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단지 제멜의 개인적이면서도 편협한 감상 따위가 아니었다.
눈이 달리고,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때의 재니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마탑주 재니스.
성이 뭔지도 모르고, 목소리를 들어도 성별 역시 알기 어려웠다.
레이어먼으로서는 그리 수상해 보이는 자에게 굳이 자신의 연인을 맡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재니스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대에게 받는 해독제는 필요 없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 따위 없는 단호한 말에 후드 안의 입술은 침묵했다. 레이어먼은 이어 황태자궁의 시종장을 불러 명했다.
“황태자비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있는 자들은 전부 내 앞에 끌고 오거라!”
그날로 레이어먼은 황태자궁에 독을 들이고, 그것을 로제니아에게 가져다준 모든 이들을 벌했다.
또한 얼마 안 가 재니스에게서가 아닌 황태자비를 해치려 한 이들에게서 기어이 해독제를 받아 내고야 말았다.
로제니아를 쫓아다닐 때는 분명 순수한 청년이었던 레이어먼은 그녀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제국의 후계로 변모했다.
제멜 역시 로제니아의 음독 사실이 밝혀진 자리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레이어먼 황태자의 친구로서, 그리고 제국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크레이거 가문의 수장으로서 레이어먼의 정적을 없애는 피의 숙청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3황자와 4황자가 축출됐지만 황제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강력한 지지임을 알고 있기에 황태자의 잔혹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해독제를 먹었으나 로제니아의 몸은 평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어느 의원을 데려다 놓아도, 어떤 약을 먹여도 무효했다. 레이어먼은 매일 밤 아픈 로제니아의 곁을 지켰지만 그런다고 하늘이 감동하여 그녀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일은 없었다.
몇 개월째 이어지는 로제니아의 기나긴 병상 생활은 레이어먼의 정신을 피폐하게 했고, 결국 그는 견디지 못해 한 사람을 찾았다.
“마탑주에게…… 편지를 띄워라. 황태자비의 환후를 살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레이어먼의 가장 큰 패착이었고, 황실에 비극을 불러온 조용한 서막이었다.
그때까지 레이어먼은 황제인 제 아비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전혀 다름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 * *
분명 급전으로 보낸 것인데도, 편지를 띄우고 며칠이 지나도 마탑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본래 마탑이라는 곳이 그러했다. 황실에서 오라고 해도 오지 않고, 제국을 위하여 능력을 쓰라 일러도 저희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의 집합소.
그래서 매일매일이 초조했음에도 레이어먼은 기다렸다. 어쨌든 편지가 무사히 마탑의 문을 통과했다고는 했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재촉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쥐었던 펜을 도로 내려놓는 필사의 인내 끝에 레이어먼이 재니스의 얼굴을 다시 본 건 첫 편지를 띄우고 대략 15일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 밤에 찾아온 재니스는 케이프 후드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였고, 말투 또한 능청스러웠다.
“바람 소리가 사나워 책에 집중이 안 되지 뭡니까? 그러다 달력을 보니 벌써 2주가 지난 뒤라 놀라 부랴부랴 왔습니다.”
“…….”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느라 차일피일했다는 재니스의 변명에 레이어먼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화를 내려는 순간 재니스가 레이어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짝 조아렸다.
“저의 불찰입니다. 비 전하의 환후를 고치는 데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전하.”
그러는 재니스가 레이어먼의 눈엔 무척이나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애초에 치료할 생각이 있었다면, 재니스가 지금처럼 며칠이나 지난 뒤에 나타났을까.
따라서 레이어먼은 그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냉정하게 일갈했다.
“최선이 언제나 최상을 낳는 것은 아니지.”
요는 네 노력 따위는 알 바 없고, 오직 결과로만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러지 않으면 벌하겠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한데 재니스는 또다시 뚫린 입으로 레이어먼이 열받아 할 만한 말을 지껄였다.
“다만…… 문제가 있군요. 황성 내에서는 본래 마법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레이어먼이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듯이 노려보았다.
재니스의 말은 사실이긴 했다. 황실의 일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황궁 내에서 황제의 허락 없는 마법 사용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힘없는 제가 그것을 어겼다가 저희 마탑에까지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심히 걱정이 되는 바입니다, 전하.”
재니스의 항변은 곧 그 ‘황제의 허락 없이’라는 부분 때문에 무서워서 황태자비의 치료를 못 하겠다는 뜻이었다.
레이어먼은 헛웃음을 짓고는 제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선이 가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블랑셰의 축복 때문인지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황가의 인물들은 평범한 사람 이상의 마법 능력을 타고났다.
황권이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그 마법 능력이 꽤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다만 눈앞의 존재는 연약한 척해도 결국은 마탑의 주인. 마탑 인간들이 아무나에게 마탑주 자리를 내주었을 리는 없으니 아마 레이어먼보다도 훨씬 강한 마법 능력을 소유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제 아비인 황제보다도.
그러니 겉으로는 조아리고 있으나 그 태도가 심히 방자한 것이겠지.
“심의가 짐작이 안 되는군.”
“황제 폐하를 알현하여 비 전하의 치료를 허락받아야 할 듯합니다.”
재니스의 말에 논리적 모순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절차를 완벽하게 지키자는 권유이니 레이어먼 입장에서도 환영해야 마땅한데.
레이어먼의 파란 눈이 재니스와 그 옆의 조수를 번갈아 보았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두 사람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 당연한 일조차 경계를 하게 됐다.
‘별일은 없을 거다.’
레이어먼은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달래며 대꾸했다.
“밤이 늦었으니 명일 아침에 찾도록 해라. 태양궁엔 미리 연락을 넣어 둘 테니.”
“실로 현명하십니다.”
“…….”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려던 레이어먼이 발을 멈칫했다. 말은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불쾌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눈치 없이 굴던 재니스가 재빨리 변명을 주워섬겼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격려하던 습관이 그렇게 배어……. 감히 황태자 전하를 평하는 말을 해 버렸네요.”
“입조심하도록 하거라. 이곳은 마탑이 아니니.”
“물론입니다. 황실을 욕보일 의도는 없었으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사과를 받는데도 어째서 기분이 더 가라앉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불쾌감이 무례함에 대한 분노를 이겼으므로 그는 냉정히 발을 돌렸다.
* * *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마탑주 재니스가 제국을 수호하는 태초의 존재인 블랑셰의 앞에서 맹세하노니, 앞으로 클로델 황가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재니스가 양피지에 자필로 휘갈겨 쓴 그러한 선언이 황성의 한가운데에 내걸렸다.
아침에 황궁에 들었던 재니스가 저녁까지 내내 붙들려 있기에 레이어먼은 안 그래도 기이하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그런 내용이 적힌 글이 내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레이어먼은 재니스가 단지 황태자비의 치료를 위해 황성에 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결국 2주 동안 이쪽을 피 말리게 한 이유도…….’
황제와의 기 싸움에 로제니아의 병이 이용당했던 것이다. 레이어먼은 제 아비인 황제에게도 화가 잔뜩 났지만 차마 따지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중립을 유지하며 정치적으로 끼어든 적이 없는 대신, 황가에서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마탑이다.
특히나 역대 황제들 중엔 마탑주의 능력을 이용하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지만, 번번이 회유에 실패했었다. 심지어 황실에서 돈을 쏟아부어서 마법 연구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몰라도 재니스를 설득하다니, 이는 분명 정치적 가치가 있었다.
그가 아무리 의뭉스러운 이라고 하여도…….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내적 갈등을 정리한 레이어먼의 앞에 재니스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조수라는 마리엘 역시 케이프 후드를 벗은 것이었다.
돌변한 그들의 태도에 오히려 의심을 틔운 것도 잠시, 레이어먼은 재니스가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미는 약병을 보는 순간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것은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빛을 발하는 아주 기이한 약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신이함을 품고 있었다.
레이어먼은 자신도 모르게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재니스에게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이지?”
“이 재니스의 마나를 녹여서 만든 약물입니다, 황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