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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6)화 (146/317)

“그래서 아비가 미안하구나.” 

크레이거 공작의 사과가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추론하던 이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선황 폐하와 관련된 일인 건가요?”

“그래.”

간신히 속뜻을 맞추었지만, 공작은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아직 주저되는 듯 뒷말을 선뜻 잇지 못했다.

그에 이온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선황과 공작의 관계를 더듬었다.

“두 분은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라셨다고 했죠.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와 선황은 그렇게 가까운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이온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차례 황실을 방문했고, 황제와 황태자가 참석하는 연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선황과 공작이 군신 관계 이상의 어떤 교류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선 그 흔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말조차 오가지 않았다. 같은 또래에다,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친구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선황과 공작의 관계는 건조하기만 했다.

아니, 사실 이온은 종종 선황이 제 아비를 보는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선황은 본래도 눈빛이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공작을 볼 때는 혹시 제 아비를 혐오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난히 냉정해 보였으니까.

한데 그 느낌이 마냥 틀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까이 있되 눈에 띄지 않도록, 복종하되 관여하지 않도록. 그게 선황이 이 크레이거 가문에 내린 명이었다.”

이온은 그에 확 인상을 썼다.

“……너무 불합리한 요구 아닌가요?”

제아무리 크레이거 가문의 황가를 향한 충성이 절대적이라고는 해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하지만 난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요?”

“선황께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단다.”

“혹시 그게 대공과 관련된 일인가요?”

묻고 나서 공작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온은 제 추측이 맞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연결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이온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실 크레이거 공작의 여태까지 행보는 상당히 이상하긴 했다. 현재 크레이거 공작가의 공국 행정은 다섯 명의 가신들이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한데 정작 공국의 책임자인 공작은 제국의 수도에 내내 머물고 있다.

나머지 네 개 공국을 이끄는 공작가들도 물론 각자의 방식으로 오브라이언 제국에 존경을 표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온은 목 안쪽이 꺼끌꺼끌해져 오는 것에 침을 한 번 삼킨 뒤, 제가 원하는 말을 듣기 위한 서두를 띄웠다.

“대공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아보면서 아버지가 대공의 출생에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선황후께서 남부에 갔을 때 몰래 출산하는 걸 도운 게 아버지였죠.”

“거기까지도 알아본 게냐?”

이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단숨에 너무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숨이 조금 찼다.

그게 아니면 대서재 안의 공기가 너무 탁해서 그런 걸까?

한 번 심호흡을 해 숨을 고른 이온이 다시 말을 쏟아 냈다.

“황궁에서 낳지 못할 정도였으니 해석은 두 가지로 가능할 거예요. 황후의 몸 상태가 정말로 안 좋았거나, 그도 아니면 출산 자체가 부정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둘 다인가요?”

“…….”

아직도 제대로 입을 열려 하지 않는 공작의 모습에, 이온은 제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따뜻한 손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컸어요. 진실을 알려 주세요. 대공도 본인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요.”

“……정말 대공을 좋아하고 있니?”

질문을 듣고 이온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크레이거 공작의 간절한 눈빛에서, 이온은 그가 정말로 카밀루스와 제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기를 원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지만 이미 한 길로 향하고 있는 제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공보다 더 절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버지도 제가 그런 사람과 함께하길 바라시죠?”

“물론이다, 이온.”

의외로 선뜻 긍정적인 대답은 내놓은 공작은 이온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대공은 이 아비가 하지 못하는 일도 너에게 해 줄 수 있겠지.”

공작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건, 아마 저주를 풀어 주는 일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공작은 아픈 아들에게 어서 나으라는 말하기보다는 그럼에도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타입이었지만, 저주로 인해 성장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 아들을 안쓰러워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공작은 제 다리 위에 앉힌 이온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는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가득해서, 이온은 괜스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때쯤이면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서 벗어나 자리를 떴을 것이다. 카밀루스만큼이나,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기제였다.

그러나 이제 이온은 그것을 참아 냈다. 대신 공작에게서 제가 듣기를 원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꽤 긴 인내 끝에 공작이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다. 로제니아 황태자비의 출산은 여러모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드디어 연대표가 25년 전으로 옮겨 갔다. 이온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어째선가요?”

“대공은 선황이 원하지 않는 아이였단다. 내 당시 황제인 선선대 황제의 명으로 출산을 도왔지만, 뒤늦게야 선황이 아이를 사산하길 원했다는 걸 알게 됐지.”

“……아들이 죽기를 원했다고요?”

“그래. 먼저, 당시 황태자비의 몸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알아본 바와 같이 당시 황태자비였던 로제니아 황후가 남부로 간 목적은 요양이 맞았던가 보았다.

낡은 과거를 더듬는 일이었지만 공작은 마치 어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조금의 멈춤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스스로는 몸도 쉽게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 내가 봐도 그런 몸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 같았어. 그렇지만 황제의 의지가 강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귀한 황실의 아이가 아니더냐.”

논리상 문제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사실 굳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황태자비의 생명이 얼마 안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 역시 아이라도 건지는 게 옳은 일이라고 여겼지.”

“아이가 생긴 이상 사산하더라도 산모가 회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선황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래, 선황도 알고 있었다.”

“그럼 왜 문제가 됐던 거죠?”

“둘 다라고 하지 않았니?”

“…….”

들려온 반문에 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공작의 말인즉 황후의 몸이 안 좋은 것과 더불어 카밀루스가 ‘부정한’ 아이였다는 의미였다.

부정한…….

그 단어를 곱씹자 이온은 이전에 들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역시나 로제니아 황후의 태를 빌렸다고밖에는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아니겠지.

황실에서 그런 천박한 짓을 했을 리가 없어.

속으로는 부정하면서도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온이 저도 모르게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살짝 핥으며 말소리를 내뱉었다.

“아버지, 혹시, 그, 설마.”

“안심하렴. 선선황의 아들은 아니니.”

의미를 오해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공작의 말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여전히 ‘부정한’이라는 표현은 유효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온, 너도 들은 적이 있을 게다.”

“어떤 걸요……?”

“재니스가 황실의 종이라며 떠들고 다니게 된 계기 말이다.”

재니스?

갑자기 화제가 전환된 탓에 이온은 잠시간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이름이 마탑주의 것이었음을 상기해 내고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이온 크레이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선선대에 맺은 황실과의 맹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게 카밀루스의 출생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애초에 둘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이온은 이어진 공작의 말에 숨을 삼켰다.

“대공은…… 선선황과 재니스의 합작품이다.”

그때였다.

“아들과의 다정한 담소를 엿듣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공작.”

“……!”

크레이거 공작이 어깨를 흠칫하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이온 역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고개를 돌리니 에렌스트 경도 불쑥 나타난 사내 존재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페드로도 한참 떨어진 저 뒤에 있는 걸 보면 눈앞의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대서재에 들어왔는지 알 만했다.

기척도 없이 공작의 뒤쪽에 다가와 선 그가 책상을 짚으며 몸을 기울였다. 곧 울려 퍼진 낮은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찾아온 고요를 갈라 버렸다.

“당신 아들한테만이 아니라 내게도 더 자세히 말해 주면 물건 취급당한 것쯤은 봐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묻는 카밀루스의 표정은 전례 없이 차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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