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0)화 (140/317)

“네가 쳐 놓은 연막에 잘 가려졌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 

카밀루스의 설명에 이온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동조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 농후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온이 표정을 가라앉히자 카밀루스는 그러지 말라는 양, 추운지 약간 붉은기가 도는 이온의 뺨을 감싸 주며 속삭였다.

“죽을 걸 살리게 된다면 우리한테 기회가 올 거야. 물론 그녀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고. 이해하지?”

“응……. 그럼 페드로도 같이 가?”

이온의 말은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혼자 가지 말라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실상 카밀루스에게 호위는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자꾸 단독으로 돌아다니는 건 싫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만에 하나, 라는 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이온의 불안감을 이해한다는 듯, 카밀루스는 순순히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게.”

대답이 돌아오자 이온은 스스로 카밀루스의 겉옷을 벗었다. 무거운 그 옷을 어깨에 둘러 주자, 카밀루스가 알아서 팔을 꿰어입었다.

그리고 단추를 잠근 것은 다시 이온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면서 흐트러진 장식들을 정리하며 옷의 단추들을 홈에 하나둘씩 끼웠다.

“잘 갔다 오라는 말은 안 해. 어떻게든 돌아올 거 아니까. 대신 다른 걸 약속해. 어디 가서든 고개 숙이지 마,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알겠어?”

이온이 말하는 동안 제 옷을 갈무리해 주는 작고 귀여운 손과 아까보다 좀 더 붉어진 그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던 카밀루스는 잠시 넋이 빠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온이 정신 차리라는 듯 가슴을 툭 치며 초록빛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대답 안 할 거야?”

“그거야말로 대답할 필요가 있어?”

뒤늦게 반문한 카밀루스가 마지막 단추까지 다 잠가 허공에 멈춘 이온의 손을 끌어갔다. 순간 허리를 굽힌 그의 선명한 파란 눈동자가 이온을 지그시 응시했다.

잠시 뒤 그의 붉은 입술이 작은 손등에 내려앉았다.

“난 네가 길바닥의 걸인이 되라고 하면 걸인이 될 거고, 네가 나더러 왕이 되라고 하면 왕이 될 거야.”

“…….”

“넌 단지 원하기만 하면 돼.”

나를,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그렇게 밀어를 속삭인 카밀루스가 한 걸음 물러났다.

“다녀올게.”

아쉬운 듯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도 꼭 쥐었던 이온의 손을 쉽게 놓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을 얽어 오던 카밀루스였다. 그러나 손가락이 완전히 떨어지자 더는 미련 보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이온은 회랑의 기둥을 돌아 사라져 버리는 그를 눈으로 따라갔다. 훤칠하게 큰 키와 너른 어깨,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이 유난히 뇌리에 박혔다.

자신에겐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한없이 멋있기만 한 모습이었다.

‘믿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를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밀루스의 그림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아쉬움 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온이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전담 버틀러를 손짓해 불러왔다. 상대가 다가오는 동안 창문 밖을 다시 살피던 그가 이내 명했다.

“집사장에게 전해. 딜런 경을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잠시 뒤 대공이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눈 쌓인 저택의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듯 노아기사단이 대문 안으로 들자, 이온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아스타틴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 * *

아스타틴 딜런을 응접실에 대기하게 해 놓고 난 뒤에도 이온은 한참을 시간을 끌었다. 마치 그의 시계는 1시간이 1분인 것처럼.

단적으로 말하면 에밀리의 점심 식사가 끝나고, 공작가의 주방에서 다시 수프 끓이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까지 이온은 아스타틴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쯤 되면 아스타틴도 그만 돌아가겠다고 할 만하건만, 집 안에 들어온 이후 재촉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 때문에 공작 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과 같았으나, 크레이거 공작이나 가문의 시종들마저 중재의 역할에 나서지 않았다.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양.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끈 이온이 아스타틴의 앞에 나타난 것은, 탁자 위의 촛대에 불이 붙었을 때였다.

이온은 어디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외출하는 사람처럼 포마드로 머리를 넘기고, 드레스 셔츠 위에는 크라바트를 곱게 묶고, 발에는 주름 하나 없는 구두를 신은 채였다. 그리고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보이도록 얼굴엔 살짝 화장기마저 배어났다.

그의 홀대에 거의 인내심이 끊기기 직전이었던 아스타틴은 기침 소리와 함께 제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 이온을 일어나 맞이했다.

귀족가의 예의에 따라 소가주인 이온이 먼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인사해 왔다.

“실례했습니다, 딜런 부단장.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데에 흉한 꼴로 나설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아스타틴은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히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소공작. 오늘의 방문은 예고된 것이 아니었으니 이해합니다.”

이온은 ‘정말 그래?’ 하고 묻는 듯이 눈썹을 까딱하더니 문 근처의 하인에게 눈짓을 했다.

곧 문이 닫히고, 아스타틴과 이온은 카우치에 몸을 내려 마주 앉았다. 그러자 의외의 텍스트가 지나갔다.

[상태 이상: 호의]

[아스타틴 딜런이 플레이어에게 옅은 호의를 느낍니다.]

“…….”

그 메시지를 보고 이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때는 아주 똑똑한 것 같은 시스템이, 어떤 때는 도무지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멍청했다.

지금이 바로 멍청한 타이밍이었다.

지난번에 잠시 마주쳤을 때 ‘옅은 적의’조차 의외라고 생각했었는데, 심지어 ‘옅은 호의’라니. 아스타틴 딜런이 어떻게 자신을 ‘호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어 이온은 몇 번이나 창을 다시 확인했지만 텍스트는 여전했다.

결국 이온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아스타틴을 마주 보았다.

아스타틴의 뒤에는 대여섯 명의 기사가, 그리고 이온의 뒤에는 에렌스트 경을 비롯한 시종과 기사들이 서 있었다.

어린 시종이 둘의 찻잔을 채우고 물러났으나 이온은 차에는 입을 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노아기사단에서 이런 일개 가문에 찾아오시다니 어쩐 일입니까, 딜런 경. 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누군가와 오래 얘기할 처지는 못 되어서요.”

말끝에 이온이 기침 소리를 달았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크게 들이켜고 있으니, 아스타틴은 이온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최근엔 비렌시움 대공께서 공작가에 기거하시며 살펴 소공작의 몸이 좋아지셨다고 들었는데 풍문이었던 모양이군요.”

8년 전에는 이온의 앞에서 다소 도발적인 모습까지 보였던 아스타틴 딜런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그에게 모종의 변화를 일으켰던지, 지금 이온을 대하는 목소리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런 그를 보면서 속이 뒤틀리고 있는 쪽은 이온이었다. 하여 이전의 일을 은근히 상기시키며 일침을 놓았다.

“물론 그렇지만, 한번 크게 마모된 것은 본래 복구하기 어려운 것 아니겠어요?”

“…….”

역시나 아스타틴의 입이 꾹 닫히는 것을 보며, 이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여기까진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군요.”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온의 태도에 약간 한숨을 지은 아스타틴이 불쑥 요구해 왔다.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으니 혹 주변을 물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겠습니다. 제게 누군가가 당부했거든요. 딜런 경과 혼자 만나지 말라며.”

“그 누군가는 아마도 대공이겠군요.”

불곰같이 생겨 놓고서는 아스타틴은 의외로 눈치가 있었다. 이온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아스타틴은 한발 물러났다.

“그럼 제 주변은 전부 물릴 테니 소공작께서는 알렉사이 에렌스트 경, 저자만 남기시는 건 어떠하십니까? 제 무기는 이미 저택에 들어섰을 때 내려놓았다는 것은 아실 테고요.”

그 말에 이온의 옆에서 에렌스트 경이 들고 있는 칼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온은 곁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응접실에 세 사람만 남았을 때였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에렌스트 경이 칼을 빼냈다.

채앵!

금속성의 소리가 날카롭게 그들 사이를 가른 순간, 에렌스트 경의 칼끝은 아스타틴에게 겨누어졌다.

하지만 이온은 말리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꼈다.

그렇게 주인의 무언의 허락을 받은 기사는, 이내 아스타틴의 뒤로 걸어가 긴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댔다.

까딱 잘못 실수만 해도 아스타틴의 목을 그대로 그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응접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