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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2)화 (152/317)

* * * 

결코 짧지 않았던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자 안 그래도 조용했던 대서재 안의 소리는 쥐 죽은 듯 가라앉아 버렸다.

그 짙은 침묵을 깬 건 아까부터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던 이온의 기침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소리를 낸 것 역시 그 자신이었다.

“운이 안 좋으셨네요.”

아버지의 일이었지만 이온의 평가는 퍽 냉정했다.

하지만 운이 안 좋다, 진짜로 그 이상으로는 말하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그가 말한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이라면 크레이거 공작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상대방들의 화법에 놀아난 셈이었다.

그런데 공작은 이온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내 탓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공작의 중얼거림에 대꾸한 것은 이온이 아니라 뒤로 갈수록 조용해졌던 카밀루스였다.

말하는 중간쯤부터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누르던 공작이 이번에도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 짚으며 대답했다.

“사안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겁니다. 과연 당시의 선황이 후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대하는 거라면…….”

그러다 카밀루스의 입꼬리가 내려앉는 것을 발견한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음성이 그치자, 카밀루스는 눈썹을 까딱하며 뒷말을 채근했다.

“계속하지.”

“……단순한 황태자비의 환후 이상의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야 하지요. 심지어 공국의 미래가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뒷이야기가 더 있었다.

레이어먼은 로제니아가 요양을 간 뒤 그녀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원래 요양을 하려던 별장에는 그녀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선대 황제는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 로제니아의 행방을 숨겼고, 그런 그녀를 찾기 위해서 레이어먼은 수개월 동안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그 탓에 공작이 선선대 황제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터였다.

레이어먼으로서는 공작이 로제니아의 임신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굳이 그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한다.

한데 이미 그 친구는 자신의 상대편에 서서 아주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렸으니 분노가 더욱 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로제니아가 요양지에서 돌아오고, 도저히 아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레어먼과의 깊은 갈등으로 인하여 결국 자살까지 해 버렸으니 제가 한 행동의 파급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공작으로서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이어먼과 관계 역시 이전과 같이 유지될 수 없었다.

몇 개월 뒤 선선대 황제의 급작스러운 서거 소식과 함께 황위에 오른 레이어먼은 이전에 공작이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것이 나비 효과인가……. 그대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행한 배반이, 황후의 죽음까지 불러왔으니?〉

로제니아를 잃은 레이어먼에게는 아무래도 증오의 대상이 필요해 보였다.

겉으로나마 원만하게 살아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제 선선대 황제조차 떠났으니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공작이 가장 잘못이 명확하면서도 쉽게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여 레이어먼이 황제가 된 뒤 크레이거 공작에게 한 그 말에, 공작은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답했었다.

〈다시는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황제 폐하. 두 번의 배반은 없을 것입니다.〉

〈불신하는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는 걸 배반이라고 하지는 않지.〉

하지만 크레이거 공작의 말을 냉정히 갈음한 레이어먼은 세상에서 가장 불합리한 명을 내렸다.

〈가까이 있되 내 눈엔 띄지 말도록, 철저히 복종하되 내가 내린 그 어떤 결정에도 관여하지 않도록. 그것만 지켜 준다면 공국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어차피 크게 바뀌는 건 없어. 크레이거 가문은 원래도 황실의 개가 아니었던가, 공작?〉

그 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선선대 황제에게 충성한 게 아니었냐는 의미의 눈빛이 제게 와닿았을 때,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온이 막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렀다.

“대공.”

부름에 반응한 카밀루스가 이온에게로 눈길을 향한 잠시간,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 이온이 그를 쫓아갈 생각으로 일어나려고 하자 공작이 옆에서 손을 덜컥 잡아 왔고, 페드로 역시 앞을 막았다.

이온이 주춤한 사이 페드로가 다소 완고한 어투로 상황을 정리했다.

“대공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대화는 내일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공작.”

“……그래, 시간도 늦었지 않니.”

공작도 거드는 소리에 이온이 카밀루스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혼자 가 버릴 거냐고 눈으로 묻자, 발걸음을 떼려던 카밀루스가 결국 페드로를 옆으로 물러나게 한 뒤 이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온을 붙잡은 공작의 손 위에 제 손도 얹더니, 잘 붙들고 있으라는 듯 그것을 꽉 쥐었다.

“내일 아침에 먼저 찾아가겠습니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이 행동이 제 나름대로 최대한 부드럽게 거절의 뜻을 표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 뜻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을 눈에 담은 채 바라보았으나 카밀루스는 이온의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살며시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소공작도 너무 오래 깨 있으면 힘들 테니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요.”

“…….”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이온도 더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카밀루스의 목소리도,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표정이 엉망이었다. 이온에게 큰 이상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억지로 웃는 얼굴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카밀루스도 그런 제 모습을 이온에게 오래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와닿아 이온이 더는 붙잡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이니, 그제야 카밀루스는 고개를 까딱한 뒤 뒤돌아섰다.

대서재를 가로지르던 발소리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 * *

페드로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본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카밀루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바쁘게 놀렸다.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번갈아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국 페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 공작의 이야기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시는 게…….”

한 문장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카밀루스가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알아.”

그러니까 지금은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페드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에 도착하고 완전히 지쳐 버린 사람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카밀루스는 곧장 불편한 겉옷을 벗고 목을 조이던 드레스 셔츠의 단추도 몇 개 풀었다.

그런 뒤 다소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늘어지는 그의 옆으로 다가온 페드로는 옷을 받아 들어 뒤쪽의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그동안 괜히 눈치를 살피던 페드로가 카밀루스가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낌새를 보이자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말꼬를 튼 것은 페드로가 아니라 카밀루스였다.

“공작한테 더 캐낼 건 없어 보인다.”

카밀루스에게서 이런저런 고민 어린 말을 들으면서 밤을 새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골방에 사는 삼촌 같은 생각을 하던 페드로는 첫마디를 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다가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적절한 대꾸를 찾기 위해 얼른 머리를 굴렸다.

“오래된 일이라 그런지 공작의 기억이 그렇게 자세해 보이지 않기는 했습니다.”

“그것도 문제기는 했지만 공작도 중간에 말했듯이 흐름 파악에 문제가 있었던 거 같더군. 특히 재니스에 대해서는.”

그러고는 카밀루스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스스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재니스라는 이름만 나와도 카밀루스는 심장이 죄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는 거의 조건반사와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학대의 주범이 바로 선황과 재니스였으니.

페드로도 그걸 알고 있기에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대공께선 역시 마탑주가 핵심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애초에 공작의 이야기엔 모순이 있다. 어머니의 몸에 걸린 게 저주였다면 재니스가 선선대 황제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갔을 리 없어. 재니스 정도 되는 마법사가 저주 자체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구분을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니.”

카밀루스의 지적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페드로는 문득 가슴 서늘해지는 추측 하나가 떠올라 카밀루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공, 만약 당시 로제니아 황후께서 저주에 걸린 게 맞는다면 혹시 소공작의 저주와…… 같을 확률도 있는 것 아닙니까?”

“…….”

질문이 끝난 순간 카밀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페드로가 제가 괜한 말을 했나 살짝 후회할 무렵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밀루스와 페드로의 얼굴이 동시에 문 쪽으로 돌아갔다. 이 시각에, 그것도 이 시점에 카밀루스의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하지만 대서재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보면 크레이거 공작일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밀루스가 일어나 직접 문을 여니 복도엔 예상대로의 인물이 있었다.

이온이었다.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두 팔로 요즘따라 눈에 띄게 커진 욤뇽이를 안은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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