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이름을 외친 카밀루스가 돌연 침대 밖으로 튀어 나가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뒤돌게 하며 빠른 속도로 혓바닥을 놀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이 짧았어. 우리 밖으로 나가서 대화할까?”
그렇게 권유하며 카밀루스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방금 전의 뻔뻔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태세 전환을 한 그의 모습에 뭔가 있구나 싶었던 페드로가 눈을 치켜뜨자, 카밀루스가 어서 나가자며 간절히 눈짓했다.
물론 카밀루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그러는지 훤히 아는 이온이었지만 전혀 눈치 못 챈 척 굴었다.
“저도 깨어났으니 안심하고 나가셔도 돼요. 마침 더 자려고 했으니까요.”
“미안, 미안, 이온.”
연신 사과하며 카밀루스가 페드로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이온은 닫힌 방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온 역시 말실수를 해 버려서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카밀루스가 오히려 더 당황해 주어 다행이었다.
[상태 이상 ‘마법 계약’
시전자: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그야 눈앞에 이런 창이 뜬다는 걸 설명하기도 영 어려운 노릇이니까.
이온은 내용을 훑다가 문득 고민이 들어 눈을 내리깔았다.
‘정신을 잃을 때마다 문에 대한 꿈을 꾸는 것 같은데…….’
그런데 오늘은 쫓기는 꿈이 아니었다. 심지어 꿈속에 카밀루스가 나왔다.
‘문’은 전생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무의식이 구성한 망상일 뿐이었나? 만약 정말로 전생의 이야기라면 그곳에 카밀루스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깨어난 직후에 또 시스템의 비밀이니 어쩌니 하는 창이 떴던 것이 언뜻 기억났다.
그 메시지는 늘, 카밀루스와 연관이 되었을 때 떴었다.
그것을 상기하니 엉뚱한 가설 하나가 머릿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혹시 이 시스템을 구성한 게 카밀루스인 거 아니야?’
이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스템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정답을 떠올렸다면 아마 곧바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반응 없이 잠잠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온은 역시나, 하고 중얼거렸다.
카밀루스가 굉장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인 건 맞다. 그렇다 해도 역시 그 가설은 무리했던 것이다.
“그럼 대체 뭐지…….”
이온은 고민을 해 나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무리 머리 터지게 고민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봤던 끝없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과 주위를 둘러싼 어둠은 깨어나고 떠올려 봐도 불쾌한 기분을 주는지라, 한동안은 떨쳐 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 * *
“미치셨습니까?”
페드로가 카밀루스에게 떠밀려, 변명 가득한 설명을 다 들었을 때에는 이미 새벽의 여명이 가시고 아침의 하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소파에 마주 앉아 욕하고 싶은 걸 내내 참고 있던 페드로는 카밀루스의 말이 끝나자 곧장 그렇게 물었다.
말하는 제가 생각해도 논리가 빈약했던 터라, 카밀루스는 그냥 짧게 대꾸했을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니까.”
“언제부터 ‘계획한 것이다.’라는 말이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로 패러프레이징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꽤 따끔한 지적에 카밀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페드로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해당 마법을 걸 때 다른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이온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니 페드로의 다음 질문에도.
“그 마법, 풀 수는 있는 겁니까?”
카밀루스는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못 풀어.”
“대공…….”
페드로의 한마디에는 한숨이, 한숨에는 수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설명을 듣자 하니 이온이 저주를 풀지 못한 채 죽거나 하면 카밀루스도 죽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비렌시움 대공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 이상, 그의 목숨에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 역시 걸려 있는 거였다.
오랫동안 아이오딘에서 제 작은 땅에서 소수의 영지민들을 지켜 왔던 카밀루스가 그를 모를 리는 없다고 여겼기에 페드로가 한숨 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반성하지 않았다.
“그걸 풀 수 있었으면 페드로에게 걸린 조건 마법도 풀었지.”
그의 말은 칼 단장이 걸었던 페드로의 조건 마법을 가리킴이었다.
그렇게 은근히 당신도 날 위해 그러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겸하는 것에, 페드로는 골이 아파졌다.
“진짜, 대공의 머릿속엔 소공작밖에 없군요.”
“……이온은 내가 지켜 줘야 하잖아.”
이온 크레이거가 아무리 약하다 한들 분명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는 아닐 터인데, 카밀루스가 이리도 당당하게 말하니 페드로는 가끔 제가 못된 인간인가 하는 자아성찰에 빠지고는 했다.
그러나 입으로는 빈정거리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얼마 전에 3일 동안 못 만났을 때는 어떻게 참으셨답니까.”
“미칠 뻔한 거 못 봤어?”
“봤습니다, 자존감이 땅굴 파고들어 가서 지하 동굴 만든 건.”
“…….”
“적당히 좀 하세요.”
얼마 전 이온과 다툼 아닌 다툼을 하고 나서 솔친 후작 저에 쫓아가기까지.
그 시간 동안 카밀루스가 얼마나 꼴불견이었는가 늘어놓기 위해서는 하루도 부족했다.
막상 주접을 떤 당시자는 더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페드로는 내가 얼마나 초조한지 상상도 못 할걸.”
실제로 카밀루스는 크레이거 공작가에 들어온 이후로 매일이 전전긍긍이었다. 눈앞에 두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천만에.
그는 심지어 말도 안 되게, 꿈속에서 버니언에게 이온을 빼앗긴 적도 있었다. 그 꿈을 꾼 날 카밀루스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악을 찍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런 카밀루스의 상태를 늘 곁에서 지켜본 페드로야 그의 심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한심해는 했지만 결국 크게 핀잔을 두지는 못했다.
“그놈의 저주가 빨리 풀리긴 해야지, 원……. 그래서 말입니다만.”
화제를 전환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카밀루스가 얼른 페드로의 주머니부터 털려고 들었다.
“혹시 마리엘 쪽 소식이라도 있나?”
“아니요, 마리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적어도 조사한 이들 중에 아는 사람이 아예 없었습니다.”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생각보다 난항이라는 소식에 카밀루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지만 별다른 언급은 없이 다음으로 넘겼다.
“그럼 다른 할 말은 뭐지?”
순순히 말해 주지 않으면 꼬치꼬치 캐물어 귀찮게 할 생각이 만만한 카밀루스를 보며 페드로는 잠시간 공백을 두었다. 무슨 일인가 하니 재니스에 대한 것이었다.
“듣자 하니 마탑주한테 지병이 있는 모양이던데 대공께서도 아셨습니까?”
카밀루스가 재니스에게 얼마나 감정이 안 좋은지 알고 있기에 주저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따라오는 단어가 지병이라니, 약간의 연민마저 일으키는 표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일순간만 침묵했을 뿐, 금세 반문했다.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채이긴 해도.
“지병? 뭐, 늙지 않는 병 같은 건가?”
“농담하지 마시고요.”
“농담 아닌데.”
실제로 카밀루스는 재니스를 그런 쪽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혹시 그가 탈(脫)인간의 존재이거나, 아니면 거의 모든 인간이 꿈꾸는 비밀―즉 영생의 비밀을 알아낸 자가 아닐까 하고.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재니스를 보다 보면 그런 초월적인 것들까지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어렸을 때 제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압도적인 모습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 보는 좁은 하늘을 그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탑 안의 카밀루스에게 있어서는 재니스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페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건 아니고 갑자기 정신을 잃는 병이랍니다. 지금도 종종 겪는 모양이던데요.”
“재니스가……?”
“네, 마탑주의 방엔 늘 결계가 쳐져 있는데 그게 종종 풀리는 경우가 생긴다더군요. 연에 한 번 있거나 없을 수도 있을 정도로 희박하기는 한데 그럴 때 살펴보면 방 안에 기절해서 늘어져 있다고요.”
듣던 카밀루스가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기지가 않는데, 아니 말이 안 돼.”
“어째서요?”
“고작 기절하는 것만으로 결계가 왜 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