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들어 낸 것치고 형편없는 대꾸라 이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사귀는 거 진짜 맞느냐니. 자기가 들은 게 진짜 맞느냐고 되묻고 싶은 지경이다.
이온이 굳어 있자 카밀루스가 눈치를 살피다가 딱딱하게 웃었다. 그러고 이온의 날 선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
진짜로 못 말리겠다.
이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밀루스,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 했지?”
“……후작 저에서는 안 이랬어.”
덧붙이는 말에 이온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따끔한 시선을 받은 카밀루스는 또다시 변명을 생각해 내려고 열심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이온의 귀에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에 이온은 제 안에서 꿈틀대는 본능을 억눌렀다.
‘그만 잡자, 이온 크레이거…….’
이래서야 꼭 엄처시하에서 기 못 펴고 사는 남편 꼴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덩치는 커다래서는 제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없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모양새는 좋지 못했다.
하여 이온은 까끌거리는 목을 큼, 큼, 하고 푼 뒤 그만 본론으로 돌아갔다.
“걱정돼서 찾아온 거 맞아. 근데 침울해져 있을까 봐가 아니라 죄책감 느끼고 있을까 봐. 그거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온 거야. 그런 건 당사자가 직접 말해 주지 않으면 멈추기 힘들잖아.”
이온의 말이 영 의외였던 것인지, 얼굴을 든 카밀루스의 표정이 좀 묘해져 있었다. 그에 이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질문을 덧붙였다.
“혹시 내가 생각한 게 틀렸어?”
“……아니, 맞아.”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루스가 공작에게 약병 모양을 그리라고 한 시점부터 이온은 곧장 제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병을 떠올렸다.
엄청난 마기가 담겨 있다는 그…….
아직 중간 고리가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명확하게 연관 지을 수 없지만, 카밀루스도 쉽게 추론해 냈을 것이다.
이온의 저주에 어떤 방식으로든 재니스가 개입했다는 것을 말이다.
재니스가 선선황의 사람인지, 아니면 선황의 사람인지 특정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그 뒤의 카밀루스가 어떤 생각을 할지,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야 아주 쉬운 일이었다.
또 자신과의 인연만 아니라면 이온이 저주에 걸렸을 리 없었을 거라고 땅 파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방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온은 제 품의 욤뇽이를 들어 올려 보이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욤뇽이한테 다시 물어봤는데 여전히 그 약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대. 그렇지?”
“꾸!”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욤뇽이가 이온의 물음에 눈을 반짝 뜨며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질문을 안 듣고 무조건 그렇다고 한 게 아닐까 심히 의심되는 대목이었으나 이온은 좋은 게 좋은 거려니 하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품에서 다시 순식간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드는 욤뇽이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탑에서 빠져나왔을 때 선황이 너한테 저주 약을 강제로 먹였다고 하면……?”
그걸 염려하고 있었던 건가.
탑을 빠져나왔을 당시 이온뿐 아니라 카밀루스도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공백이 있었던 동안 제삼자가 무슨 짓을 했을 확률은 아주 높았다.
하지만 그도 카밀루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아니다.
“그랬으면 당연히 내 저주는 네 탓이 아니잖아.”
한데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한 카밀루스가 불쑥 물어 왔다.
“이온, 역시 그때의 기억은 전혀 없어?”
순간 이온은 움찔했다.
여태껏 카밀루스가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부분이었다.
설마 이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을 리는 없으니 의식적으로 피해 온 질문이었을 게 분명한데, 이 시점에 들려올 줄은 몰랐던 터라 이온은 당황했다.
뜨끔하기도 했고.
하여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 가슴을 진정시킨 이온이 천천히 대꾸했다.
“응…… 전혀.”
카밀루스의 약간 실망한 표정을 보며 이온은 주저하며 덧붙였다.
“내 머릿속엔 지난 8년간의 기억밖에 없어.”
제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다음부터의 기억밖에는.
아주 예전에 일부 기억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 뭔지도 아직 잘 몰랐고.
‘아마 탑에 가는 거나 □□와 만나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한데 이온의 기억이 없다는 말에 미간을 일그러뜨린 카밀루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듣는 이마저도 그 답답함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될 정도로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온이 그에 제가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돌연 이온을 확 껴안았다.
“미안해, 이온.”
전혀 의외의 반응이 뒤따라오자 이온은 놀라 카밀루스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파란색 홍채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온은 입을 열려다가 말고 제 팔 안에서 아직 쿨쿨 자고 있는 욤뇽이의 존재를 깨닫고는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녀석을 받아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 잠시의 틈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이온이 입을 열었다.
“내 기억이 사라진 것도 네 탓이 아닌데 왜 사과하는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카밀루스의 말은 이번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이었다.
그가 무릎 위에 올려진 이온의 손을 꽉 잡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진지한 눈빛을 한 채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내 잘못이 맞는 것 같아. 아마, 맞을 거야.”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이온은 혼란스러웠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내가, 예전에.”
“예전에……?”
이온의 초록빛 눈동자에 깊은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냐고. 그리고 예전은 언제를 가리킴이냐고.
카밀루스는 그런 이온을 내려다보며 입이 마르는 모양이었다. 목울대를 한 번 오르내리게 한 그가 천천히 긴장된 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속에 담긴 말들을 꺼내기가 주저되는지 단어마다 약간의 떨림이 함께했다.
“마법을 썼었는데, 그게 잘못됐던 것 같아. 그래서 뭔가 꼬인 게 아닌가 하고…….”
“그게 대체.”
전혀 생소한 이야기에 이온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눈으로 그렇게 묻자 카밀루스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탄식이 들려왔다.
돌아온 반응은 그뿐이었으니, 이온은 근거 없는 추론을 머릿속으로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고 하면, 당연히 제 기억이 없는 어렸을 때를 가리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저주에 걸리기 전일 터인데, 그가 제게 걸었을 마법이 뭐였을지 짐작이 안 됐다.
게다가 카밀루스가 마법을 ‘잘못’ 쓴다니. 이온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고위 마법이었던 걸까.
아니, 그보다…….
이온은 8년 전,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당시에는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하면서도 그냥 넘어갔던 것이, 카밀루스의 이 말을 들으니 꽤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내가 기억이 없다고 했을 때 그냥 넘어갔던 거였던 거야?”
〈……실망하지 않아.〉
카밀루스는 그때 아주 서운해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이온은 그게 단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방금 카밀루스의 그 말은, 이온의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온의 질문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아마도.”
참으로 애매한 대꾸였다. 그러나 그 짧은 한 단어에 위력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내뱉어진 순간, 두 사람은 침묵에 휩싸였다.
다만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이유는 서로 달랐다.
카밀루스는 죄책감 때문이었지만, 이온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한 그에게 뭐라 대꾸할 말을 잃은 거였다.
어떤 마법을 쓴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마법을 잘못 썼다고 해도 그 결과 이 몸에 다른 영혼을 불러올 수 있는 걸까.
이온은 그게 마법의 영역이 맞기는 한 건지 몹시 의문스러웠다.
무엇보다 자신은, ‘문’을 통과해 온 사람이었다.
눈을 뜨기 전, 그리고 간혹 의식을 잃을 때 ‘문’에 대한 꿈을 꾸곤 한다. 그 꿈은 온통 의문투성이였으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 몸은 제가 들어온 이 몸과는 달랐다.
하지만 이온은 그 사실을 카밀루스에게 전하지 못했다. 크게 마음먹으려고 해도 빌어먹을 ‘금어’ 때문에 그 관련하여서는 말이 나가질 않으니 말이다.
자연스레 속사정을 알 수가 없는 카밀루스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볼 때마다 내가 널 속이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그래서 네 앞에서 자신 있게 있을 수가 없었어.”
카밀루스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괜히 제 가슴이 뜨끔해진 이온이었다.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은 제가 아님에도, 기묘한 미안함이 일었다.
저절로 토해지려는 한숨을 참은 이온이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래, 그래서 그게 무슨 마법이었는데?”
카밀루스가 곧장 대답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온은 혹시나 하찮은 거면 가만 안 둔다, 그렇게 오기 어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꽤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서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몇 번을 달싹이기만 하다가 도로 닫히는 입술을 보면서 이온이 미간을 좁혔다.
“카밀루스?”
왜 말 안 하냐고 재촉을 하자 카밀루스가 슬쩍 제 오른손으로 주먹을 지그시 쥐는 게 보였다.
이어 눈을 내리깔고 그가 내뱉은 말은 이온으로서도 조금 수상하게 해석되는 한마디였다.
“말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