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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0)화 (150/317)

* * *

“그 약물을 먹기 시작한 뒤로 황태자비는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했다고 하더군요. 선황께서도 그때를 계기로 해서 재니스를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 듯하였지요. 황태자비를 제외하고는 평생 누군가를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공국에 있는 저에게 쓰는 편지에도 재니스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정도이니.”

이야기가 길어지자 크레이거 공작이 중간중간 물을 마시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니, 어쩌면 그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나올 이야기에 대한 긴장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으니.

게다가 이 지점부터는 공작도 제삼자로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황태자비가 어느 정도 회복된 걸 확인한 다음에는 자신의 공국을 다스리기 위해 돌아가야 했으니까.

공작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고 있었다. 본인이 선선대 황제와 선황 사이의 관계 변화를 놓친 것이 이때부터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야기를 경청하던 카밀루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마나를 녹인 약물이라.”

공작이 핵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이온은 미간에 주름까지 새기는 그를 지켜보다가 슬쩍 물었다.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지? 마나를 녹인 약물이라면 몸의 회복을 도울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요.”

마나는 그 쓰임이 단순히 마법을 시전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치 피와 같이 곳곳을 순환하며 몸에서 여러 순기능을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지적하려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물론 재니스가 건넨 게 진짜로 마나를 녹인 약물이라면, 당시 황태자비가 회복된 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건 제 피를 뽑아 만든 마나석 덕분에 이온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니, 황태자비는 그것을 장기간 복용했다고 하니 오히려 재니스의 강한 마나를 몸속에 조금씩 축적까지 하게 되었을 터였다.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졌을 것이고.

문제는, 그렇다면 카밀루스의 상식상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는 점이다.

“공작은 그 약물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약물의 색깔은 어땠는지, 그리고 병의 크기나…… 모양이 어땠는지 기억한다면 알려 줬으면 좋겠군요.”

카밀루스의 말에 크레이거 공작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후로 그렇게 독특한 약을 본 적이 없으니, 인상에 남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선황도 처음 보자마자 호기심을 못 이기고 저절로 손을 뻗었을 정도였다. 그러한 감상을 느낀 것은 크레이거 공작도 마찬가지였고.

“반대편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분홍색 약물이었지요.”

“여기에 그려 봐도 좋겠는데.”

카밀루스는 꽤 적극적으로 그림 그릴 것을 권했다. 이온이 책상 위에 늘어놓은 펜 중 하나를 건네고, 빈 종이를 그의 앞에 직접 끌어다 놓았다.

이온도, 크레이거 공작도 카밀루스가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공작은 카밀루스가 시키는 대로 제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 방면으론 재주가 없었지만, 약병을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육각형으로 깎인 약병에 대한 묘사가 완료되고,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온이었다.

“어…….”

“…….”

제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이온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인지한 카밀루스가 그를 바라보자 이온도 시선을 마주쳤다.

공작은 둘 사이에 일어난 묘한 공감대를 확인하고는 이온에게 물었다.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게냐?”

“그게, 이건……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안 수상해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옆에서 카밀루스가 거들어 주었다.

“내가 얼마 전에 입수한 약의 병과 똑같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공작.”

“그 약이 뭐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선황의 유품이었지요. 하지만 내용물은 다르군요. 일단 약물의 색깔이 상이하니…… 아마 효과도 아주 다를 겁니다.”

카밀루스가 말하는 건 바로 황태후에게 얻어서 이온에게 건네준 약물을 가리킴이었다.

선황이 상자에 따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는, 보라색 물약.

다만 그것엔 굉장한 양의 마기가 들어 있었고, 그 비슷한 걸 먹었다면 황태자비는 반드시 죽거나 저주에 걸렸거나 몬스터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높은 확률로 그것이 저주를 일으키는 약물이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온의 몸에 걸린 것과 같은 저주를 일으키는 약물이라고.

사실 약병을 받아 온 뒤 내내 의문스러웠던 것이 하나 존재했다. 왜 그걸 선황이 보관까지 하고 있었냐는 부분이었다.

황태후는 심지어 그것을 건네면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도 잘 모른답니다. 하지만 그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겨 두었지요.〉

분명 그런 말까지 했다, 선황이 소중하게 여겼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공작의 말에 의하면 선황은 그런 저주를 일으키는 약물보다, 제가 그토록 그리워한 로제니아를 치료해 준 약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 논리상 더 적절했다.

단지 감에 의존한 억지 추론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생각에 이 부분은 무엇보다 분명한 논리적 모순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적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속성을 지닌 게 맞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선황의 변덕으로 인한 것일까.

아니면 황태후가 카밀루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 * *

카밀루스가 태어난 해, 고민이 있으니 황태자궁에 방문해 달라는 청을 들었을 당시 제멜은 다행히 공국을 떠나와 제국의 수도에서 머물고 있었다.

시기가 우연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고, 대기하라는 황제의 명에 의해 제멜이 황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국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황제의 명은 실로 난데없는 요구였으나, 당시 황권은 거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마탑주 재니스가 충성 맹세를 하면서 내황성에는 클로델 황가를 지키는 강력한 결계가 쳐졌고, 그것은 존재 자체로도 오브라이언의 강력한 황권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당시 황제는 상당히 공격적인 정치 성향으로, 공국들의 이권을 하나둘씩 빼앗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크레이거 공작 역시 몸을 사리는 차원에서 황제의 명에 순순히 따른 것이다. 그나마 추수가 끝난 겨울철이라 한시름 덜고 온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 얼토당토않은 황명이 악재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제멜은 스스로를 달랬다. 덕분에 오랜 친구인 레이어먼의 해결사 노릇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위안거리가 있었으니.

그러나 황태자궁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멜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레이어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크레이거 공작 역시 난처함에 입을 떼기 어려웠다.

공국을 떠나올 당시만 해도 로제니아는 건강하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침대에서 운신조차 하기 어려워하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로제니아가 붉은 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누워 있는 침대 앞에서 레이어먼은 두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의식은 잃지 않고 있던 로제니아는 소식을 듣고 제 방으로 들어온 제멜을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잘 왔어요, 제멜. 레이어먼을 내보내 줘요. 제멜에게 할 말이 있어요.”

“할 말,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당연히 이 요구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레이어먼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로제니아는 완강했다.

“레이어먼, 손님이 왔으니 접객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제니아.”

“어서요.”

마치 아카데미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를 등 떠밀어 강제로 보내는 것처럼 로제니아는 레이어먼을 밀어냈다. 부인의 요구에 레이어먼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방 안에는 제멜과 로제니아만 남았다.

제멜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로제니아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비 전하?”

그러자 로제니아는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를 굴려 제멜에게로 향했다. 몸은 지친 기색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눈동자는 무척이나 맑게 보였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제멜이 황도에 와 있는 거라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거기에 무슨 이상이라도?”

“현재 폐하께서는 레이어먼과 날마다 싸우고 있어요. 매일같이, 태양궁에서 고성이 오간다고 하죠.”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요.”

“제 거취 때문이에요.”

로제니아의 거취?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단어 선택이라 제멜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다. 독대를 청한 것치고, 로제니아는 아직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제멜은 제 눈앞의 현상에 대해서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재니스의 마나가 담긴 약을 마시고 많이 회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제멜은 골격이 드러날 만큼 말라 버린 로제니아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 부인이 이 꼴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그도 제정신으로 있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 해도 황제와의 불화라니. 제멜은 레이어먼이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단지 로제니아의 건강만이 싸움의 이유는 아니리라고 추측했다.

문제는 그게 뭔지 짐작이 안 된다는 것이지.

로제니아는 뒷말을 잇지 못하는 제멜에게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아마 제 건강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제멜, 사소한 부탁 하나만 하고 싶어요.”

“말씀하십시오. 정말로 사소한 것이라면 들어드릴 테니.”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폐하께서 권하신 대로 남부로 요양을 가려고 해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반대하시는 겁니까?”

제멜의 반문을 들은 로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직 몰라요. 그래서 내가 가고 싶어서 먼저 말한 것으로 하려고요.”

이 순간 제멜은 제가 의도치 않게 복잡한 일에 끼여 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약간 주저했으나 결국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어 버렸다.

“……부탁하실 일이라는 건?”

넌지시 묻는 말에 로제니아가 자애로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이 눈꼬리가 처진 미인은 미소를 띠면 무척이나 선량해 보였고, 그래서 보는 사람을 애태우는 측면이 있었다.

“제 추측이지만 황제 폐하께서 제멜을 부른 건 레이어먼 때문인 것 같아요. 그를 말릴 사람은 당신뿐이니까.”

“…….”

“흔들리지 말고 잘 중재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가 부탁하는 일은 제국의 요직을 차지한 귀족으로서 당연한 의무였기에, 제멜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후 그는 레이어먼에게 붙들려 로제니아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그녀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에 대해서 한참이나 들었다.

하지만 그 긴 서두가 무색하게, 레이어먼의 결론은 결국 공국에 괜찮은 약이 있는지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듣자마자 왜 재니스에게 부탁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몇 시간의 대화로 완전히 지쳐 버린 제멜은 알겠다고만 한 뒤 황태자궁을 빠져나왔다.

황제가 호출한 건 바로 그날 저녁.

펑펑 내리는 겨울의 눈을 맞으며 황궁에 든 제멜은 어쩌면 알아선 안 되었던 사실 하나를 듣게 되었다.

“공작, 황태자비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

제국 내에 아는 사람이 넷밖에 안 된다는, 로제니아의 임신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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