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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황께서도 그날 처음으로 그를 만난 모양이었지요. 당시 재니스는 황제궁의 명으로 황태자비의 환후를 살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 저주가 아닐까 하고…….”
어느새 크레이거 공작의 이야기를 대서재에 있는 다섯 사람이 모두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특히나 재니스의 등장 대목에서 카밀루스와 페드로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질문을 먼저 한 건 이온이었다.
“그래서 황태자비의 병명은 뭐였죠? 저주가 아니었나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부분에서 혹시나 그녀가 자신과 같은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탑은 블랑셰를 모시는 성전 터의 뒤에 위치하고, 그 사이비 백작도 블랑셰의 저주라고 했으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저주는 공작이 말했던 것과 같이 완전한 미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럼 저주를 건 □□도 결국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너무 허무맹랑한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시스템이 이온을 떠보았다.
[□□와 매칭하시겠습니까?]
[1. 재니스와 매칭한다.
2. 마리엘과 매칭한다.
3. 블랑셰와 매칭한다.
4.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온은 이 와중에 시스템이 걸어오는 장난질에 울컥했다.
‘블랑셰가 현존하기는 하는 거야?’
애초에 그건 말 그대로 신화였다. 만약 제국의 건국을 도울 정도의 지성 있는 동물이 실존했다면 성전을 지을 게 아니라, 흉상 같은 걸 만들어서 받들었어야 한다.
실체가 있는 동물을 실체가 없는 신으로서 받드는 것은 몹시도 모순되는 일이니.
한데 최근 오류가 몹시 많아 보이는 시스템은 오늘도 역시나 피곤하게 굴었다.
[……플레이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
쇼하네.
어처구니없어진 이온은 시스템한테 속으로 험한 욕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얌전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왜 이렇게 난리인지.
그렇지만 다음 메시지를 본 순간 이온은 제 동요를 겉으로 티 내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전설의 동물 ‘블랑셰’는 현존합니다.]
……지랄.
그 뒤에 시스템은 다시 ‘□□와 매칭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며 자꾸만 매칭을 강요했다.
이온은 4번을 선택해 이번에도 답을 보류해 두었다. 지금은 시스템의 농간에 장단 맞춰 줄 때가 아니었다.
와중에도 크레이거 공작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으니.
“재니스의 말로는 저주는 아니었단다. 궁정의도 같은 결론을 내렸고.”
재니스만 그랬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이 했겠지만, 궁정의의 말이 보태졌다고 하니 그나마 약간의 신뢰가 생겼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단지 이온만이 아니었는지, 집중해서 듣던 카밀루스도 은근히 안도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는 곧 목소리를 심각하게 내리깔았다.
“공작.”
말씀하시라는 투로 공작이 그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때 재니스의 나이가 몇이었는지 기억합니까? 아니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제 딴엔 중요한 단서라고 여겨 물어본 것이었으나 크레이거 공작의 대답은 유보적이었다.
* * *
“내가 얼굴을 가린 자의 인사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레이어먼은 재니스와 마리엘의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제 앞에서조차 후드를 벗지 않는 그들의 무례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
하지만 재니스는 이번에도 무릎을 살짝 굽히며 변명을 입에 올릴 따름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여기 마리엘의 경우에는 어렸을 적 마기에 잠식되어 얼굴이 무척이나 흉합니다. 하여 감히 전하의 앞에 얼굴을 드러낼 처지가 못 됨을 혜량하여 주십시오.”
“……마기라고?”
반문하는 레이어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과연 후드의 아래로 검게 물든 목이 보였고, 조금 드러난 손 역시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제멜은 레이어먼만큼 마법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았지만, 사람이 마기에 잠식되면 어떤 증상을 겪는지는 알고 있었다.
신체 변형. 그것은 즉 몬스터화의 전조였다.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차라리 나은 경우로, 이성을 잃고 몬스터화하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다.
한데 마리엘은 단지 살색만 검게 변색하였을 뿐이라,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레이어먼은 마리엘에게서 위험을 느낀 모양이었다.
“통제할 수 있는 건가?”
질문을 받은 재니스의 입가가 약간의 호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마리엘은 이미 십수 년간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또한 몬스터화가 될 경우.”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재니스가 말 사이에 약간의 틈을 두었다. 레이어먼과 제멜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후드 아래의 붉은 입술에 집중되었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내 앞에서 하는 말치고 심히 망령되지 않나.”
“송구합니다. 제가 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입장이다 보니 황실의 언어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들려오는 말은 몹시도 가벼운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조수를 죽이겠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재니스가 범인(凡人)으로 보였을 리는 없었다.
본래라면 마리엘은 그렇다 쳐도 재니스에게 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느냐 추궁할 차례였으나, 레이어먼은 그조차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듯 화제를 넘겼다.
재니스에게 앉으라는 기본적인 권유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엄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황태자궁에 온 용건이 무엇이지?”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비의 환후가 심상치 않으니 혹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닌가 살펴 달라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
이야기를 들은 레이어먼과 제멜이 잠시간 눈빛을 교환했다.
제멜이 미신이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레이어먼은 안 그래도 블랑셰의 저주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했던 터라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다른 것에서는 꽤 냉정한 구석이 있는 레이어먼도 제가 사랑하는 로제니아에 한해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재니스가 온 것 자체가 황명에 의한 것이니, 사실상 로제니아를 보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레이어먼이 굳었던 표정을 다소간 누그러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비의 방으로 가도록 하지. 제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고는 제멜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뒤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황태자비의 병에 대해 자세히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일 테니 레이어먼을 배려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랜만에 왔는데 이대로 보낼 수 있나. 동석하도록 해.”
“동석을, 말입니까?”
“…….”
레이어먼의 표현을 곱씹으며 눈을 마주친 순간, 제멜은 레이어먼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설령 황제가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재니스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증인으로서 함께하길 바라는 듯했다.
제삼자에게 황태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 공개하는 것은 당연히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자칫 말실수를 하여 그 사실을 퍼뜨리기라도 한다면 누가 어떻게 이용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레이어먼이 제멜을 굳게 믿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여 제멜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로제니아의 방으로 함께 향했다.
그렇게 황태자궁 후원에서 공작 부인과 다과를 하고 있던 로제니아는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부름에 달려와 재니스 앞에 눕게 되었다.
재니스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은 순간 레이어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만 해도 로제니아의 건강은 그렇게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고, 기절 횟수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 질병이나 저주라기보다는 단순 실신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블랑셰의 저주니 뭐니 하는 말들도 사실은 단지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상에 대한 불안함에서 발로한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니스의 입이 열렸을 때, 레이어먼의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시리게 할 만큼 차게 식어 버렸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이는 저주가 아닌 듯합니다. 음독을 하신 것 같군요.”
로제니아는 금세 사색이 되었다.
“레이어먼…….”
제멜은 그녀의 그런 반응이 저도 모르게 마신 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님을 알아챘다. 레이어먼이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독이라고?”
감히 누가?
그런 물음이 포함되어 있는 반응이었다.
도무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제멜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로제니아에게서 떨어져 레이어먼을 마주한 재니스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해독제를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 어쩌면 건조하다기보다는 태평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다.
당시의 제멜은 그런 그가 왜인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