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루스는 방금 말을 다 듣고는 눈을 반짝이고 있는 녀석을 한 번 힐끗하고는 페드로에게 고갯짓을 했다.
얼른 조용히 시키라는 뜻을 알아들은 페드로가 욤뇽이를 책장 사이에서 꺼내 얼른 품에 안았다.
그는 주변에 보이지 않도록 제 몸으로 욤뇽이를 가리며 속삭속삭했다.
“쉬이,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 이런 데서 자칫 잘못 들키면 다른 데 잡혀가실 수 있으니까요. 납치되면 대공께서 안 구하러 가실 확률이 높아요.”
“꾸…….”
페드로가 뒤에 덧붙인 말에 카밀루스가 눈꼬리를 슥 치켜올렸다. 드래곤 녀석이 납치되어도 안 구하러 갈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저런 말을 직접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한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까지 당부하는 페드로의 경고가 유효하기는 했는지 욤뇽이는 물빛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마구 끄덕끄덕했다.
녀석이 곧 작은 손으로 주먹까지 쥐며 결심했다는 자세를 취했다.
‘말 잘 들을게!’
꼭 그렇게 말하는 것같이 보석안을 과하게 반짝거리는 욤뇽이었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그 녀석한테 왜 존댓말해?”
질문을 받은 페드로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욤뇽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욤뇽이는 그의 손에 걸쳐진 채 굵은 꼬리를 흔들거리며 카밀루스를 마주 보게 되었고, 페드로는 자신 있게 제 평가에 대해 말했다.
“보세요, 대공. 딱 이 용안만 봐도 신령해 보이지 않습니까?”
“……용안이라니.”
대체 그 동글동글한 얼굴의 어디가?
카밀루스는 곧장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야 용의 얼굴이니 용안(龍顔)이 맞기는 하지만…… 사실 카밀루스도 어렸을 때는 욤뇽이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신령한 동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욤뇽이는 이온의 방에서 나온 뒤에도 제 먹성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같이 쿠키 달라고 조르는 쿠키 괴물의 자세를 훌륭히 유지 중이었다. 그래서 이온의 방에 있던 과자 상자가 카밀루스의 방에 옮겨졌을 뿐 아니라, 이온이 매일 아침마다 제 방으로 오는 쿠키를 들고 찾아오는 중이었다.
말랑한 하얀 뱃살의 8할은 쿠키로 찌운 것이 분명한 욤뇽이를 보다가 카밀루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이온은 귀여운 겉모습에 속고, 페드로는 태어나 처음 보는 화이트 드래곤의 존재에 과하게 흥분한 듯싶다.
페드로는 오히려 카밀루스가 왜 홀대하는지 모르겠다는 양 도로 욤뇽이를 마주 안았다. 그러더니 카밀루스의 태도에 풀이 죽어 보이는 녀석을 둥기둥기하며 달랬다.
“대공께선 그냥 본인이 너무 대단하셔서 우리 드래곤님의 가치를 못 알아보시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에 욤뇽이는 페드로의 품에 제 얼굴을 비비며 강아지처럼 순하게 미소 지었다. 페드로는 그 모습을 보고 또 너무 귀엽다면서 꼭 끌어안았다.
“…….”
요즘 페드로는 때아닌 드래곤 육아를 하면서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모양이었다.
싫다고 진저리 치는 경우보다야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던 카밀루스는 기분이 묘해졌다.
한데 그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페드로가 욤뇽이를 서둘러 다시 책장에 구겨 넣었다.
욤뇽이가 쏙 숨어서 그림자에 숨고, 페드로가 뒤돌아서는 타이밍에 맞추어 누군가가 카밀루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실 소속의 시녀로 보이는 그녀는 카밀루스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조용한 독서를 방해하여 송구합니다, 비렌시움 대공 전하.”
어차피 황실 소속이라고 해 봤자 현재 내황성에 머무는 황실 사람은 둘밖에 없으므로 누구의 사람인지는 간단히 추론 가능했다.
카밀루스가 제 옆의 책장에 들고 있던 책을 꽂아 넣으며 대꾸했다.
“태후 폐하의 부름인가?”
“예. 태후 폐하께서 대공이 이제 답을 내 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
그것은 애초에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허락해 준 데 대해 카밀루스가 황태후에게 주기로 한 대가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저를 찾기까지 제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린 것을 보니, 황태후는 카밀루스가 먼저 찾아오길 바랐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를 불렀다는 것은, 지금은 기다릴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는 의미일 터.
카밀루스는 일이 제 뜻대로 잘 풀릴 거라는 생각에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앞서도록 하게.”
그 웃음을 단지 의례적인 승낙의 의미로만 파악한 시녀는 공손히 예를 차린 뒤 뒤돌아섰다.
그녀를 따라 발을 옮기기 전에 카밀루스는 페드로에게 속삭였다.
“마차에 가서 물건들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대공.”
* * *
황태후궁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의 존재에 다들 잔뜩 긴장한 분위기였다면, 두 번째 방문을 한 지금은 긴장보단 경계심이 더 느껴졌다.
카밀루스는 전과 달리 아직 비어 있는 응접실에 앉아 황태후를 기다리는 와중, 제게 향하는 시녀들의 눈초리에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자신은 황실 어디를 가든 불청객인 처지이니 말이다.
아마 황태후가 그를 늦게 부른 데에는 그런 불편한 관계라는 이유도 한몫을 하긴 했을 터였다.
“오랜만이에요, 대공.”
그래도 다행히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진다고 생각하기 전에 황태후가 응접실에 모습을 비쳤다.
겨울이라 웃옷을 걸치긴 했지만 그 우아함을 가리지 않도록 가볍게 입은 그녀는 구두 굽 소리를 작게 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밀루스는 의자에서 일어나고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춘 그녀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곧 내밀어진 장갑 낀 손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올리는 경의의 표시를 끝으로 시녀들은 응접실의 문을 닫았다.
그러고 태후의 말없는 고갯짓에 따라 카밀루스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태후 역시 그의 맞은편에 몸을 내렸다.
썩 좋지는 못한 사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태후는 이런저런 안부를 생략했다.
“대공은 입도, 몸도 무거운 모양이더군요.”
첫마디는 왜 황실의 어른인 자신이 먼저 찾게 하느냐는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에 고개를 숙이며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을 입에 올렸다.
“황실도서관의 책들에는 과연 제가 몰랐던 많은 지식들이 있는 터라, 미처 그 약속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에 태후는 약간 표정이 굳었지만, 카밀루스가 먼저 약속에 대해 상기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천천히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마법사들은 지식을 사랑한다고 하니 대공도 물론 예외는 아니겠지요.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 태후궁에 놀러 와 티타임을 즐기는 레이디들도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니 즐거운 대화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순식간에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더군요.”
카밀루스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대충 눈치챘지만 일단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레이디들은 알고 태후께서 모르는 그 소문이 무엇인지요. 혹시 저에 대한 겁니까?”
“그래요, 대공. 물론 레이디들의 화젯거리에 오른 건 대관식 때 모두의 눈을 빼앗은 대가이기도 하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차라리 영광스러운 일이군요. 하지만 태후 폐하를 당혹게 한 그 소문이 무엇인지는 감히 짐작이 안 되니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약속이 잘 지켜졌다면 내가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죠.”
네 어미가 누군지 어서 말해 달라는 이야기를 이토록 피곤하게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녀가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니 카밀루스는 존중하기로 했다.
대신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카밀루스도 마찬가지로 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한 번 한숨을 쉰 태후가 한마디 던졌다.
“얼마 전에 대공이 솔친 후작가에 찾아갔다고요?”
“그렇습니다, 태후 폐하. 하룻밤 신세를 진 일이 있었지요. 그것이 혹 이 황실의 뜻에 반하는 일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직 황도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대공이 누군가의 집에서 숙식하는 일을 탓할 것은 없지요. 하지만 다음 날 그곳에 또 가서 대공이 한 말이 본 태후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에요.”
카밀루스는 더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태후 역시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한마디 던졌다.
“거기서 하룻밤 지내다 어머니의 유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지요, 대공?”
그에 카밀루스는 속으로 웃었다.
예상대로 솔친 후작이나 그 집안사람들의 입은 꽤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카밀루스는 곧 제 겉옷의 안주머니를 뒤졌고, 손에 쥔 무언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을 뗐을 때 드러난 건 작은 회중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