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수년이 지나도록 에렌스트 경의 거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공작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
크레이거 공작은 그렇게 표정이 굳어 버린 에렌스트 경을 곁눈으로 확인했다.
“왜, 내 아들이 가문의 전권을 휘두르고 있으니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더냐.”
에렌스트 경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는 일단 손에 든 것들을 식탁 위에 도로 내려놓고, 공작의 옆으로 가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제 태도로 인해 이온이 책을 잡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오해이십니다, 각하.”
그러자 크레이거 공작이 에렌스트 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이 전례 없이 날카로운 것에, 에렌스트 경은 은근한 압박감을 느꼈다.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이 가문의 전면에 나서면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 저택에서 숨을 죽이면서 살아왔었다. 거의 칩거하다시피 말이다. 간혹 사교 모임에 모습을 비칠 뿐, 그 이상의 권한을 휘두른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다만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그 어떤 권한도 내려놓지 않았다. 심지어는 오브라이언의 제국 내에 있는 네 개의 공작가 중에서 가장 큰 공국을 이끄는 제국의 2인자였다.
지금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수 있는 가신 가문만 수십 개다.
그러나 또한 그 권력을 오로지 황실을 지키는 데만 쓰는 절대적인 충신이기도 했다. 문제는 현재 그의 충심은 이온의 계획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에렌스트 경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다음에 나올 공작의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제발.
제발…… 제가 그의 등에 칼을 꽂을 일이 없기만을 빌면서.
“하면 말해 보거라,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
에렌스트 경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대각선에 앉은 에밀리의 얼굴도 풀리는 게 보였다.
그들의 반응이 불쾌하다는 듯이 공작이 입매를 굳혔다.
“내가 설마 저 밖의 놈이 내 아들을 욕보인 그날을 잊을 줄 알았나? 그리고 알렉사이 에렌스트, 네놈도 그때 나에게 돌아와 맹세하지 않았느냐.”
“…….”
공작이 언급한 저 밖의 놈이란, 아스타틴 딜런을 가리킴이 분명했다.
8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하는 크레이거 공작의 발언에 에렌스트 경의 눈이 흔들렸다.
그날, 이온이 쓰러지고 이온과 에렌스트 경은 황실이 말도 안 되는 보호 명목으로 데려갔다. 이후 에렌스트 경은 이온과 떨어져 하루 내내 황성의 어딘가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다음 날에야 황제의 시종장이 와 꺼내 주었다.
〈소공작은 이미 크레이거가에서 데리고 돌아갔소.〉
그런 말과 함께.
이온은 공작가에서 데려갔지만, 저는 공작가의 사람이 아닌 황제의 사람이 와서 풀어 준다는 사실에서 에렌스트 경은 어렴풋이 추측했다. 황태자와 이온의 거취를 두고 황제와 공작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발생한 게 아닐까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황태자궁에서의 그 난리가 황실과 공작가의 기묘한 타협으로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하여 공작이 혹시나 아픈 아들이 정치적 가치가 없음을 알고 포기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안고 공작가로 향했었다.
그러나 그때 크레이거 공작의 모습이 어땠던가.
그는 정신을 잃은 이온의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도 우는 것이 분명했다. 아들을 붙잡고 있는 손이 사정없이 떨리는 중이었으며, 숨조차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씨근덕거렸다.
크레이거 공작의 뒷모습엔 깊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야 에렌스트 경은 안심했다. 공작이 제 아들을 포기한 게 아니구나 싶어서.
하여 공작의 근처로 걸어간 에렌스트 경은 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한 번만 더 저를 신임해 주시면…… 다시는 소공작을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공작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백 마디 말보다도 명확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온을 반드시 지키라는 명령이었으며, 자신 또한 그리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무력함을 절감한 그날부터 에렌스트 경은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틈만 나면 연습을 하고, 가문의 기사들과 겨루며 제 검을 다듬었다. 그리고 오로지 이온을 중심으로, 그를 위해서 움직였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기사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한데 그런 그에게 크레이거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그 예전의 ‘약속’이 유효한지.
“어서 대답해 보거라. 네가 내 도움 없이 그 맹세를 여전히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해.”
“각하…….”
에렌스트 경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등골에 소름이 돋아 버리고 말았다.
잠시라도 아들을 향한 크레이거 공작의 믿음과 사랑을 의심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 * *
이온은 대문이 보이는 2층 복도의 창문가에 기대어 서서 저택 밖에 도열해 있는 노아기사단의 기사들을 건너다보았다.
멀리서도 커다란 덩치가 유난히 눈에 띄는 아스타틴을 위시한 그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면서도 저택 앞에서 꿋꿋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창문틀에 벌써부터 흰눈이 쌓이기 시작한 가운데, 벽에서 스며들어 오는 웃풍마저 꽤 싸늘하게 느껴졌다. 안에서도 이러니 아마 저들이 서 있는 밖은 더 추울 것이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저택으로 쳐들어온 그들에게 베풀 호의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벌써 3시간째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이온은 지켜만 볼 뿐, 그들을 맞이하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문득 이온의 뒤에 서서 함께 밖을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추위에 움츠러든 어깨에 제 겉옷을 걸쳐 주었다.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에 고개를 살짝 돌린 이온이 먼저 말꼬를 텄다.
“최근에 버니언이 더 미쳐 날뛰고 있는 것 같던데, 혹시 네가 자극했어?”
현재 아스타틴 딜런을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황궁의 주인인 버니언뿐이다. 황태후 역시 황실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보호 대상이긴 하지만, 그들이 명을 받는 건 오로지 황제에게서만이었다.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닐 그들이 공작 저 앞에서 저렇게 죽치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버니언에게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얼마 전 버니언이 노아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불러 뒤집어 놨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뒤였다.
그 원인이 혹시 너냐는 질문에 카밀루스가 순순히 시인했다.
“뭐, 가볍게. 그 자식이 널 건드리는 꼴을 두 눈 뜨고 못 보겠어서, 조금만.”
“뭘 어떻게 했길래.”
“그냥 잠깐, 이렇게 숨이 막히게 해 준 것에 불과해.”
‘이렇게’라고 말할 때, 이온의 뒤에서 카밀루스의 커다란 손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이온의 목에 손을 얹으며 조르는 시늉을 했다.
이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고는 헛웃음을 쳤다.
“황궁에서 말이지? 너도 버니언 못지않게 돌아 버렸네.”
“맞지. 이온, 너한테 돈 거.”
두 사람은 같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카밀루스는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며 적정 시간을 재고 있는 이온의 모습에 중얼거렸다.
“딜런을 안에 들일 모양이네.”
“무슨 사안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밖에 세워 뒀다가 빈손으로 돌아가 버리면 다음엔 버니언이 직접 쳐들어올지도 모르잖아. 그건 싫어.”
“그럼 독대하지 말고, 에렌스트 경이랑 꼭 같이 있어.”
카밀루스의 대꾸를 듣고서 이온은 무심코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다행히 말을 밖에 꺼내기 전에 위화감을 알아챈 그가 몸을 틀어 카밀루스를 마주 봤다.
“……어디 가야 해?”
약간 당혹한 표정이 된 이온을 발견하고는 카밀루스가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라는 듯,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는 것은 덤이었다.
“아까 네가 한 말 중에 걸리는 게 있어서. 잠깐만 떨어져 있어도 될까? 같이 더 있어 주고 싶은데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거 같다.”
아까 자신이 한 말이라니. 그것도 시간이 부족한 일…….
이온은 오늘 그와 나눈 대화를 머릿속에서 뒤지다가 금세 답을 찾았다.
“설마 솔친 후작 저에 다시 가려고?”
“그래. 네가 말했던 그 하녀장, 오늘 저녁이 되면 죽을 수도 있어.”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해?”
카밀루스의 말마따나 이온도 에린이라는 이름의 그녀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의 설계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적어도 그가 이온을 감시하는 중이란 점은 확실했다.
게다가 그는 카밀루스의 어머니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저주와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비교적 빨리 알아냈으니 다행인가.’
퇴직한 버틀러의 죽음 이후로 제 나름대로 사람과의 접촉은 최소화한 것이기는 했다.
다만 서로의 시야가 다름으로써 생기는 격차가 있으니, 그 틈에서 얻어 낼 것을 더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행동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허술한 틈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은 현재 체스판의 주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