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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6)화 (156/317)

* * *

“도련님. 도련님?”

달칵.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에렌스트 경이 이온의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늦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이온은 어쩐 일인지 침대 위에 보이지 않았다.

에렌스트 경은 혹시나 싶어 집무실과 발코니를 살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손에 든 것 중 에밀리가 챙겨 주었던 음식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에렌스트 경이 도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카밀루스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다행히 이 방 주인은 깨 있었던지 금세 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열린 문 틈으로 안의 상황을 본 에렌스트 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의 상황의 얼마나 당혹스럽든 상관없이 일단 예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라 그는 허리를 숙였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적당히 눈인사를 해 왔다. 소음이 이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밀루스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 안에서 잠든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일반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의 카밀루스는 상의를 벗은 채였다.

남자의 단단한 가슴 근육 따위 보고 싶디 않았던 에렌스트 경은 그야말로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이온의 옷이 방문 앞에 나뒹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서는 더더욱.

미간을 살며시 구긴 에렌스트 경이 문을 탁, 닫고는 이온의 옷가지를 줍고 있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이온을 깨우기 시작했다.

“이온.”

아주 녹아들 듯 다정한 음성. 고개를 숙여 귓가에 나직나직하게 속삭이는 그 모습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평소 에렌스트 경이 깨우면 꽤 오래간 반응이 없는 이온이 카밀루스의 음성엔 곧장 눈알을 굴리기 시작하더니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응…….”

햇살을 받으면 맑은 보석처럼 보이는 초록빛 눈이 긴 속눈썹 아래로 드러나자 카밀루스가 미소 지었다. 정말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일어나야지. 에렌스트 경이 찾아왔어.”

“알렉?”

“그래.”

아직 비몽사몽인 상태로 대꾸하던 이온은 카밀루스와 방 천장을 보다가 뒤늦게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는지 벌떡 일어났다.

“알렉……! 읍, 콜록, 콜록!”

갑자기 소리를 지른 탓에 소리가 갈라진 건 둘째 치고, 목이 아파 기침이 쏟아졌다. 그에 이온이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안색이 새빨개질 때까지 몸을 들썩이자 카밀루스가 등을 두드렸다.

“이온, 괜찮아?”

“아, 괜찮…… 큽.”

한마디를 채 내뱉지 못하고 또 쿨럭거리던 이온은 문득 어깨가 서늘한 걸 느꼈다. 때마침 카밀루스가 이불을 제 것까지 끌어다 덮어 주었지만, 이온의 표정이 순간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때부터 제 옆에서 상의 탈의를 하고 있는 카밀루스와 아까부터 아무 반응이 없는 에렌스트 경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이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동자에 에렌스트 경이 비쳤을 때였다. 한쪽 팔에 이온의 옷가지들을 걸쳐 둔 그가 딱딱한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에 든 편지를 내보였다.

“폐하께서 도련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이 카밀루스와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굳이 묻지 않고도 훤히 알아 버렸다.

침대 위에서 나란히 잠든 옷을 벗은 두 사람이 전날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하여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아버지한텐 말하지 마…….”

물론 옆에 있는 카밀루스의 얼굴에선 위기감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에렌스트 경은 그에 제 새끼 뺏긴 캥거루의 심정이 되어 카밀루스를 노려보았다.

* * *

일단 에렌스트 경과 함께 후다닥 제 방으로 돌아온 이온은 집무실 문을 닫고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소파에 앉아 갈아입으며 제 몸을 내려다보는 동안 다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카밀루스가 간밤에 또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둔 탓이었다. 그렇지만 에렌스트 경의 오해와 달리 밤사이 전날 있었던 허리의 둔통은 좀 더 가신 채였다.

또 잔뜩 고양시켜 놓고, 카밀루스는 결국 끝까지 가지 않았다.

〈하다가 기절했잖아.〉

이온이 전날 마지막에 의식을 잃은 것 때문이라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사실 한 달이라는 기간도 처음엔 반년이라고 했는데 이온이 줄이고 줄인 결과였다.

간밤의 일을 떠올리니 우울해진 이온이 입술을 꾹 닫고 내밀었다.

‘저주가 풀리면 건강해지긴 하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자 시스템이 몇 가지 창을 띄웠다.

[□□의 저주가 해제되었을 시 플레이어에게 후유증이 남을 확률은 99.9%입니다.]

“……차라리 0.1도 없다고 하지, 왜.”

중얼거린 이온은 그것만으로 목이 아파 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평소보다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꼭 몸살이라도 올 것 같았다.

이런 추측을 할 때엔 대부분 맞으니 오후엔 앓아누울 확률이 높았다. 오늘은 활동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이온은 옷을 모두 갈아입은 뒤, 옷걸이에서 털 망토를 찾아 두른 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거기엔 황궁에서 보냈다는 편지를 든 에렌스트 경과 함께 이미 정복을 차려입은 카밀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들어와도 돼.”

이온의 허락에 두 남자가 모두 집무실로 들어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밀루스 옆에 앉자 카밀루스가 얼굴이 살짝 익은 이온을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열 있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아직은.

그런 말을 삼키며 시스템창을 확인하니 최근 20퍼센트 안팎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걸 고려하면, 평소보다 조금 높다고 볼 수 있는 사망 확률이 체크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6%입니다.]

10퍼센트도 여유가 없는 것에 약간 초조해진 이온이 에렌스트 경을 채근했다.

“편지 이리 줘 봐.”

“……대공께서 같이 보시게 될 텐데요.”

“상관없어.”

그래도 황실에서 온 편지인데 제삼자가 봐도 되느냐는 물음을 일축한 이온이 그에게서 흰 봉투를 건네받아 잘 굳힌 실을 뜯었다.

친애하는 이온 크레이거에게.

하…….

첫 줄을 보는 순간 이온과 카밀루스에게서 동시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특히나 카밀루스는 일전의 제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수작질을 부려 오는 버니언에게 진심으로 살해 충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온에게 보내온 것치고 버니언의 오늘 편지는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다. 비록 말투는 크레이거 공작에게 보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의 없었지만.

그제에 네가 솔친 후작가에 비렌시움 대공과 함께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크레이거 가문의 후계자로서 네가 그곳에 방문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 이온 크레이거가 설마 그렇게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야.

게다가 난 널 배려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인데…… 내가 널 불러들이지 않는 이유를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한 게 아닌가 싶더군.

이온 크레이거, 난 아직 널 신뢰하고 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보고 내게 해명을 하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

그러고 보니 기쁜 소식도 있군.

네 저주를 극단적으로 억제할 방법을 재니스가 알고 있다.

대놓고 당장 달려오라고 하기엔 체면이 구겨지니 덧붙인 마지막 줄을 보고선 이온은 미간을 좁혔다.

“극단적으로 억제할 방법……?”

해제할 방법이야 □□를 죽이는 것뿐이라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으니, 만약 해제 방법을 알고 있다고 써 놨으면 오히려 관심이 안 갔을 텐데.

하지만 억제 방법이라 하니 오히려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이온이 편지를 다 읽고 고민하는 것 같자 카밀루스가 딱 잘라 말했다.

“가지 마.”

이온은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온의 고민 지점은 가냐 안 가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 가면 몸 달아서 사람을 보내든 먼저 찾아오든 할 테니 굳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먼저 고개를 들이밀 필요는 없지. 그런데 카밀루스…….”

이온이 편지를 내려 둔 뒤 부르는 소리에 카밀루스가 눈을 마주쳐 왔다.

“응?”

이온은 그의 파란 눈동자를 곁눈으로 흘기며 넌지시 물었다.

“너, 버니언과의 내기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다시 말하면 날 버니언에게 순순히 넘길 거냐는 물음처럼 들려오는 그 질문에, 카밀루스는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나름대로 찾고는 있는데?”

“네 기사들을 시켜서?”

“그래.”

두 번째 대꾸는 꽤 태연히 나온 것 같았지만 이온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아니, 다음 말을 듣고 카밀루스는 이온이 사실상 제게 ‘속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대공께선 거짓말하는 법부터 배우셔야겠습니다. 너도 동의하지, 알렉?”

갑자기 공을 넘겨받은 에렌스트 경의 반응까지 보니 그것은 확실해졌다.

“그러신 것 같군요.”

카밀루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다가 이내 저희들 사이에 오간 간밤의 화두에 묻힌,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스타틴, 그자의 방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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