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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의 진위는 어떤 방식으로 검증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떠나고 나서 나르바에스 단장을 불러다 말을 맞춰 보셔도 됩니다.”
카밀루스가 제 예상보다 훨씬 당당하게 나오자 태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혹시 이미 상대의 덫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시간은 답답하리만치 길지 않았다. 태후가 꽤 선선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대공, 그게 우리의 약속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가요? 난 우리 지난 만남의 주요 내용은 ‘거래’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의 지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네 어머니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녀의 돌려 말하는 화법에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으로 할 말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벌써부터 집중력을 잃으면 곤란했으므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저도 거래의 아름다운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태후 폐하.”
태후가 어디 한번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아시다피시, 전 그날 이후 틈만 나면 황실도서관으로 향했지요. 선황 폐하와 선선황 폐하 때의 거의 모든 기록을 뒤졌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한 언급은 물론, 선황 폐하의 주변에 있던 ‘여인’에 대한 언급 역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요.”
“그래요. 역사가 기록한 그이의 여자는 나와 로제니아 황후, 둘이죠.”
그리고 카밀루스는 탑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태후도 아마 모르는 사람 중 하나였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카밀루스가 황실의 적통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은 어찌 보면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덕분에 카밀루스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진실을 좇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되었으니.
그가 제 앞의 낡은 회중시계를 손톱으로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결국 나머지 시간 동안 이 회중시계의 주인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단서를 찾았나요?”
카밀루스는 얼굴에 착잡해하는 빛을 띤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돈에 매수된 자가 아니라면 이런 평범한 회중시계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태후의 시선이 다시금 그들의 앞에 놓인 회중시계로 향했다. 카밀루스의 지적대로 눈앞의 물건엔 어떠한 독특함도 없었다. 이토록 특징 없는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가 있는 것이 오히려 수상하긴 하다.
그렇지만 태후는 이런 변명이나 듣자고 카밀루스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투에 약간의 비꼬는 기색이 스몄다.
“결국은 우리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거란 소리군요?”
그러나 카밀루스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태후 폐하. 이는 저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니.”
“하면?”
“…….”
카밀루스가 답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태후는 실망한 투로 말했다.
“어떻게 우리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아직 대공 안에 답이 없는 모양이에요.”
“그런 것은 아니나 태후께서 오해를 하실 듯하여.”
“대공, 우리의 대화에 오해 하나 얹힌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요?”
이미 한 마디 한 마디에 의심이 가득한데.
태후가 말을 마친 순간 카밀루스의 파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잠시 뒤 그가 태후를 똑바로 마주하며 또다시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잡았다.
회중시계를 꺼낼 때보다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에, 태후가 저절로 그의 손을 주목하고 있었다.
곧 회중시계 옆에 카밀루스의 손이 놓였다.
“해서, 이들의 힘을 빌리고자 하고 있지요.”
무언가를 숨기던 손가락이 풀리고, 카밀루스의 손이 떠나간 자리에는 작은 배지 하나가 남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린 태후가 고운 이마에 주름을 새겼다.
“이건…….”
흰색과 검은색, 두 마리의 뱀이 꼬여 있는 모습의 문장이 각인되어 있는 배지.
이는 라치크 길드의 것이었다.
황태후가 제아무리 궁중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는 하나, 은둔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특히나 최근 아들인 버니언이 이곳의 길드장을 찾겠다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라치크의 길드장이 귀족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중이기도 했지만, 바로 눈앞의 사내와 그를 잡자며 한심한 내기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의 힘을 빌리겠다니.
태후는 내심으로 카밀루스를 더욱 미심쩍게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도 그를 뒤쫓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그녀의 당연한 지적에 카밀루스는 불안감을 드러내는 듯이 탁자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아 꽉 쥐었다. 태후는 그의 모습을 요주의하여 살피면서도, 표정은 평상을 유지했다. 카밀루스가 곧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용은 그런 태도가 이해될 만큼 심히 불순했다.
“해서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찾고자 한다면 그를 잡으면 안 되고, 그를 잡고자 한다면 어머니를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하니.”
라치크의 길드장은 현재 황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한데 지금 카밀루스의 발언은 충분히 그를 비호하겠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었다.
사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충분 조건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는 황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어요, 대공.”
태후가 적당히 경계의 말을 흘렸다. 그러나 이미 말꼬를 튼 카밀루스는 그 흐름을 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겠습니까?”
“무슨 의미이지요?”
“어머니의 일을 맡긴 뒤 그에 따른 요구 사항들을 키워 가면 그쪽의 정보 역시 이쪽으로 흘러들어 올 때가 생길 것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이 카밀루스와 태후 사이를 오갔다. 그들은 서로의 의중을 가늠하듯이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태후는 얼마 안 가 카밀루스의 말뜻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마치 그 전까지는 아스타틴이 그를 찾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더 깊이 파고들자면 결국은 버니언을 배신하라는 제안이었다. 곧 황태후로서는 그러겠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다.
물론 거절당할 것을 능히 예상했던 카밀루스는 별로 아쉽지 않다는 듯, 순순히 한발 물러났다.
“아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도와주지 않으셔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긴 합니다.”
“…….”
잠시 긴장한 듯 굳어 있던 카밀루스는 마지막 말을 할 땐 어쩐 일인지 여유를 찾은 상태였다.
심지어 태연히 제 품에 배지를 도로 돌려놓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태후는 당연하게도 그가 더 의뭉스럽게만 보였다.
대관식 때의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 아직은 카밀루스의 능력치를 의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맨몸으론 접근조차 어렵고, 가다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 모르는 제국의 최북단인 아이오딘에 무려 8년간 고립되어 있던 카밀루스다.
그러니 본래라면 그에겐 정치적 통찰력이 부족해야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그러나 막상 그를 앞에 두고 있으니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전의 만남 때는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심지어는 어떻든 이미 버니언이 황위에 올랐으니 딱히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카밀루스가 그만 회중시계마저 챙겨 가져갔다. 그는 태후의 눈길이 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시간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준비한 게 슬슬 올 때가 됐군요.”
“준비한 것이라니, 무엇이지요?”
카밀루스는 웃음으로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때에 맞춰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바깥에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궁 밖에 대공의 부관이 와 안에 들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태후 폐하.”
바깥에서 대답해 오는 소리를 듣고서 태후가 하문하기도 전에 카밀루스가 먼저 운을 뗐다.
“들이십시오. 제가 명한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일 터이니.”
그러자 태후가 대놓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제 표정을 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펼쳐 눈 아래를 가렸다.
“대공, 무얼 가져온 건가요?”
“염려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하얀 털이 달린 부채가 그녀의 하관을 완전히 가린 의미를 모르지 않을 카밀루스는 태연히 그리 물었다. 그러자 태후가 얼마 전부터 귀족들 사이에 돈 그들에 관한 소문을 지적했다.
“대공은 최근 우리에 대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소문이 생겼다는 걸 알지 못하나요?”
바로 이온이 퍼뜨리겠다고 했던, 카밀루스와 황태후 사이의 염문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