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을 펼치면서 푸른빛이 화악 퍼졌다. 이상을 감지한 페드로가 뒤에서 팔을 붙잡았다.
“대공, 들어가지 마세요!”
안에서 퍼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마기였다. 북부에서 큰 몬스터가 죽을 때 간혹 실처럼 가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곤 했는데 이건 그보다 더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침착하라는 듯 제 팔을 붙든 페드로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기다리고 있어.”
갑작스러운 소란을 감지했는지 아래쪽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카밀루스는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제가 쳐 놓은 막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에린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안에 떠돌던 짙은 마기가 살로 스며들려고 했다. 카밀루스는 커튼이 드리워져 조금 어두운 공간을 걸어가며, 이전에 저주로 죽은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잠들면 죽는 저주를 걸어 놨었는데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경고인가.’
평범한 사람은 몬스터화할 만큼의 기운이었다. 굳이 마법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마시게 할 정도의 양이 아니란 소리다.
마치 자신에게 이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라고 과시하는 듯한 행동.
카밀루스는 상대가 자신이 쫓아오길 바라고 있음을 깨닫고는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지?’
그런 질문을 떠올렸을 때, 안쪽의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에린이 시야에 들어왔다.
큭, 크윽, 하고 작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에 카밀루스가 서둘러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얼굴이 새파래진 에린의 몸을 흔들며 물었다.
“에린, 에린? 내 말 들리나?”
하지만 대답 없이 계속 이상한 소리만 내는 것에 카밀루스는 에린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몸을 살폈다.
다행히 옷을 벗기기 전에 목 부근에서 바늘로 찌른 것 같은 작은 상처가 보였다. 이번 것은 저주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 마기를 몸에 잠식시킨 듯했다.
다행히 마기가 날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카밀루스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마나를 에린의 몸에 밀어 넣었다.
그렇지만 끄으윽, 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몬스터화하려는 징후인 것 같았다.
‘늦었나……?’
카밀루스는 주변을 떠도는 마기가 자꾸만 제 몸을 넘보려는 것에 평소보다 집중해서 마나 운용을 해 나갔다.
가슴에 일렁이는 기운은 밀어 내리고, 단전의 것은 밀어 올려 몸 안의 마나 순환을 좀 더 활성화했다. 그러면서도 에린의 몸을 침식한 마기를 밀어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본래 마기는 두 모금 정도의 아주 적은 양으로도 사람의 신체를 변형시킨다. 따라서 지금 주변을 떠도는 마기의 양은 분명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상급 몬스터인 오우거 메이지 중 뛰어나게 강력한 녀석들도 이 정도의 마기는 방출하지 못한다.
“하…….”
카밀루스가 깊은 한숨을 터뜨렸을 때였다. 다행히 잠식된 지 얼마 안 돼 신체와 결합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는지, 곧 그의 손안에 에린의 몸에서 뽑아낸 마기가 꽃 모양의 검은 연기로 모였다.
제 주변을 휘도는 마기 역시 한데 모은 카밀루스는 침대 옆 협탁을 뒤져 발견한 작은 병에 마기를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에린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숨소리가 고른지 확인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순간 창문 밖에 날아든 검은 그림자가 저를 보고 있는 것을 느낀 카밀루스가 몸을 확 일으켰다.
쾅!
곧장 창문이 열렸다. 밖으로 몸을 날린 그가 저택의 후원에 착지하자 그의 위를 한 바퀴 돈 그림자가 팔 위에 내려앉았다.
그가 부리는 검독수리였다. 입에 작은 종달새 같은 게 물려 있는 모습을 보고 카밀루스가 그것을 빼 주자 녀석이 제 털을 고르며 말했다.
「얼마 안 됐어.」
카밀루스는 제 손 위의 기절한 새를 내려다봤다가 툭 물었다.
“누군지 봤나?”
「으으응, 그게…… 말이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시간 없어, 어서 말해.”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거라고. 일단 사람은 아니었어.」
“그럼 어디로 갔는지는 알겠지? 안내해.”
「추워 죽겠는데, 진짜!」
투덜거리던 독수리는 카밀루스의 냉정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파르르 날개를 떨다가 먼저 날아갔다.
후작가의 뒤쪽 담장을 지나는 녀석을 뒤쫓기 위해 카밀루스가 지면을 찼다. 마법으로 떠오른 그의 몸이 가볍게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가가 드문드문 있는 곳의 하늘을 날며 독수리 녀석이 제가 봤던 것이 있는지 살피듯 하얀 머리털을 기웃기웃했다. 그 모습을 따라가던 카밀루스는, 문득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등골을 스치는 오싹한 기운에 카밀루스가 손에서 얼음 송곳을 생성해 내더니 곧장 한 방향으로 날렸다.
퍼거거거거걱!
파스스스,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예상대로 둔탁한 무언가가 공격에 꿰뚫리는 소리가 거칠게 일었다.
잠시 뒤 근처의 나무 위에 안착한 카밀루스가 그곳을 내려다보는데, 앞서가던 독수리가 도로 회전해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이게 뭐야?」
금색 눈을 동그랗게 뜬 독수리의 물음에 카밀루스는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대신 제 공격을 맞은 물체로부터 검은 꽃 모양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땅으로 내려갔다.
끼이이익, 끼익.
제 앞에 쓰러진 것은 그렇게 기이한 소리를 내며 부러진 뼈를 재구성하고는 비틀비틀 움직이는 중이었다. 살덩이가 있는 생명체에게서는 날 수 없는 소리가 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눈앞에 있는 건 그냥 뼈다귀였다.
다만 모양을 갖추고 움직이는 뼈다귀라는 게 좀 달랐다.
카밀루스는 제 손 크기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아마 살점이 붙어 있으면 도마뱀 같은 것이지 않을까 싶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직도 제가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인지, 제 손바닥 위로 기어오르는 그것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뼈가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감각이 좀 소름 끼쳤다.
카밀루스는 녀석의 늑골 안쪽에 뭉쳐 있는 검은 기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사체야.”
그러면서 그가 녀석의 메마른 발뼈를 손끝으로 만졌다.
이런 모습의 몬스터라면, 추측하기로는 바실리스크 같은 것일 터였다. 어려서 죽었는지 무척 작았지만 말이다.
카밀루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독수리가 몸을 푸르르 떨며 물었다.
「이런 녀석이 왜 살아서 돌아다녀?」
“……살아 있는 건 아니야, 이미 죽었어. 어떻게 붙잡아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영핵은 남아 있는 상태인 거고.”
카밀루스는 제 손 위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는 녀석의 날카로운 꼬리를 보면서 에린의 목에 났던 상처를 떠올렸다.
바실리스크는 밤에 주로 활동하는 뱀 모양의 몬스터로, 독이 있는 녀석이다. 에린의 상태는 후작가로 다시 돌아가 확인해야겠지만 마기의 잠식과 별개로 그녀가 중독 증상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장난을 친 녀석이 이걸 사역한 게 맞는다면 말이다.
「미친…… 이런 걸 조종하는 악취미를 가진 녀석이 있는 거야?」
“나도 너 같은 걸 데리고 다니니까.”
뼈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 집중하고 있던 카밀루스가 좀 닥치라는 의미로 그렇게 대꾸했으나 독수리는 겁이라도 먹었는지 계속 주절거렸다.
「아니, 내가 뭐 어때서! 이 몸으로 말하자면 난 내 마법사의 명령을 성실히 따르는 훌륭한 사역조로서 너에게 무려 10년이나 충성하고 계신, 새들의 왕이었던 윌리엄 무어 드 카슨 17세이신데?」
“…….”
「야, 카밀루스, 내 말 듣고는 있어?」
방금 자신이 새들의 왕이라고 말하며 잘난 척하던 녀석은 뼈다귀가 움직이는 모습을 황금빛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머리에 몇 가닥 있는 흰 털을 바짝 세우고는 카밀루스의 어깨 안쪽으로 발을 종종거리며 옮겼다.
역시나 무서운 게 맞았는지 카밀루스의 얼굴에 몸을 딱 붙인 녀석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촉촉한 목소리를 냈다. 울먹임이 섞였다는 뜻이다.
「너 말이야, 한때는 왕이었던 날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니야……? 그 말랑거리는 드래곤 녀석이 내 마나를 다 빼앗아 가서 그렇지이, 나도 원래라면 너한테 이렇게 홀대당할 분이 아니라니까? 나도 원래는 대단한 마나를 가졌었는데에…… 흑, 저거 대체 뭐야?」
제 충실한 사역조가 공포에 떨며 울부짖든 말든 카밀루스는 주위의 풀이 말라비틀어진 것을 매만져 보다가, 일전에 페드로에게서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마탑 내에는 마리엘이 네크로맨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죽어서 앙상한 뼈가 되어서도 움직이는 바실리스크…….
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해서 이딴 걸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엘이 네크로맨서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존재 역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카밀루스는 제 몸 안에서 마기와 마나가 싸우고 있다며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눈을 보여 주었던 마리엘을 떠올렸다.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마기는, 마나는 대체 어느 정도의 양이었을까.
이전에 보았던 검은 손과 일부가 검게 물든 얼굴 등의 면면을 되새기던 카밀루스가 표정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파삭!
그의 손에서 몬스터의 영핵이 깨져 사라지며, 바실리스크의 뼛조각 역시 움직임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