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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1)화 (141/317)

돌연 몰려온 적막 속에서 이온은 턱을 살짝 들며 천천히 양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여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제 앞의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뜨거운 물을 넘겨 목을 가라앉힌 이온은 방금 전과 달리 존대를 떼고 대꾸했다.

“8년이 걸렸네. 내 손안에 당신의 목이 들어오기까지.”

목소리와 달리 내용이 섬뜩한 것에 아스타틴이 이를 지그시 물었다. 힘이 들어간 턱 근육이 얼굴 위로 도드라지자 에렌스트 경은 제 검을 그의 목에 더욱 바짝 댔고, 아스타틴은 저절로 얼굴을 들어 올리게 되었다.

그에 아스타틴은 미간을 구겼으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곧 평상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물었다.

“소공작, 저를 죽이실 수는 있으십니까?”

질문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이온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스타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어렸을 적,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위압적으로 보였던 그때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간 것이었다.

이온은 눈을 접어 웃으며 당시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우리 크레이거가의 위세가 아무리 드높다 하나 노아기사단의 부단장에게 그런 짓을 하기엔 부담이 따르긴 하지. 아무리 노아기사단을 향한 황실의 신뢰가 예전 같지 못하다고 해도 잘못 건드리면 자칫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어?”

“…….”

물론 과거 그 말을 했던 당사자 역시 표정이 딱 굳었다.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이온은 태연히 제 배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 뒤 꼼지락거리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이젠 경이 황제의 눈 밖에 난 듯하니, 뒤처리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진 않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오브라이언을 이끌어 갈 고위 귀족으로서의 품위는 지켜야겠지. 원한 때문에 이성을 잃고 모든 걸 망쳐서야 되겠어?”

건성인 태도에, 모욕을 주는 듯한 말.

일부러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면 변동이 있을까 싶어, 이온이 아스타틴의 정보를 불러와 확인했지만 여전히 그는 ‘옅은 호의’ 상태였다.

‘어째서…….’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1%입니다.]

게다가 사망 확률도 며칠째 봐 왔던 수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도 아스타틴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마치 저택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온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쯤은 예상했다는 듯이.

대신 그는 다른 부분을 지적해 왔다.

“역시 소공작께선 이 저택에 앉아서 황실의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가 봅니다.”

완벽하게 떠보는 말이었다.

이온은 그의 말속에 있는 함의를 알아채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하기를 원하지?”

이온이 날카롭게 반문했을 때였다. 아스타틴이 에렌스트 경을 힐끗하더니 건틀릿을 낀 제 손등으로 칼날을 조금 밀어냈다. 그 뒤 제 옷의 목깃의 단추를 푼 그가 품에 손을 넣었다.

에렌스트 경이 그의 손길을 긴장한 표정으로 좇았으나, 다행히 아스타틴의 투박한 손에서 끌려 나온 것은 여타의 무기 같은 것이 아닌 작은 약병이었다.

탁.

테이블 위에 딱딱한 것이 놓이는 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에 울렸다. 막 내려놓은 병에선 붉은 액체가 작게 찰랑이고 있었다.

“저는 단지 거짓 없는 사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소공작.”

붉은 액체.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어느 비 내리는 저녁에 이온 역시 손에 넣었던 약물이었으니까.

순간 에렌스트 경의 눈이 이온에게로 향했다. 약간 당혹감이 배어 있는 눈길이었다. 마치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것 같은.

그 앞의 아스타틴 역시 제 질문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게 크레이거가의 권세 덕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이용한 결과인지.”

하지만 이온은 한 점 동요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아스타틴의 의심을 부추길 말을 서슴없이 꺼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딜런 부단장의 정신적 지주인 칼 나르바에스 단장이 새 황제에게 목이 졸린 일 같은 걸 알게 된 사유가 무엇이냐…… 이 말이겠지?”

“…….”

단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방에 들어온 뒤 아스타틴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온도 알았다, 조금 전 제가 뱉은 그 말이 트리거라는 사실을.

다만 핏줄에 철이 흐를 것처럼 생긴 저 남자도 동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이온은 내심 놀랐다.

그 때문도 있었다.

[아스타틴 딜런이 플레이어에게 옅은 호의를 느낍니다.]

저 ‘옅은 호의’의 원인을 완벽히 파악하기 전에 도박수를 둔 것은.

“전자라면 공작 가문이 황실에 첩자를 심어 두었단 의미이니 우리 크레이거가가 곤란해질 거고, 후자라면 나에 대한 당신의 평가가 수정되겠지.”

문장이 끝났을 때, 이온은 아스타틴이 그랬던 것처럼 제 안주머니를 뒤졌다. 이온이 손에 쥔 것을 탁자에 내려놓기 전에 에렌스트 경은 이미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온은 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수정해야 할 거야.”

단호한 말과 함께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이온의 앞에도 약병이 놓였다. 그 안에도 아스타틴이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순간 아스타틴과 이온의 눈길이 마주쳤다. 더는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으나, 둘 모두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잠시 뒤 이온이 에렌스트 경에게 손짓했다.

“칼은 그만 치워.”

“……도련님?”

여태껏 내려진 명령에 그다지 토 단 적 없던 에렌스트 경이 당신의 판단이 맞느냐는 의미로 이온을 불렀다.

그러나 이온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제 판단을 바꾸지도 않았다.

이온이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에렌스트 경은 결국 칼을 거두어 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유사시에 대비해 계속 아스타틴의 옆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일단락한 이온이 몸을 뒤로 빼며 아스타틴에게 경고와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간 당신이 상대했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뭔지 알겠어?”

아스타틴은 이온에게 더 말하라는 듯이 눈을 마주친 채 묵묵히 기다렸다.

“나는 내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않아. 상황을 낙관하지도 않아.”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으레 방심하고는 한다. 자신의 아래 있는 사람들은 변수를 창출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이 모든 상황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하여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과신하여 상황을 악화할 때도 있었다.

이온은 아니었다. 언제든 통제 불능의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가 지금 제 품에서 나온 약병이었다.

이온은 아스타틴이 공작가의 대문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아니 그가 황실의 명으로 제 뒤를 캐러 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면, 그건 비밀이 될 수 없다.

비밀이 아니라면 언젠가 들킨다. ‘언젠가’라는 말은 차라리 ‘언제든’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좋을 터이다.

“그래서 난 나의 허술함과 약함을 이용할 줄 알지. 딜런 경, 지금 그대가 나를 찾아온 것처럼 말이야.”

“그건, 마치 절 기다리셨다는 말씀같이 들리는군요.”

“아니었을까?”

“…….”

“경이 이 저택을 찾아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실은 너무 길어져서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이온의 반문에 아스타틴은 말문이 막혀 버린 듯했다. 이온은 그것이 제가 그의 정곡을 찌른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대화 주도권을 갖게 되는 건 자신이다.

“서로 적당히 패를 깠으니, 이젠 어떤 거래를 할지 얘길 나눌 순서가 온 것 같은데.”

[플레이어가 아스타틴 딜런의 회유를 시작합니다.]

[본 진행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매번 하던 협박을 했지만, 이온은 그의 앞에 자신의 패를 뒤집은 것에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기실 그가 아스타틴의 앞에서 경계를 푼 근거는 하나가 더 있었다.

아스타틴 딜런

어느 날 우연히 카밀루스와 아스타틴 사이에 오간 편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점은 카밀루스와 아스타틴이 접촉했다는 소식이 있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 내용을 미처 보지는 못해 계속 궁금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아군. 배신의 가능성을 상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만약 그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스타틴이 자신에게 해가 될 사람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오늘의 만남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 놨을 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여유가 충분히 있을 만한 시간이 지났으니까.

한데 카밀루스가 가만히 있는다는 건 한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스타틴은 위험 인물이 아니다.’

그건 이온 개인의 호오(好惡)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아스타틴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넘었던 것과도 관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온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아스타틴 딜런 경, 그대의 드높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어디 한번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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