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38)화 (138/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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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되었으니 기다리라고 해.〉

이온은 당연하지만,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아스타틴을 곧장 집 안에 들이지 않았다.

불쑥 찾아온 그를 받아들일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공작도 소식을 들었을 텐데 역시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제 행동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하여 이온은 방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다가, 카밀루스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 에밀리와 어색한 식사 시간을 이어 갔다.

이온이 식사 중에 잠시 식기를 내려 놓았을 때였다. 이온과의 대화 시간을 피하려는 듯 점심 식사 시간에 자리를 채우지 않은 공작의 빈자리를 보며 에밀리가 목소리를 낮춰 물어 왔다.

“대체 아버지랑은 왜 싸운 거야, 오빠?”

그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온이 고기 한 점을 입에 우물거렸다. 에밀리가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계속 채근했으나 그는 먹을 것을 목으로 넘긴 뒤에야 냅킨으로 입을 닦고 건조하게 보이는 초록빛 눈으로 동생을 응시했다.

“견해 차이야. 하지만 에밀리, 앞으로는 집안에 사람을 들일 예정이라면 내 허락을 먼저 받아.”

“무슨 의미야?”

“무슨 얘기겠어? 네 남편감을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검증을 해야겠다는 의미야.”

지금껏 집안의 결혼 압박 없이 살았던 에밀리는 오빠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체 아버지랑 그런 식으로 기 싸움 해서 뭐 하게? 적당히 화해해. 그리고 아버지가 오빠보다 훨씬 어른인데…….”

오빠한테 반대하는 거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런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이온이 딱 잘라 말했다.

“늙음이 지성을 만들어 주진 않아, 에밀리.”

그에 에밀리는 눈을 가늘게 만들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고운 이마에 세로로 주름이 쭉 갔다.

“하여간 건방지긴.”

“자꾸 그런 식으로 오라버니 놀릴래?”

“꼰대.”

“뭐?”

동생이 연타를 날리자 이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에밀리는 솔직담백한 감상을 말한 것뿐이라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포크를 들어 이온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키며 ―아무래도 포크로 이온을 직접 가리키는 건 그녀가 판단하기에도 너무 교양이 없어 보였다― 이온 옆의 카밀루스를 돌아보았다.

“대공께선 이런 오라버니의 대체 어디가 좋으신 건가요? 고집 불통에, 완전 자기 잘난 맛에만 살고 있잖아요.”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온과 에밀리 두 사람의 눈총을 받게 된 카밀루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픽 웃으며 대꾸했다.

“제 눈엔 예쁘고 귀엽기만 한데요.”

옆에서 이온이 대답 똑바로 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 대답은 진심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에밀리는 곧바로 표정이 썩었다.

“역시 괜히 물어봤어.”

입맛이 떨어졌다는 양 에밀리가 풀만 가득 든 제 접시를 대충 뒤적이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이온의 전담 버틀러가 식당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저, 도련님…….”

“무슨 일?”

안 그래도 식사 시간이 조금 지루해지려는 찰나였기 때문에, 이온이 곧장 고개를 돌리며 반응했다.

“다른 게 아니라 밖에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한데 딜런 경과 노아기사단 기사들이 아직도 대문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라…….”

아무래도 밤사이 잠시 그친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온은 고개를 뒤로 돌려 그리 크지 않은 뒤쪽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하얀 눈송이가 폴폴 날리는 것이 좁은 틈으로 보였다.

버틀러의 입장에서는 밖에 사람을 계속 세워 두는 것이 좀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타틴이 왔다는 소식이 들어온 지 벌써 두 시간은 족히 지났다.

이러나저러나 노아기사단은 황실 소속의 제1기사단이었다. 그곳의 부단장인 아스타틴은 당연히, 어디를 가든 지금과 같은 홀대를 받은 적이 없을 터였다.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은 면이 있기도 했으나, 이온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만 보러 가 볼까?”

물론 이온은 말 그대로 ‘보러’만 가 볼 생각이었지만, 다르게 알아들은 버틀러는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이번에 당황한 건 에밀리였다. 그녀가 아직 음식이 거의 줄지 않은 이온의 접시를 보며 이온을 말렸다.

“벌써 가? 아직 음식이 한가득 남았는데? 가더라도 이거 다 먹고 가야지.”

이온이 대답하는 대신 에렌스트 경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식사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러니 이온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 완곡한 표현에 에밀리는 에렌스트 경을 올려다보며 하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응…….”

그런 둘을 힐끗한 이온이 더 이상의 말 없이 먼저 식당을 나서자, 카밀루스도 뒤따라 나갔다.

남은 에렌스트 경은 카밀루스와 이온이 남긴 음식들을 깨끗한 접시에 챙기며, 자꾸만 식당의 문을 돌아보며 걱정스러워하는 에밀리의 관심을 차단하듯 이내 식당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도로 식탁 앞으로 돌아와 에밀리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너무 불안해는 마십시오.”

“……알렉은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오빠랑 아버지가 싸운 이유 말이야.”

에렌스트 경은 살짝 눈을 들어 크레이거가의 고명딸인 공녀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이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에렌스트 경도 아직 듣지 못했으니 단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뿐이었지만, 아마 제 추측이 맞을 것이다. 이온이 앞으로 노골적으로 카밀루스의 편을 들겠다며 태도를 바꿨으니.

이온은 본래 한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연약하고 유순해 보이는 얼굴의 이면에 있는 것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단이었다.

다만 저간의 사정을 아는 에렌스트 경이라 해도 카밀루스가 선황후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전부 다 말해 줄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래도 말 사이사이에 빈 공간이 많았다.

“네, 그리고 앞으로 공작 각하와 소공작께서 더 많이 부딪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나도 알려 줘. 왜 나만 몰라야 해?”

하지만 그런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 에밀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을 리 없었다. 그녀가 따지듯이 계속해서 말끝에 물음표를 달자 에렌스트 경은 고개를 저었다.

“공녀께서 알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치실 수도 있으니까요. 각하와 소공작 모두 공녀께서 피해를 보는 건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무슨 말이 그래? 나도, 나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적어도…… 오빠 말대로 결혼 같은 걸 통해서라도…….”

에밀리는 제 말이 정답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초조해진 마음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을 이었다.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진지한 얼굴이 된 그가 옆에 서자 에밀리가 불만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공녀께서도 도련님의 방금 그 말이 그런 뜻이 아님은 아셨겠지요?”

그에 에밀리의 초록빛 눈이 에렌스트 경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싫어. 왜 그래야 해? 아버지랑 오빠는 사이좋은 거 아니었어?”

“예, 그러니 싸우신다고 해도 너무 길어지지는 않지 않겠습니까. 제가 봤을 땐 각하께서 그래도 물러나 주시지 않을까…….”

그때였다. 뒤에서 식당 문이 도로 열렸다.

“말 잘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구두굽 소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에렌스트 경이 흠칫했다. 이내 몸을 돌려 상대와 마주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선 사람은 바로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집무실에서 식사를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미처 이곳에 거동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에렌스트 경은 당황하고 말았다.

게다가 때마침 크레이거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참이지 않았던가. 크게 폄훼하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로 상황이 난처했다.

“함부로 입을 놀려 죄송합니다, 각하.”

“뒤에서야 무슨 말인들 못 하겠나.”

“…….”

시종장을 대동하고 들어온 크레이거 공작은 상석에 앉았다. 그런 뒤 차를 마시는 모습에 에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온에게는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 있었지만, 공작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매섭게 굳어 있어서 그런지 왜인지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에렌스트 경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얼른 음식을 챙기고서 조심히 걸음을 물려 나가려던 찰나였다.

크레이거 공작이 김이 올라오는 꽃 찻잔에 살짝 입을 대었다가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 아들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뭐냐. 에렌스트, 넌 알고 있겠지.”

순간 뒤로 빠지던 에렌스트 경의 발이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완곡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뜻을 전했다.

“각하, 송구합니다.”

그러자 공작이 냉정히 지적했다.

“착각하지 말거라. 넌 이 가문의 기사다, 소공작의 기사가 아니라.”

그 말은 곧 크레이거가의 가주인 공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권리 따위는 그에게 없다는 의미였다. 함의를 파악한 에렌스트 경이 긴장하여 크레이거 공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들과 결국 등을 지려고 하는 건가.

거기까지 떠올린 에렌스트 경은 목뒤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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