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해.”
몇 번을 주저하다가 나온 대답이었다.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이온은 눈을 깜빡이다가 왜냐고 묻는 대신 이름을 살며시 불렀다.
“……카밀루스.”
카밀루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몹시 불충분한 대답이라는 건 알았을 터였다.
그래서 은근히 눈으로 압박하는데도 더는 입을 벙긋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진짜 어지간히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여 이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하나씩 캐묻기 시작했다.
“금지 마법이야?”
“그래.”
움찔하던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으면서도 성실한 카밀루스가 설마 그랬겠냐 싶었는데 긍정을 해 오니 당황한 탓이었다.
“진짜로?”
“응…….”
“그럼 혹시 그 마법이.”
뒷걸음 치다가 요행히 맞혔으니 두 번째에도 혹시나 맞을지도 몰랐다. 이온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물었다.
“그 마법이 차원 이동 마법이라든가.”
“…….”
“…….”
“…….”
“아니야?”
이번에도 맞혔다는 말을 기대하던 이온은 카밀루스의 굳었던 표정이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야. 내가 그런 마법을 왜 해? 애초에 다른 차원이 실제로 있는 건지도 모르고.”
단호한 반응에 이온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꽤 괜찮은 가설이라고 생각했는데.’
탑에 갇혀 있는 카밀루스라면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차원 이동에 대해서 진지한 개소리를 적은 책들을 펴 내는 마법사들의 수가 의외로 꽤 됐다. 마탑의 괴짜들 중에는 자신이 실제로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했고.
그들은 말도 안 되게 다녀온 그 세계는 마법 없이도 인간이 강철로 된 인공 새에 수십 명씩 몸을 싣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더라고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했다.
물론 이온도 그들의 주장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제가 오답을 말했다는 것은 억울해 카밀루스에게 괜히 투덜댔다.
“근데 그게 아니면 뭐야?”
그에 카밀루스가 이온을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말할 수 있을 때 꼭 말해 줄게.”
“…….”
이온은 다정한 손길을 받으면서도 불만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냐고 몸이라도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참자, 참아야지.’
이온 자신이야 가끔 속에서 울컥해서 불같아질 때도 있지만, 카밀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몹시 신중한 성격이다.
그러니 괜스레 말도 못 한다는 걸 추궁해서 마음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아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참고 다른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사실 무슨 마법이든 그 이름이 상관인가.
예의 잘못 시전된 마법의 결과, 자기가 기억을 잃은 것―사실은 영혼이 바뀐 것―과의 인과관계가 더 중요하지.
“그럼 그 마법 때문에 내가 기억을 잃은 건 확실하고?”
“그렇게 물으면 그건 나도 정확하지 않아.”
역시나.
예상대로의 대답에 이온은 마음이 짜게 식어 버렸다.
[상태 이상: 기억 상실. 이전의 기억이 없음. ※본 페널티는 특정한 조건을 달성할 시 해제됩니다.]
[상태 이상: 적의…….]
[…….]
상태 이상 목록 전부를 불러와 살펴봐도 특이 사항은 없었다. 하여 지금까지 파악 못 한 히든 상태 이상이 있나 싶어 체크해 보았다.
[상태 이상(Hidden): 마나 소실.]
[상태 이상(Hidden): 절대 행운.]
둘뿐이다. 이미 다 본 것들이었고.
이걸 보고 더 추론할 여지가 있나 싶었던 그 순간이었다. 복잡했던 시스템창이 일시에 다 꺼지더니 한 줄의 메시지를 띄웠다.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
이전에도 봤던 메시지였다. 그때는 영문을 전혀 몰라서 혼란스럽기만 했는데.
이 메시지가 떴던 때의 상황을 떠올리던 이온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어졌다.
‘설마, 시스템이 카밀루스랑 연관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카밀루스가 제 결백을 알리고 싶은 듯 이온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꽤 간절한 어투로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게 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고 확신해. 그러니 신뢰는 안 가겠지만 날 믿어 주면 안 될까?”
“…….”
이온은 유난히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질문에 카밀루스가 지금껏 그들 관계에서 왜 자꾸 전전긍긍했는지 깨달았다.
숨기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온이 돌변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될 거라고.
그 마음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아는 이온은 카밀루스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카밀루스. 그러니까 넌 그런 비밀이 있는 상태로는 우리가 못 사귈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괜찮아?”
이온은 카밀루스의 눈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고작 이런 걸로 고민하다니, 카밀루스는 역시…….
‘너무 착하잖아.’
카밀루스를 보다 보면 가끔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이온은 제 민망함을 숨기려 눈을 꽉 감고 카밀루스에게로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맞닿은 입술로 그가 살며시 떨고 있음이 느껴졌다. 체온이 멀어지자 카밀루스가 양 볼을 붉혔다.
“이온.”
“겨우 그런 걸로 지금까지 혼자서 고민했던 거야?”
“……날 믿어 주겠다는 의미인가?”
믿어 주겠냐고?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받으며 웃었다.
“내가 널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어? 지금 내 목숨, 너한테 달려 있는데.”
카밀루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전부 말해 주지 않아도 저를 신뢰해 주겠다는 이온에게 감동을 한 것 같았다.
이온은 그런 카밀루스를 보면서 약간, 괴로워졌다.
“나중에, 나중에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꼭 전부 다 밝힐게. 약속해.”
카밀루스가 하는 이런 약속조차 자신은 할 수 없어서.
아마 카밀루스가 시전했다는 그 마법이 무엇이든, 자신이 숨긴 비밀보다 더 엄청난 것은 분명 아닐 터였다.
그래도 네가 그걸 말해 주는 날엔 나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이 시스템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일까.
아니, 내가 말할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을까.
사실 자신은 시스템이 걸어 둔 상태 이상 ‘금어’에 기대어서 제 죄책감을 희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비겁하게도.
“다 알고 나서…… 네가 날 벌하면 달게 받을게.”
너야말로 나를 벌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카밀루스가 온전한 자신을 사랑하게 하겠다고 결심하면서 단단해졌던 마음이 다시 불안으로 일렁였다.
‘사랑이 진해질수록 더 불안해지는 건 오히려 나야.’
그런 걸 생각하면 당장 파국을 맞더라도 지금 말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카밀루스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니 이런 자신이라도 받아들여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때문에 헤어지게 될지라도, 그간 쌓아 온 정이 있으니 나를 그리워해 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책임감으로라도 옆에 있어 줄지도.
그의 동정심에 기대는 것 자체가 웃기지만 이온은 그것이 가능성이 꽤 높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상태 이상: 금어]
[상태 이상: 금어]
[상태 이상: 금어]
[…….]
이온은 제 눈앞에 나타났다가 빠르게 소멸해 가는 시스템창을 노려보다가 카밀루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온이 눈을 곱게 휘면서 속삭였다.
“죄책감 가지지 마. 그런 게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거 싫어.”
카밀루스는 완전히 안심한 듯했다. 그가 두 팔로 이온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이온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훨씬 더 생기 있게 반짝이는 중이었다.
“……이온, 날 그만큼 사랑해?”
재차 확인받아 더 큰 희열을 느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온은 푹 웃으며 그의 허벅지 위에 제 몸을 올렸다.
헐렁하고 얇은 잠옷의 천 너머로 그가 얼마나 흥분해 버렸는지 느꼈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자세를 취했다.
사실 카밀루스가 실의에 빠져 있으면 몸으로라도 달래 줄 요량으로 왔던 터였다. 이온은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자신에게 더 단단히 묶어 두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이 말은 카밀루스가 더는 딴생각을 못하게 해 줄 거다.
“널 선택하려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몇 개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카밀루스의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온은 실제로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다.
공작위를 포기해야 했고, 그의 편이 되면서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정치적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 이외에도 여러 불편 사항이 생길 거였다.
“알아, 알아, 이온.”
이온의 지적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 카밀루스가 이온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현실감이 너무 없었나 봐. 네 말대로 넌, 너는 이미 전부 걸었는데.”
미안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기쁨이 더 많이 묻어났다.
그가 이온 크레이거를 얼마나 원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만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네가 건 그것들, 아무것도 잃지 않게 해 줄게.”
다부지게 맹세하는 카밀루스의 팔이 이온의 몸을 단단히 조여 왔다.
이번엔 그가 이온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게 할게. 꼭, 반드시.”
그러고 손이 제 옷 아래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이온이 흠칫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제 사타구니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카밀루스의 기세에, 눈짓으로 탁자 위에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쿨쿨 자는 욤뇽이를 눈짓했다.
“저 녀석 깨면 어떡해?”
“다시 기절시키면 되지.”
“이러다 진짜 쫓겨나, 너…….”
앞섶의 단추가 투둑, 투둑 풀어졌다. 잠옷을 찢지 않은 게 다행 아닌가 싶을 만큼 급하게 말이다.
“그럼 네가 매일 날 찾아오면 되잖아.”
“……쫓겨나면 잘 데는 있고?”
“명색이 대공인데 그거 하나가 없을까.”
이 집에 눌러앉은 건 능력 없어서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반문에 이온이 한마디 했다.
“사기꾼.”
이어 이온의 몸이 소파 위로 허물어졌다.
어제의 느낌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경계심은 곧 일탈의 쾌감에 묻혔다.
그를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