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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47)화 (147/317)

공작의 고개가 돌아가 카밀루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옆의 의자를 빼 앉은 그가 팔짱을 끼고는 이온을 제 무릎 위에 앉히고 손을 붙잡고 있는 크레이거 공작에게 일침을 놓았다.

“아들한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너무 정겹게 들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끼어들고 말았어.”

물론 등장엔 놀랐을지는 몰라도, 딱히 죄의식 따위는 없었던 크레이거 공작은 덤덤히 대꾸했다.

“심히 무례하긴 하셨습니다. 어차피 제 아들놈이 베갯머리에서 다 들려드렸을 텐테요.”

“남의 이야기를 하는 무례와 그 이야기를 엿듣는 무례의 무게가 비슷해 보이는데, 아닌가?”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가볍게 몇 마디 주고받은 카밀루스와 크레이거 공작은 서로 상대방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말없이 노려보았다.

이온은 마주치면 썩 좋은 그림을 못 그리는 두 사람을 중재는 못 하지만 일단 끼어들어 대화를 차단했다.

“대공, 솔친 후작 저에 다녀오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그러자 이온에게로 시선을 준 카밀루스는 조금 사그라든 표정을 지었다.

“그럭저럭.”

대답을 들은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작의 다리 위에 앉은 민망한 자세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공작과 카밀루스는 동시에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은 이온을 품에서 떨어뜨린 것에, 카밀루스는 이온이 저한테 안 오는 것에 약간 서운해하는 듯했다.

두 남자의 눈빛을 보지 못한 척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이온이 태연히 뒷말을 재촉했다.

“마침 중요한 얘기를 시작하려던 참이긴 하니까요. 같이 듣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죠.”

이온의 말끝에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덧붙여지자 카밀루스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서둘러 동조해 왔다.

“소공작의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으니 얘기를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 그래서, 마탑주가 뭘 어쨌다는 건가?”

카밀루스의 출생 당시를 더듬을 때만 해도 거침이 없었던 공작의 말은 이번엔 다소 늘어졌다.

당시에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본인조차도 기억이 흐릿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인 듯했다.

때는 30년 전이었다.

* * *

카밀루스의 아버지인 선황, 그러니까 당시 황태자였던 레이어먼 클로델의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났다. 그날은 황태자의 오랜 짝사랑이 결실을 맺은 날이었다.

결혼 상대는 로제니아 미아블레. 미아블레 후작가의 영애인 로제니아는 황태자가 사교계에 데뷔하던 날 첫 춤의 상대였다. 그날 그녀에게 반한 레이어먼이 이후 첫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했다는 건 사교계 안에서는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그렇게 경사가 들고 며칠이 지난 뒤, 제멜은 축하를 명목으로 선물을 잔뜩 들고 황태자궁을 방문했다.

그러고 예상외로 풀이 죽어 있는 레이어먼에게서 그리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다.

침울함에 잠겨 있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제멜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환후가 생겼다고…….”

“그래서 혹시 공국에는 괜찮은 약이 있는지 묻고 싶다.”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를 보러 방문했던 제멜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결혼식 때 먼발치에서는 멀쩡해 보였던 로제니아가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결혼 직후에 발병했다고.

처음에 걷다가 기절했을 때는 단순히 무리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두세 번 정도 반복되자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멜은 방금 제 부인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겠다며 밖으로 나간 로제니아를 떠올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거고?”

“그래…….”

당시만 해도 레이어먼과 제멜은 말을 터 놓고 지내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제멜이 기억하고 있는 인생 첫 기억은 레이어먼과 황궁 후원의 흙을 파고 있는 것이었고, 이후 그와 함께 검술이나 문학 등 여러 수업을 받았었다.

제멜이 결혼하고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연중 공국에 머무는 기간이 제국 수도에 머무는 기간보다 길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 간의 친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원래라면 최고의 행복을 맞이했어야 할 친구의 불행 앞에서 제멜이 난처해하면서 답을 내놓았다.

“그런 증상을 개선할 수 있는 약이 있는지…… 돌아가면 찾아볼게.”

그렇지만 말하는 이와 마찬가지로 듣는 이도 아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브라이언 내에서 황실보다 더 뛰어난 의료술을 보유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레이어먼은 그 말이라도 간절했던지 제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멜, 로제니아가 나 때문에 아픈 것이면 어쩌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레이어먼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것에 제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황태자비가 혹시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그게…….”

레이어먼이 결혼 전에 있었던 꺼림칙한 일 하나를 안쪽에서 주섬주섬 꺼내 말했다.

예의 사건은 로제니아 미아블레에게 청혼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연회에서 고백을 하기 위해 그가 로제니아에게 건넬 반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백작이 다가와 한마디 했다는 것이다.

미아블레 가문이 성전을 무너뜨린 클로델 황가와 결합하면 틀림없이 블랑셰의 진노를 살 것이라고.

제국의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아블레 후작가에는 특기할 만한 이력이 하나 있었다.

미아블레 가문의 초대 후작은 오브라이언의 설립을 도왔다는 전설의 동물인 블랑셰를 기리는 성전을 관리하는 지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블랑셰를 신처럼 기리던 첫 번째 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미아블레 가문은 성전의 관리자이자 블랑셰의 의지를 잇는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그 백작의 말인즉 그런 충성스러웠던 미아블레 가문이 클로델 황가와 결합하면 블랑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저주를 내릴 것이라는 의미였다.

얘기를 한 자가 어떤 인간인지 대충 짐작이 된 제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그런 미신을 믿어?”

블랑셰를 기리는 성전이 무너진 것은 클로델 황가에서 처음으로 황제를 배출했을 당시였다.

클로델 가문은 황실에 들어서자마자 더는 신화가 제국의 실질적 운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전설의 동물인 블랑셰를 존중하되 섬기지 않음을 공식화했다.

그렇게 오브라이언에서 신화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기실 제국의 역사가 길게 이어지면서 서서히 건국 이야기가 동화처럼 여겨지는 때였으니 그것은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 탈피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런 미신을 계속해서 신봉하는 자가 있는 법이었다. 아마 레이어먼에게 말했다는 예의 백작도 그런 자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제멜의 지적에 레이어먼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 지었다. 그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꾸했다.

“그러게…… 로제니아가 아프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고 있어.”

“말 그대로 별별 생각이야. 어딘가에 해답이 있을 테니 걱정 마.”

서툰 위로를 들은 레이어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뒤로 둘 사이의 이야기는 어색하게 끊겼다.

제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접견실을 둘러보며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고, 레이어먼은 밖의 황태자비가 신경 쓰이는지 건성이었지만 적당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다소간 풀린 레이어먼이 제멜이 가져온 선물들을 확인해 볼 무렵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황태자궁 시종의 부름에 제멜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황태자 전하, 전하를 뵙고자 하는 손님이 들었습니다. 태양궁에서 보냈다고 합니다만…….”

이미 손님이 든 상황에서 새로운 손님을 들이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었지만, 제멜은 그조차 따지지 않았다. 그보다 현재의 어색함을 어떻게든 타파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양궁이라면, 황제가 보낸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다만 레이어먼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문밖에서 고해 오는 시종에게 물었다.

“손님이 누구지? 지금은 크레이거 공작이 들었으니 새로운 손님을 받는 것은 곤란하다.”

“마탑주인 재니스 님이십니다.”

재니스는 당시만 해도 마탑주로 오른 지 얼마 안 된 인물이었다.

전대 마탑주가 죽고, 마탑에 있던 중견 마법사 중 하나인 재니스가 마탑주로 선출된 지 반년째.

재니스는 중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유독 젊어 보이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 마법 능력은 역대 마탑주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레이어먼은 그가 왔다는 소식에도 계속 제멜을 생각해 주저하는 듯했으나, 제멜이 황제께서 보냈는데 그래도 되냐며 괜찮다고 몇 번이고 부추기자 결국 접견실의 문을 열게 했다.

잠시 후 들어온 건 케이프 후드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며시 무릎을 굽혔을 뿐이었다.

“저는 마탑주인 재니스, 여기는 제 조수인 마리엘이라고 합니다. 오브라이언의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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