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4)화 (144/317)

* * * 

크르르르르륵…….

어디선가 자신을 그만 풀어 달라는 듯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재니스는 제 방에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쉬고 있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이나 완전히 지쳐 쓰러져 버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마리엘은 그 우스운 모습을 맞은편에서 바라보며 작은 병에 있는 검붉은 액체를 다이아몬드 모양 틀에 붓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예쁜 형태로 굳히려고 하는데 쉽지 않았다. 자꾸만 둥글게 뭉치려는 액체의 특성 때문이었다.

하여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굳히는 건 슬슬 포기할까 싶었을 때였다.

피잉.

문득 제 안의 실 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느낀 그녀가 눈썹을 까딱였다.

제가 보낸 사역마인 바실리스크의 영핵이 깨졌다.

‘들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카밀루스 클로델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더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을까.

마리엘은 떠올리다가 맥박이 사납게 뛰기 시작함을 느꼈다.

카밀루스 클로델은 8년 만에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성장해서 돌아왔다. 특히나 오자마자 황성 결계를 깨부숴 버릴 정도일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탑에서 나온 때만 해도 그 조그마했던 녀석은 천재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품고 있었을 뿐이다. 넘쳐흐르는 마나가 무조건 훌륭한 마법 능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얼마큼 강한지 가늠 못 할 사람이 되어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흥분된 마음 때문인지 마기에 침식된 검은 손등의 핏줄이 튀어 올랐다. 금세 손가락이 울퉁불퉁해지고 손톱 역시 길어지려 하는 것을 본 마리엘이 중얼거렸다.

“자꾸 말썽부리지 말라니까…….”

그 투덜거림과 함께 마나 운용 수준을 끌어 올리자 다행히 손의 변형은 도로 가라앉았지만 이미 예민해진 신경은 아까부터 시끄럽게 굴던 방 안쪽의 존재를 무척 거슬려 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륵.

마리엘의 시선이 재니스가 누워 있는 소파 너머의 책장을 향했다. 그녀가 손을 까딱하자 마법서들을 잔뜩 꽂아 놓은 무거운 책장이 조금씩 옆으로 물러나 안쪽의 모습을 드러냈다.

한 겹 가로막았을 때보다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좀 더 크게 들려왔다. 그 타락한 자의 소리를 들으며 마리엘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조금 전까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굳히려고 애쓰던 검붉은색의 액체를 어느새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한 손에 쥐자 마리엘의 얼굴을 반쯤 점령했던 마기가 순간적으로 확 거두어지며 그녀의 흰 얼굴이 돌아왔다.

잠시간의 쾌감이겠지만 마리엘은 제 얼굴에 깨끗한 피가 도는 생소한 감각에 양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아까부터 울부짖음이 울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발을 들이자 책장이 등 뒤에서 도로 닫혔고, 마법 등으로 옅게 밝혀 놓은 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몬스터 한 마리가 몸을 파고든 쇠사슬에 옥죄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것이 흘린 검붉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보글보글 끓으면서 검은 연기와 파란 연기가 한데 엉켜 올라오는 것을 본 마리엘은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기 끝에 제 검은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손끝이 살짝 희어졌다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마리엘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책장을 통과할 때만 해도 응징해 주겠다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예의 몬스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손이 턱에 닿자 몬스터가 돌연 얌전해져 소리를 멈췄다. 그것은 그녀가 학습시킨 공포에 반응한 녀석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었다.

마리엘은 제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여러 색으로 일렁이는 눈을 나른히 깜빡이며 몬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얌전히 좀 계시지요. 당신께서 안 이러셔도 요즘 머리가 많이 복잡해 자꾸 화가 치미니까요.”

“……그륵.”

한데 아직 교육이 덜 된 탓에 몬스터가 따지는 듯이 이를 갈자 마리엘은 귀찮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터이니. 아니, 이미 당신께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차근차근 조치를 해 두었습니다.”

과연 그가 진실을 알고도 선대의 의지를 이으려고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몬스터의 파란 눈이 마리엘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마리엘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몬스터는 이미 마기에 지배당한 지 한참인데, 가끔 사람으로서의 이성이 돌아온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순간 마리엘의 머릿속에 선황이 재니스에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불행으로도 제 탐욕을 채우려고 하겠지.〉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이 날카로운 손이 마리엘의 팔을 붙잡았다. 칼도 부러뜨릴 수 있는 강도를 지닌 손톱이 파고들자 그녀의 케이프가 조금 찢어졌다.

그 탓에 검게 물든 팔이 드러나 그 위에 새겨진 붉은 마법진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마리엘은 얼굴을 구기더니 손을 확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의 몸 안쪽에 심겨 있던 검은 창 수십 개가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크어어어어어억!

귀청을 찢을 듯한 몬스터의 비명이 울렸다. 마리엘은 눈을 크게 치뜨며 소리쳤다.

“감히, 실험체 주제에 건방지게 내 몸을 만져?”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엔 검은 창이 몬스터의 목을 꿰뚫었다. 그러자 괴성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변하면서 시끄러움이 가셨다.

대신 이번엔 몬스터의 몸에 연결된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격하게 울려 퍼졌다.

마리엘은 피를 쏟으면서 몸부림치는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찢어진 케이프에 손을 댔다. 간단한 마법으로 찢어진 곳을 복구해 다시금 팔을 가려 안정을 찾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주 끔찍해……. 그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하니 아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지.”

허어어어…….

목을 다친 탓에 계속 바람 빠진 소리밖에 못 내는 몬스터가 마리엘을 올려다보았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녀석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 섞인 눈물을 발견한 마리엘은 척추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직이 물었다.

“……혹시 후회라도 하고 있으십니까?”

이성이 사라진 지금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지만, 눈물까지 흘리는 저 눈을 보니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마리엘은 곧 안타깝다는 양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벌렸다.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마리엘은 아직 제 손안에 있는, 눈앞의 몬스터의 피를 뭉쳐 만든 돌을 꼭 쥐었다.

그러자 몸에 미량의 마기와 함께 다량의 마나가 밀려들어 왔고, 효과를 다했는지 돌은 먼지로 부스러져 내렸다.

그녀는 손에 묻은 하얀 먼지를 툭툭 털고는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클로델 황가는 오브라이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를 배출하게 될 테니. 그게 우리 거래의 대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황을 증오에 사로잡힌 괴물로 만든 대가이기도 했다.

마리엘은 눈앞의 사내와 했던 그 옛날의 맹세를 떠올리며 말을 맺었다.

“나의, 황제 폐하이시여.”

그녀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마리엘은 생긋 웃더니 뒤돌아 공간을 빠져나갔다.

책장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조용하고 평범한 마탑주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아까 하던 작업을 이어 가기 위해 약병을 들었을 때였다.

“재니스 님?”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때까지 소파에 늘어져 있던 재니스가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연체동물이라도 되는 양 흐느적거리는 재니스의 모습을 힐끗하며 마리엘은 하는 수 없이 약병을 닫고 케이프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마리엘이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때에 맞추어 재니스는 방문 근처에 걸린 옅은 결계를 거두어 내며 자신을 찾은 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로멜?”

로멜이라고 불린 상대는 자다가 막 일어난 게 분명해 보이는 재니스의 흐트러진 머리를 보고도 그러려니 하며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노아기사단의 단장이신 칼 나르바에스 님께서 보내신 편지가 왔습니다.”

그에 재니스는 받아 들면서도 좀 꺼림칙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칼 단장이 마탑주인 자신을 갑자기 찾을 일이 따로 없었을뿐더러 그가 깐깐한 선황을 존경하는 인물인 만큼 눈치는 귀신에, 어설픈 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 재미없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재니스의 얼굴을 들여다본 로멜이 넌지시 물었다.

“그냥 돌려보낼까요?”

재니스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걸 보고 제 심장이 떨어질지 안 떨어질지는 마리엘에게 판단하게 하면 되니 괜찮습니다.”

로멜은 마탑주의 농담을 듣고도 묵묵히 앉아 있는 마리엘을 못마땅해하는 듯이 한번 훑고는 재니스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예, 그럼 존경하는 재니스 님……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러고 로멜이 문에서 멀어졌다. 마리엘은 문틈으로 방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케이프 아래에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로멜은 마리엘이 흑마법을 쓰는 네크로맨서가 분명하다며 마탑에서 서둘러 내쫓아야 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마탑의 중견 마법사였다.

잠시 뒤 재니스가 가져다주는 편지를 열며 마리엘은 생각했다.

그녀가 꽤 감이 좋다고.

그래 봤자 가짜 중의 진짜가 뭔지 구분도 못 하는 자이지만.

속으로 그리 냉정한 평가를 내리며 꺼낸 편지지에는 칼 단장의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비렌시움 대공에 관하여 논할 것이 있으니 재니스 님의 황궁 방문을 청하는 바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