공의 탓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몇 번을 거듭 생각해 봐도 카밀루스는 죄가 없다.
실제로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공작이 제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질문을 해 대지 않았던가.
왜 자기가 그토록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그는 궁금해하고 있었다. 선황이 죽고 난 지금도, 여전히 말이다.
제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는 이온의 말투는 저조해져 있었다.
“아마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었겠죠. 그러니 만약 아버지도 잘못한 게 있으시다면 증오하지 마시고 용서를 비세요.”
말하면서 카밀루스를 붙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마지막 문장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였다.
“저를 더……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요.”
그 뒤 잠시 마주친 아버지의 눈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며, 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뒤돌아서 집무실 밖을 나가 버리는 이온의 뒷모습이 퍽 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