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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7)화 (157/317)

카밀루스는 제가 설마 이런 걸로 추궁당할 줄 몰랐기 때문에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타틴, 그자랑 무슨 대화를 했어?”

그러자 이온이 버니언에게서 온 편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그의 눈앞에 들이밀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유명한 격언이 있잖아, 적의 적은 아군이다…….”

카밀루스는 곧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차마 이온이 아스타틴과 야합을 하려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스타틴이 찾아왔어도 문전박대보다 더 가혹하게 내내 바깥에 세워 두기에, 당연히 예전의 일로 감정이 아직 좋지 못하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이온, 네가 설마 그를 완전히 믿으리란 생각은 안 하지만…… 아스타틴은 그 정도까지 신뢰할 사람은 아니야.”

“알아.”

“그럼 더욱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이온은 음,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선황의 사람이지. 그를 발탁하고 신뢰해 준 건 선황이니까. 지금 버니언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녀석이 단순히 황궁에 들어앉았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명분이라는 거야, 이온.”

이온에게 다 져 주고, 오냐오냐하는 카밀루스이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평가가 꽤 냉정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말한 그는 이온에겐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는지 동의해 달라는 듯 에렌스트 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뼛속까지 이온의 사람이고, 카밀루스에겐 오히려 감정이 썩 좋지 않은 에렌스트 경은 모르는 척했다.

앞에 제 편이 있다는 것에 은근히 힘을 받은 이온은 카밀루스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그럼, 그에 버금가는 새로운 명분을 부여해 주면 되는 일이지.”

황제의 지위와 버금가는 유의 명분이라니.

뭔지 짐작이 안 돼 카밀루스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자, 이온이 갑자기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카밀루스, 난 네가 잘생겨서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

이온이 몸을 틀어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좀 수상했다. 그에 카밀루스가 에렌스트 경을 다시 돌아보자, 그와는 미리 얘기가 된 건지 이쪽에는 시선도 안 주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에렌스트 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이온이 눈동자가 안 보일 만큼 눈꺼풀을 접어 웃었다.

“얼굴만 봐도 개연성이 생기잖아.”

얼굴이 개연성인 건 오히려 넌데?

이온의 예쁜 웃음을 보고 상황 파악 못 하고서 뇌가 그런 생각을 뽑아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나한테 뭘 시키려고 이래?”

왜 갑자기 외모 칭찬을 하느냐며 수상해하는 카밀루스의 반응에 이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황태후랑 스캔들.”

문제는 나온 단어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지만.

카밀루스는 제 귀가 잘못된 줄 알고 “뭐?” 하고 되물었지만, 이온은 제 할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고 난 자수를 준비할 거야.”

“……자수라니.”

연속된 이야기가 너무 터무니없어 어안이 벙벙해져 카밀루스가 그의 표현을 곱씹었다. 하지만 이온은 카밀루스의 불안감을 풀어 주지 않은 채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도와주실 거지요, 대공?”

물론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위험해 보이는 말들만 골라 한 이온의 말을 카밀루스는 단호히 배격했다.

“안 도와.”

고집은.

이온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제 계획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고, 카밀루스의 표정은 한동안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온은 알았다.

그가 반드시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리란 것을.

* * *

오전에 눈이 그쳐 있어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점심이 지난 뒤에는 오랜만에 햇빛이 비쳤다.

겨울이지만 하늘만 맑다면 햇살이 비칠 땐 꽤 선선하니 활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온도 컨디션만 괜찮았다면 외출을 고민했을 터였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7%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웬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여 저택 밖으로 나가는 카밀루스를 2층 회랑의 창문을 통해 지켜보다가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몸을 돌린 순간, 갑자기 몸을 움직여서인지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흔들렸다. 바로 곁에 있던 에렌스트 경이 반응했다.

“도련님!”

어느샌가 비틀거렸는지 다음 순간 이온은 제 두 팔을 붙든 에렌스트 경의 악력을 느꼈다.

꽉 쥐어 오는 손길에 이온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톡톡 쳤다.

“고마워.”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걱정이 됐는지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부축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걱정 어린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며칠 내내 기침을 하시더니 오늘은 특히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응, 좀 쉬어야겠어.”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에렌스트 경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보다가 결국 그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방까지 업히십시오.”

이온은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내 그의 등에 업혀 목을 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기대니 왠지 잠이 오려고 했다.

눈을 살짝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내려지는 느낌에 눈을 뜨니 벌써 침대 위였고 에렌스트 경이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이온은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 에렌스트 경에게 요구했다.

“책상 위의 서류들 좀 가져와서 내 옆에 놔줘.”

“……계속 이러시면 공작 각하도, 에밀리 아가씨도 많이 속상해하실 겁니다. 쉬실 땐 쉬세요.”

“괜찮아, 쉬엄쉬엄 할 거니까.”

짧게 핀잔을 두긴 했으나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은 하는 수 없이 그 말에 따라 종이 뭉치들을 이온의 침대 위에 날라다 주었다.

이온은 제 옆에 쌓이는 그것들을 헤드에 기댄 채 지켜보다가 또 다른 것을 요청했다.

“알렉, 버니언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받침대랑 편지지, 펜을 가져와.”

“답장을 하시려고요?”

에렌스트 경이 의외라는 듯이 묻자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니언이 혹시나 계획 중간에 날뛰면 곤란하니까. 그 녀석 전문은 흙탕물 만들기고, 그런 건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이온이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편지 쓰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 에렌스트 경이 그의 앞에 종이를 펼치고 손에 펜을 쥐여 주었다.

그에 이온은 뭐라고 쓸지 서류들 사이의 빈 종이를 찾아 연습하다가, 얼마 안 가 편지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존경하는 오브라이언의 위대한 황제 폐하께 전합니다.

최근 비렌시움 대공이 계속해서 봐주고 있지만 제 저주의 병세는 그렇게 완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편지를 침대에 누워 쓰는 중이지요. 하여 당장 폐하께 찾아뵙고 싶지만 그러지 못함을 부디 선처하여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딜런 경이 어제 낮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저에게 그러더군요. 귀족들을 사분오열시킨 라치크의 길드장이 저냐고요. 솔친 후작 저에 찾아간 일로 저를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하, 감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 역시 황실을 보필해 온 크레이거가의 일원으로서, 선대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그 만남은 후작이 먼저 청한 것으로, 저희 크레이거 가문이 솔친 가문과 더 교류할 일은 없을 겁니다. 후작 또한 그것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이곳에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황실과 크레이거 가문마저 분열시키고자 하는 누군가가 가로챌지 모르니 저어됩니다.

거짓과 진실을 섞어 쓴 첫장이었다. 이온은 잉크가 마르는 동안 제가 쓴 글을 읽어 보다가, 이내 새로운 편지지에 마저 이어 썼다.

겨울이 깊어 가고 황궁에 눈이 쌓이고 있으니, 너른 정원에 눈꽃이 가득 피면 황실 연회도 곧 열리겠군요. 올해는 특히 폐하의 즉위년이니, 그때는 꼭 참석할 수 있도록 몸을 회복시키겠습니다.

깊은 황궁에서의 밀회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의 첫 춤의 가치는 훨씬 더 귀중한 것이 될 터이니. 또한 턴을 하는 동안은 누구도 우리의 입술엔 주목하지 않겠지요.

황궁의 복도에서와는 달리 말입니다.

다 쓰고 제 이름까지 적어 넣는 것을 보며 에렌스트 경은 내용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나 싶어 걱정하고 있는데, 이온이 편지지를 접어 그에게 내밀었다.

“알렉, 이 편지를 황궁에 부쳐 줘.”

“예.”

일단 대답한 에렌스트 경이 근데 내용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이온이 덧붙였다.

“그러고 배달하는 자를 매수해서 중간에 빼돌려. 그 뒤 발견되는 위치는…… 황궁 시종장의 책상 서랍 정도가 어떨까?”

“난도가 꽤 높군요.”

“불가능하지는 않잖아?”

“물론입니다.”

에렌스트 경이 편지지를 봉투에 슥슥 넣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상상해 보는데, 그림이 꽤 재미있었다.

하여 살짝 웃는 모습을 확인한 이온은 이마를 짚더니 베개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이제는 정말 좀 쉬어야겠어…….”

중얼거린 이온은 몸을 아래로 내려 두꺼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이불을 정리해 주긴 했지만, 이온은 제가 방금 밖으로 내보낸 카밀루스의 체온이 안 느껴진다는 것이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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