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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에 갑자기 들이닥쳤어도 카밀루스의 첫 번째 방문은 반겼던 솔친 후작이, 두 번째 방문에는 난처해하는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끌고 온 기사의 수가 이전보다 월등히 많았다. 집사장의 보고를 받고 급히 마중을 나온 솔친 후작은 카밀루스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굳어서는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전 접대에서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는지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전하, 혹 어떤 일로 재방문을 하셨는지.”
다행히 카밀루스는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후작을 내려다보며 약간의 미소까지 지었다.
“실례하게 됐습니다, 후작. 공작 저로 돌아가고 나서 보니 내가 물건을 잊고 갔지 않겠습니까.”
“물건이요…….”
고작 물건 하나 찾으러 온 길인데, 데려온 기사가 서른 명은 더 되었다. 아주 과했다는 소리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후작이 머뭇거리고 있자 카밀루스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수색을 하자는 것은 아니니 물건을 찾는 데는 나와 내 부관만 들어가도 될 것 같아.”
그 소리에 겨우 안심한 후작이 카밀루스와 그 부관인 페드로를 저택 안으로 들였다.
기실 기사들이 저택의 정원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는 진입조차 힘들다는 험지인 아이오딘에서 몬스터들을 때려잡았다는 기사들 아닌가. 그래도 저택 안에 흙발로 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바닥을 닦아 놓은 홀로 카밀루스가 들어서자 후작은 전날 그가 머물렀던 방으로 안내하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혹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대공께서 머문 방은 이미 하인들이 치웠습니다만, 물건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었던 터라…….”
말끝을 흐리는 후작의 말투가 극히 조심스러웠다. 하인이 발견해 놓고 가치 높은 물건임을 알아보고 제가 챙겼을지도 모를 일이긴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미 팔아 버렸으면 아주 최악이고 말이다.
후작은 제발 그런 경우가 아니길 빌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계단을 오르며 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시계입니다. 내게 유일하게 남은 어머니의 유품이라, 무척 소중한 물건이지요.”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에 페드로가 뭐냐는 듯이 순간 카밀루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카밀루스만 바라보느라 페드로의 의문 어린 눈빛을 발견하지 못한 솔친 후작은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짐작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의 어머니 말씀이십니까……?”
후작의 반문에 카밀루스가 그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반응했다.
“그렇습니다, 내 어머니. 다른 맥락으로 들릴 수가 있는지?”
말끝이 꽤 날카로웠다. 그 탓에 카밀루스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한 후작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대답을 마친 후작은 카밀루스를 흘끗했다.
대공의 어미라니.
선황의 사생아라고 알려진 그이지만 그 어머니의 존재는 어째선지 완전히 베일 가려져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마녀의 아들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으나, 어미가 누군지 전혀 짐작도 안 되다 보니 낭설만 무성하다.
‘그런데 본인은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 어미가 바로 로제니아 클로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솔친 후작은 호기심이 동했는지 돌연 태도를 바꿔 제가 손수 방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린 문 사이로 카밀루스가 들어가 가만히 서 있으니 솔친 후작은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부관이면서 가만히 서서 뭐 하냐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으나, 페드로는 후작을 향해 넌지시 눈웃음을 지었다.
“후작, 대공께서 바닥에 기면서 침대 밑을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는 본인 역시 딱히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후작은 좀 피곤해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 하인들을 불러 모았다.
급하게 차출되어 온 하인 몇몇이 방 안을 뒤지기 시작하자, 카밀루스는 방 밖으로 나와 후작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물건을 잠깐 누군가한테 맡긴 것도 같은데, 그때 딸려 갔을지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이 시점부터 후작은 카밀루스를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고, 방을 뒤지고 있는 와중에 이번엔 누구한테 맡겼다며 오락가락한 소리를 하니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대놓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할 수 없으니 후작은 일단 물었다.
“물건을 맡기신 하인이 여자였습니까, 남자였습니까?”
“여자였습니다. 이름이…….”
카밀루스가 생각을 더듬는 양 말끝을 흐리자 후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도 알고 계신다고요?”
남의 집 하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의문이 담긴 물음이었다. 카밀루스는 이번에도 역시나 태연히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후작이 이름을 부르던 걸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름이…… 에린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정황이 몹시 의심스러웠지만 이름을 들어 낸 후작은 일단 카밀루스가 원하는 대로 근처의 하인에게 명했다.
“거기 너, 하녀장을 불러오거라.”
“예, 각하!”
“그녀가 하녀장이었습니까?”
카밀루스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이자, 후작은 카밀루스를 슬쩍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묵고 가신 날 소공작을 전담하라고 말해 두었습니다만…… 전하와 접촉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저녁에 잠깐 소공작의 방에 들렀었는데 그때 마주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후작은 문득 오늘 아침 카밀루스에 대해 받은 보고를 떠올렸다.
한 하인이 대공이 머무는 방에서 물을 흘려 잔뜩 젖은 이불이 나왔다는 말을 전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대체 그럴 일이 뭐가 있나 싶었는데, 저녁 늦게 옆에 있는 손님 방으로 갈 일은 무엇이며 그곳에서 마주친 하녀에게 물건을 맡길 일은 또 왜 생기는가 싶었다.
어제 이온 크레이거가 차에 홍차 잎이 섞인 게 아니냐고 난리 친 것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둘이 무슨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후작의 고민이 깊어졌을 때, 아까 전 명령을 내린 하인이 아니라 다른 하녀가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각하, 송구합니다. 하녀장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갑자기 에린이 왜 자리를 비웠다는 거냐? 뭘 사러 가기라도 한 건가?”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따로 말은 없었던지라…….”
“허…….”
후작은 하녀장이 무척 성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난처해하는 얼굴로 후작이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아직 별것을 찾지 못한 방 안의 하인들을 돌아본 카밀루스가 어쩔 수 없어 하는 척하며 물었다.
“후작, 하녀장이 머무는 방이 따로 있겠지요?”
“전하, 아무리 그래도 그곳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후작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하인의 방이다. 저택의 주인인 후작조차 보통은 하인들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부르면 되니, 굳이 갈 이유가 없기도 하고. 하물며 손님으로 온 대공이 걸음할 곳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이런 언쟁조차 피곤하다는 듯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유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게는 워낙 소중한 물건이니 안내해 줬으면 좋겠는데.”
“…….”
후작은 순간, 사생아라서 그런 것 따위 신경 안 쓰는 건가 하는 불순한 생각을 했으나 겉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모르겠으나 어머니 유품이라고 하니 강하게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후작은 일단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나마 에린은 하녀장이라 그리 높은 층에 머물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전하, 하녀장의 방은 4층에 있습니다. 네가 대공께 안내해 드려라.”
하녀장 대신 왔다는 하녀가 후작의 명에 따라 카밀루스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제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계단을 오르며,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 무언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에게 감이라는 게 있다. 에린에게 변고가 생겼을 가능성을 이미 염두에 두고 온 터라 그녀의 부재가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카밀루스가 바로 옆의 페드로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 나만 들어가야겠어. 따라 들어오지 마.”
“그렇게 위험해 보이시는 겁니까?”
“느낌이 좋지는 않군.”
말을 마쳤을 때 하녀가 4층의 복도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공 전하, 저희 하녀장의 방은 여기입니다.”
짧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안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에 카밀루스가 페드로를 살짝 곁눈질하여 한 걸음 물러나게 한 뒤 앞으로 나섰다.
“없는 건가?”
“그런 듯한데…….”
“실례하지.”
카밀루스가 문고리를 덥석 잡자 하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제대로 만류하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문이 확 열렸고, 안쪽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 카밀루스의 얼굴이 굳었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의 존재. 그것이 무언지 알아차린 카밀루스가 재빨리 방어막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