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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5)화 (14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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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공간에 기침 소리가 연신 반복되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이어졌는지 셀 수 없을 정도라 걱정이 된 에렌스트 경이 뒤에서 움찔거렸으나, 이온이 미리 해 둔 명령 때문에 다가서지 못하는 중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겠으니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라 했다.

아스타틴과 한참 동안 대화한 후 그를 내보낸 이온은 밤이 깊었는데도 저택 별관의 대서재로 향했다. 그러더니 제가 봐야 할 서류와 책 들을 쌓아 두고서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방에서보다 집중이 더 필요할 때 종종 대서재로 와서 일을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저러다가 모르는 새에 정신을 잃을 때도 종종 있는 이온이라 에렌스트 경은 내심 초조해하는 중이었다.

이온은 그런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계속 안경을 고쳐 올리며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낮 동안 게으름을 부려 피로가 많이 쌓인 것도 아닌데 글자가 자꾸만 흐릿하게 보였다.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오늘은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는 것에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실명의 위험도 있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얼굴 앞에 창이 하나 올라왔다.

[상태 이상: 시력 저하. □□의 저주가 강화됨에 따라 플레이어의 시력이 저하됩니다.]

이건 이전에도 봤던 내용이라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지만, 문제는 그 아래였다. 처음 보는 내용들이 떠 있었다.

[□□의 저주가 해제되어도 상태 이상 ‘시력 저하’는 지속될 수 있습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상태 이상 ‘실명’을 얻을 확률은 2%입니다.]

뒤에 이어진 건 궁금해할 때만 뜨는 옵션인 모양이다.

‘있긴 있었네.’

2퍼센트면 낮은 축에 속했지만 수치가 0이 아니라는 데에서 이온은 불안감을 느꼈다. 차라리 며칠 앓아눕는 게 낫지, 실명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갑자기 일할 맛이 떨어져 버린 이온이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 고민할 무렵이었다. 뒤에서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 움찔하는 사이, 에렌스트 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작 각하.”

발소리의 주인은 아버지인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이온이 돌아보자 과연 뒤에 늘어선 책장들 사이에서 크레이거 공작이 그의 시종장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시종장의 손에는 다과가 담긴 트레이가 놓인 채였다. 팔엔 두꺼운 담요가 걸쳐져 있었다.

이온이 의외의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살짝 일어났다.

“아버지? 앗……!”

그러다 저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에렌스트 경보다도 공작이 먼저 달려와 이온이 바닥에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주었다.

팔로 몸을 받쳐 주는 힘이 단단했다. 이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떠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이온의 허물어지려는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괜찮으냐, 이온?”

“아, 네…….”

아침에 그의 집무실에서 한바탕 싸우고 나온 터라 아버지의 다정함이 어색했던 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순간 공작의 표정이 묘해졌지만, 시선이 엇갈린 이온은 보지 못했다.

아들이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 공작이 밀려났던 의자를 되돌려 놓으며 이온 역시 그 위에 앉혔다.

고요한 대서재에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조용히 났다. 공작도 이온의 옆에 앉은 것이었다.

집무실에서는 분명히 말을 잘하기만 했던 이온은 공작이 왜 먼저 찾아왔는가 싶어 괜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숨을 잘못 들이켠 탓에 먼지를 먹어 콜록거리자 공작이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책과 서류 들을 보다가 가볍게 꾸짖는 소리를 했다.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지, 왜 무리를 하고 있는 게야? 듣자 하니 기사단 부단장 놈을 만날 때도 기침을 하고 있었다면서.”

“……쿨럭, 네? 그걸 어떻게…… 흡.”

딜런 경이랑 만날 때의 일도 보고받았을 줄은 몰랐던 터라 이온이 당황했다.

하지만 말을 하다가 숨이 차올라 다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기침을 해 댄 통에 안 그래도 목이 아팠는데, 이젠 가슴까지 죄어들었다.

그래도 아버지 앞이라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데, 공작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못난 놈…… 아비보다 아들이 더 약한 것도 못난 짓인 건 알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쭉 아파 왔는데, 공작이 새삼스럽게 그것을 지적해 오자 이온이 움찔했다.

대체 뭐냐는 눈빛을 보내자 공작이 이온이 보던 책을 덮으며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곧 이온의 어깨 위에 양털로 짠 담요가 덮이고, 책상 위엔 다과가 올라왔다. 공작은 제가 직접 따스한 물을 따라 이온에게 건넸다.

“마시거라.”

“감사, 해요.”

얼떨결에 잔을 받아 든 이온이 한 모금 마신 뒤 공작을 힐끗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던졌다.

“……아버지 이러셔도 제 마음 안 바뀌는데요.”

물론 우물쭈물하는 말투이긴 했지만, 공작이 먼저 화해의 신호를 보내오는데 이 이상으로는 이온도 더 강하게 말하기가 모호했다.

예상대로 아들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

안 바뀐다니까요?

이온도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둘의 상황을 보다 못한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만류하려는 생각으로 다가오려고 하자, 공작이 손만 들어 막았다. 그리고 이온에게 권유했다.

“이온, 어디 오랜만에 한번 아비 무릎에 올라와 보겠니?”

그에 이온이 눈을 깜빡였다.

최근은 물론, 제 남아 있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무릎 위에 올라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온은 공작이 아주아주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곤 머뭇거렸다.

“……갑자기 왜.”

“왜냐니. 아비가 아들을 마음껏 안아 보지도 못하는 거냐?”

안아 보는 거랑 무릎 위에 올라가는 게 어떻게 같으냐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온은 헛기침만 했다.

그렇게 적당히 갈무리하려고 했으나, 공작이 몸까지 틀어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이온이 에렌스트 경과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 큰 아들을 둥기둥기 하려는 꼴을 만류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는 의미다.

이온이 자꾸 머뭇거리자 답답했던지 공작이 아예 이온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서.”

“아니, 아버지, 이건 좀 많이 민망한데…….”

중얼중얼하긴 했어도 결국 공작의 바람대로 허벅지 위에 몸을 올린 이온이 얼굴까지 붉혔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메시지를 띄웠다.

[상태 이상: 호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말싸움을 했을 당시 분명히 조금 떨어졌었는데 상태가 원상 복귀됐다.

‘이러면 퀘스트 때문에 조정된 의미가 없잖아?’

시스템이 자기를 겁먹이려고 일부러 사기를 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공작의 커다란 손이 이온의 손등을 덮어 왔다.

“이온.”

“네, 네?”

그러면서 이름을 불러오자 이온의 초록빛 눈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흔들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넌 기억을 못 하겠지만 이온 네가 태어났을 때 이 아비가 어떤 심경이었는지 알겠니?”

심지어 태어났을 때로.

이온은 아버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처음이라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런 얘기를 자신이 들어도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데, 공작이 덧붙였다.

“가슴이 터질 정도로 행복하다는 게 뭔지 깨닫게 되었단다. 그리고 이 작은 손에 세상을 다 쥐여 주고 싶어졌지.”

“…….”

“그렇지만 말이다,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잘 굴러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더냐.”

이온은 아버지의 말을 듣다가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공작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세상을 다 쥐여 주고 싶다.’라는 소망에 자신이 찬물을 단단히 끼얹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병약한 몸 때문에 제대로 된 혼처를 찾지는 못할 테고, 설령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이제는 이온이 사양이었다.

카밀루스가 자신과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온은 허울뿐인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결혼을 포기한다면 공작위는 에밀리의 남편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밀리가 직접 이을 수도 있으려나.’

이웃한 나라에서는 여자가 작위를 이은 경우도 있지만, 오브라이언에서는 아직 사례가 없으니 설령 공작이 그렇게 원한다고 하더라도 황실에서 승인해 줄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크레이거 가문은 오브라이언 내의 가장 큰 공국을 이끄는 대귀족이기도 하니 그런 모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크레이거 공작이 어디 가서 늘 큰소리치는 대로 이온이 공작가를 물려받기는 여의치는 않을 터였다.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건 자명하니.

하지만 아버지 무릎에까지 앉아서 난 결혼할 생각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라, 뭐 그런 유의 이야기를 막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데 이온의 예측과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아비가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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