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순간 알현실의 길고 붉은 카펫 위에 선 제멜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로제니아나 레이어먼을 만났을 때 임신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했던 제멜은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잠시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현재의 그가 입에 담을 수 있는 질문은 얼마 없었다.
“……한데 어찌 제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으신 겁니까?”
레이어먼과 로제니아의 아이라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경사였다. 임신 사실을 안 지 며칠이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외부에 알리지 않았는지 의아스러웠다.
그 질문에 뒤돌아서 있던 황제가 뒷짐 진 손을 살짝 움켜쥐는 게 보였다.
“황태자가 그 아이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어째서입니까?”
제멜이 당황해 물었지만, 질문에 대한 답 대신 황제의 지엄한 명이 이어졌다.
“크레이거 공작, 그대가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제멜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선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소서.”
“황태자비를 남부로 요양 보낼 생각이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공작이 일조했으면 하는군.”
이 순간 제멜은 어째서 황제와 황태자가 매일같이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지 명확하게 이해해 버렸다.
레이어먼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이를 싫어하는 것인지는 미궁 속이었지만.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람이 필요하다.”
황제의 말인즉 로제니아도 출산을 원하고 있으니, 남부로 요양을 보낸 뒤 아이가 유산된 척하다가 낳게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레이어먼을 너무 본격적으로 속이는 내용이라 제멜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만약 아비가 아들에게 하는 못난 짓 역시 패륜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이게 그 경우이지 않을까.
하지만 황태자비도 동의를 했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로제니아의 평소 행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이 문제라면…… 달라질 수도 있다.
게다가 황제 역시 아이가 일단 태어나기만 한다면 황태자가 마지못해서라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제멜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다.
“폐하, 어떤 명인지는 이해했습니다만…… 낮에 보았던 황태자비는 몸이 무척이나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몸을 살짝 튼 황제가 제멜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기울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약간의 비웃음마저 섞여 있었다.
“공작?”
“…….”
“때로는 대의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지 않나. 심지어 황태자비조차도 그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이야.”
반대로 레이어먼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제멜은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레이어먼에게 가장 중요한 이는 바로 로제니아였다. 자신에게 임신 사실을 안 알린 것을 보면, 그는 배 속의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황제는 의지를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 황태자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이 클로델 황가에 기나긴 영광을 가져올 것이네.”
“무슨…….”
“재니스가 그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으니.”
축복을 내려 줘?
황제의 표현을 듣고 제멜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재니스가 신도 아닌데 무슨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제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것을 보며 황제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때문에 뒷말을 듣고 싶어 집중하고 있었던 때였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태자궁에서 말을 전해 왔다 하옵니다.”
“무엇이냐.”
“그것이, 황태자비께서 폐하를 알현하고 싶은데, 몸이 무거워 운신하기가 어려우시다고…….”
시종의 말을 들은 제멜은 낮에 있었던 짧은 독대 때 로제니아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아챘다. 황제가 먼저 남부행을 권했으나, 레이어먼의 반대 때문에 본인이 먼저 허락받는 척하겠다는 그 말 말이다.
황제도 당연히 그것을 알아들었을 터이므로, 황태자비의 무례한 요구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내가 직접 궁으로 가겠다 일러라.”
그러고 그는 알현실의 단에서 내려와 제멜의 앞으로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로 고개를 숙인 제멜에게 황제가 나직이 물었다.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공작?”
질문의 의도는 고민하지 말라는 것임이 분명했으나, 제멜은 원하는 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황제가 내린 명령은 누가 봐도 황태자인 레이어먼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잘 생각하게. 당장은 황태자가 저리 진저리를 쳐도, 아이가 태어나면 서운함 따위 모두 잊을 테니.”
“…….”
글쎄, 레이어먼이 과연 그런 성격이던가.
제멜은 속으로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황제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아들을 속이면서까지 황태자비의 출산을 고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황제의 입장에선 제멜이 주저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직 아이가 없어서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좋네.”
그의 손이 제멜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알현실에 울리는 작은 목소리는, 저녁이라서 그런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황제의 명이 우선인지, 황태자와의 친분이 우선인지 따져도 좋겠지. 물론 황명을 거부하였을 때, 공국의 미래가 어찌 될지 생각해 봐야 하겠지?”
뒤에 덧붙은 건 야비한 협박이었다.
아마 제멜이 더 주저한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짓들을 할지 늘어놓을 것이다. 황제는 대의를 위해서 자신이 악역을 자처할 사람은 아니다.
그냥,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나 황제에게 그런 말을 외칠 수 없었던 제멜은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노을이 지는 느지막한 시간에 편지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제멜에게.
나의 로제니아가 결국 남부로 요양을 가게 되었네.
본래 미아블레 가문의 별장이라고 하는데, 그곳으로 그녀가 떠나면 아마 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
이틀 연속으로 황태자궁에 불러들이는 대신 레이어먼은 편지에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남부로 내려가고 싶다는 로제니아의 결정이 본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불안감을 일으키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언뜻 보면 엄살이 가득한 편지라 보고서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멜의 표정은 굳어 갔다.
하루 만에 온 길고 긴 편지에는 로제니아의 임신 얘기가 적혀 있지 않았다. 역시나 레이어먼은 아이를 낳길 원하지 않는다는 간접적인 신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제멜의 기분을 더 가라앉게 하는 건, 임신 사실 자체를 숨기려 하는 레이어먼의 태도였다.
제 감정은 토해 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 레이어먼의 이 이중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제멜은 속에서 서운함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서운함은 점차 의심으로 변모해 갔다.
그동안 제가 느꼈던 레이어먼의 신뢰는, 각자의 위치나 신분조차 둘 사이를 흔들 수 없다고 믿었던 굳건한 신의는…….
사실, 가짜였던 게 아닐까.
차라리 고민하고 있는 걸 제게 모두, 진실하게 말해 주었더라면 제멜은 제게 올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이어먼의 편을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편지를 내려놓았을 때 제멜은 레이어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려 버리고 말았다.
〈황태자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이 클로델 황가에 기나긴 영광을 가져올 것이네.〉
〈황제의 명이 우선인지, 황태자와의 친분이 우선인지 따져도 좋겠지.〉
사실상 이대로 황손을 잃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 존재하긴 할까.
만약 로제니아가 정말로 출산하다가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아이가 어머니를 집어삼키고 태어났다는 오명을 쓸지언정 황실은 귀한 후계자를 얻게 된다.
재니스가 내렸다는 ‘축복’이 뭔지 몰라 그것이 내심 걸리긴 했으나, 제멜은 곧 그러한 고민을 한구석에 치워 버렸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했으니까.
나쁜 일이라면 그런 표현을 쓸 리 없다고 짐작했다.
제멜은 레이어먼에게 대충 위로하는 말을 휘갈겨 써서 답장을 보낸 뒤, 황제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남부의 별장에 공작가의 기사 몇 명과 하인을 보낼 테니 알아서 부리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황제는 제멜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길 원하는 듯했으나, 레이어먼과의 마지막 의리로 거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제게도 다른 바쁜 일들이 산적했기 때문에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후로 로제니아가 어떻게 됐는지, 제멜은 철저하게 관심을 끊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황제가 작정하고 그쪽 일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레이어먼의 편지가 끊겼다. 아주 작은 징후였지만 제멜은 그가 자신이 황제의 계획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 * *
몇 개월이 흐른 후.
원래라면 로제니아의 배 속에 있을 아이가 밖으로 나올 시기가 되었지만, 황손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로제니아 역시 아직은 남부에서 요양 중이었다.
다만 그사이 아주 큰 변화가 일었는데, 레이어먼이 돌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어디 아픈 데 없이 멀쩡하던 황제가 쓰러졌다고 했다.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라고.
갑작스럽게 날아든 그 소식에 당황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제멜 역시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기가 되어 공국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황도로 돌아왔을 때였다.
보고를 듣는 내내 무표정하게 있던 레이어먼은 제멜을 따로 황태자궁에 불러들였고, 보자마자 발로 사납게 걷어차 버렸다.
딱딱한 구두 끝으로 발을 가격당한 제멜이 바닥에 쓰러져 커억, 하고 숨을 들이켰을 때였다. 레이어먼이 분노가 시퍼렇게 번뜩이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제멜.”
“……허억, 예, 전하…….”
제멜은 힘겹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고 나서야 방 안에 레이어먼 혼자 있는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레이어먼의 뒤에는 케이프를 뒤집어쓴, 재니스와 마리엘이 있었다.
‘마탑주, 라니…….’
재니스는 황제의 사람 아니었나?
어떻게 된 상황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에게 상황 파악을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레이어먼이 그의 목 앞에 서늘한 칼끝을 가져다 대었기 때문이었다. 제멜은 흰빛이 피어오르는 기다란 검신을 보면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을 때였다.
“네놈이, 감히 날 기만해? 네가, 네가 감히 나의 로제니아를 건드려?”
“…….”
“네놈 때문에 모든 걸 망쳤어!”
“아이가 태어났구나.”
제멜은 레이어먼의 외침에서 그런 사실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레이어먼은 더욱 분노해 날뛰었다.
차아앙!
옆의 탁자에 놓여 있던 꽃병이 집어 던져졌다.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사납게 일었다.
“네놈이, 저 빌어먹을 황제랑 손잡고 감히 나의 로제니아를 그따위로 이용해 먹어? 그 저주받은 새끼를 만들려고! 로제니아를 사지로 몰아!”
“……저주?”
제멜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연신 의문을 떠올리는데, 재니스가 앞으로 나서서 끼어들었다. 그가 제멜의 뒤로 걸어오더니 귓가에 대고 말소리를 흘렸다.
“보아하니 공작께서도 내용을 잘 모르셨나 보군요?”
“……?”
“그 아이는 이 재니스의 마나로 빚어진 아이랍니다. 어쩐지 금지된 마법에 관심이 많으시다 했는데 비겁하게도, 황제께서 편법을 써서 괴물 한 마리를 만들고 싶어 하셨지 뭡니까?”
“무슨 소리지, 그게?”
금지된 마법? 괴물? 게다가 아이가 재니스의 마나로 빚어졌다니.
제멜로서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여 의아해하며 되묻자 재니스가 좀 더 쉬운 언어로 정리해 주었다.
“무슨 소리긴요. 황태자비에게 독을 먹인 건 3황자나 4황자가 아니라 사실은 황제 폐하였다는 소리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멜은 깨닫고 말았다.
〈흔들리지 말고 잘 중재해 주세요.〉
제가 로제니아의 의도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 탓에 그 교활한 황제에게 완전히 이용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