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됐고. 저번에 크레이거 가문에 보낸 내 편지에 대한 답은 아직인가?”
이는 저번에 이온에게 보냈던, 자길 찾아오라는 의미로 보낸 그 편지에 대한 답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온에게 며칠 전에 보냈지만 아직 답변 한 줄도 받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고, 본인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아무리 크레이거 가문의 후광이 대단하다고 해도 명색이 황제가 보낸 편지인데 이런 식으로 무시당한다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은근히 보수적인 반면, 그만큼 일반적인 경우에서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이온이 이렇게까지 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시종장의 대답은 같았다.
“예, 그런 듯합니다.”
목소리 톤, 말할 때의 자세까지 똑같이 곁들인 그 말에 버니언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날 우습게 보지, 응?”
화가 나고 불안감도 일었다. 그에 손톱을 이로 깨물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가 잇새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흘렸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편지를 보내면 이온이 나타나리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충동적인 감정이 있었다.
보고 싶다. 진짜로 그냥 보고 싶었다.
황제가 되고 나서의 딱 하나의 불만 사항을 말하자면 이온에 관한 것이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그가 밖으로 나온다는 소식이 있으면 따라다닐 수라도 있었지, 이제는 저를 주시하는 눈도 많아서 그런 체면 구기는 짓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편지 답장이 안 왔다는 이유로 제가 꼴사납게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사람을 보내 답장을 재촉해 받아 오기도 모양이 빠졌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데, 그의 한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시종장이 그의 마음을 알고 힌트를 주었다.
“최근에 소공작의 몸이 좋지 않아 내내 움직이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크레이거 가문에 사람을 보낼까요?”
그런 핑계가 있다니 아주 솔깃하긴 했지만, 그보다 이온의 몸이 좋지 못하다는 소리에 버니언이 눈썹을 꿈틀헀다.
“……얼마나 아프다는데?”
“들려오는 소리로는 본래 겨울에 소공작이 몸살도 심해지고 한다고 하니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얘기를 듣고 떠올려 보니 확실히 매년 겨울이 되면 이온의 활동이 줄어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를 몇 년 쫓아다닌 경험으로 미루어 시종장의 말을 쉽게 이해한 버니언이었다.
“그럼.”
그가 주저하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 주었다.
“몸살에 좋은 음식이나 차, 간식 같은 것들이 있으면 좀 챙겨서 보내 봐…….”
버니언은 홍차는 못 마시니까 꼭 빼고, 하는 말을 덧붙이다가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연히 짜증 나지만.’
짜증만 나나?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만약 이온이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면 선물을 받고 저한테 답장을 안 보낸 걸 떠올릴지도 몰랐다.
어차피 가식만 가득할 편지 몇 줄에 왜 이토록 간절해지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예 무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의 말에 시종장이 웃으며 성실한 답을 돌려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고 버니언은 오히려 미간을 구겼다. 이온에게 너무 물렁하게 구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령을 철회하고 싶지 않아 하는 제 마음속 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집무실 문 앞에 도착한 그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녀석을…… 진짜로 좋아하는 거 같지?’
예전에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냥 예뻐서 눈길이 끌린 정도였다. 연약함,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처연함이 그 얼굴을 더 미인으로 보이게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카밀루스 때문에 한 번 괴롭혀 준 이후로 저에 대한 경계가 잔뜩 높아진 채로 튕겨 대는 녀석을 저도 모르게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꽤 진지한 감정이 돼 있었다.
게다가 이온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재니스의 말을 들은 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때부터 버니언은 이온 크레이거를 대상으로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카밀루스 그 새끼가 이온을 좋아하는 것도 오기를 부추기는 원인일지도 몰랐다.
버니언도 알았다. 이온은 자신보다 카밀루스를 훨씬 더 좋아하고,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걸.
그렇지만 이온은 딱 봐도 욕심 있는 타입이었다. 자존심도 세고, 몸도 안 좋으면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많았다.
하여 버니언은 이온 크레이거가 사생아인 카밀루스를 택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했다. 그의 배경은 이온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게다가 이온이 제 황후가 되어 애를 낳는다면 황실까지 휘두르며 살 수 있는 쉬운 길이 열리는데 굳이 딴 데 눈길을 둘 필요가 있을까.
자신도 이온이 그걸 원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도록 날개를 달아 줄 작정이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이온을 제 손에 넣기까지 말이다.
그런 망상 아닌 망상들을 떠올리던 버니언은 벌써 꽤 오래 못 본 이온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초록빛 눈, 밀빛 머리. 누군가는 이온 크레이거보다 에밀리 크레이거가 훨씬 더 미인이라고 하지만, 버니언은 동의 못 했다.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가녀리고 작은 몸도 선이 예뻤다. 자기는 연약해 보이는 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와중에 보수적인 성격 그대로 연회 같은 데에 매번 금욕적인 차림으로 나타나는데, 아직 그 옷이 허물어져 내리면 안쪽에 얼마나 눈부신 모습이 있을지 상상만 해도 황홀했다.
집무실의 의자에 앉은 버니언은 때마침 묵직해진 하체에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 근육이 땅긴다 했더니 어느새 사타구니가 빠듯해져 있었다. 그걸 보고 버니언은 탄식했다.
“하, 씨…….”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시종장의 존재조차 잠시 잊고 있던 그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건조하게 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계속 이 상태면 저녁에 풀긴 해야겠지만, 저번에 카밀루스가 이러다 사생아를 낳겠다는 엿 같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더는 제 침대에 아무도 안 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수록 이온을 향한 갈망은 끝 간 데 없이 커져 갔다.
* * *
오늘은 황실도서관의 서가 한편에서 두꺼운 책을 든 카밀루스는 주변의 소리조차 잊은 채 내용에 빠져들고 있었다.
요즘 이온이 하라는 대로 낮에 와서 이곳에 와서 해 질 녘쯤에 황성 일원을 돌아다니다가 공작 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만 마냥 시간을 썩힐 순 없으니 역대 황제들의 기록들을 뒤지며 황성의 이름 없는 탑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엔 제가 나타나기만 해도 졸졸 쫓아다니며 잔뜩 경계하던 도서관의 사람들이, 매일 나타나 별일 없이 그냥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니 느슨해졌는지 이제는 감시의 눈이 그렇게 촘촘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꽤 유의미한 정보들을 서서히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탑이 본래 그 앞의 블랑셰를 기리는 성전과 한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역시나 황성 탑이 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늘 의아했었는데, 뭔가 의미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 카밀루스는 탑에 관한 일화들만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지금도 로제니아보다 더 이전에 있었던 어떤 황후의 비화를 훑어 내릴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얇은 책 한 권을 가져온 페드로가 카밀루스의 옆에 나란히 섰다.
“대공, 여기 보십시오.”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건물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몇백 년도 더 된 것이라 지금의 눈으로는 도면의 기호들을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모양으로 미루어 대충 성전과 황성 탑의 설계도라는 사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페드로는 두 건물 사이에 이어져 있는 선들을 가리키며 카밀루스에게 넌지시 제 생각을 밝혔다.
“이건 지하도가 아닐까요?”
페드로가 발견한 예의 도면은 부감도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두 건물을 이어 주는 통로를 그려 놓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하는군. 하지만 지금 성전 터에는…… 지하로 갈 만한 입구는 안 보이는 것 같던데.”
현재 내황성 북쪽 끄트머리에는 성전 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가 봤자 별거를 확인하긴 어려웠다. 다시 평평하게 땅을 다듬어 놨기 때문이다.
그에 페드로는 혹시나 하는 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겉만 그렇지 이 통로가 진짜로 지하도라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보십시오, 통로가 생각보다 길고 굵습니다. 굳이 이 위에 뭔가 세우지도 않았으니, 매몰하지 않았을 확률도 꽤 있어 보이는데요.”
카밀루스는 듣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번에 봤던 결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중 결계이기는 하지만, 만약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 지하도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채 결계를 생성해 놨다면 지하를 통해 탑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긴 했다.
그럼 결계를 부수거나 해체함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부수적인 문제들을 피해 갈 가능성 역시 다분하다.
“……찾아보긴 해야겠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려왔다.
“꾸우!”
카밀루스의 옆에 있던 페드로는 맞은편 책장의 책들 사이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새끼 화이트 드래곤을 보면서 흠칫했다.
얼마 전, 너무 커져서 더는 숨기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온의 방에서 쫓겨나고 카밀루스를 졸졸 따라다니는 욤뇽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