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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65)화 (165/317)

“듣기는 했습니다만, 글쎄요. 완전한 헛소리라 태후께서 그런 것을 신경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그런 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대꾸해 오자 태후는 부채에 가려진 입술을 꿈틀했다.

실제로도 카밀루스는 별 신경을 안 쓸지 모르고, 태후 역시 그것이 낭설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리 봐도 그가 건네려는 ‘선물’에 뭔가 계산속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치기란 어려웠다.

결국 태후는 그가 제 앞에 내미는 함정 카드를 뒤집어 보는 일조차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페드로의 방문을 알려 온 바깥을 향해 이야기했다.

“비렌시움 대공이 그만 돌아간다고 하는구나. 들이지 아니 하여도 되겠다.”

내용을 들은 카밀루스는 허탈함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축객령을 이런 식으로도 내리시는군요.”

태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손님을 몰아내는 데에 즐거움마저 느끼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배웅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난 대공이 당연히 잊었으리라고 여겼는데, 다행이군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카밀루스와 황태후는 서로를 떠보고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쫓겨나게 된 카밀루스는 황태후도 과연 꽤 준수한 귀족가의 여인이었던 만큼 결코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경계해도 당신은 말려들 수밖에 없다.

짧게 그런 감상을 머릿속으로 읊은 카밀루스는 들어왔을 때처럼 그녀의 손등에 키스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온 그는 황태후궁 입구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기다리고 있는 페드로를 발견했다.

그의 앞에는 과연 카밀루스가 명한 대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금장식이 된 상자 하나가 비단에 싸인 채 놓여 있었다.

척 봐도 귀한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을 듯한 그것을, 안에 들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황태후궁의 시녀들이 호기심 반 경계심 반 어린 눈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야 그 겉면만으로도 안에 어떤 것이 들었을지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상자가 저 정도이니 안에 든 물건 역시 아주 가치가 높을 것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다들 그것을 몰래 훔쳐보는 중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카밀루스가 방문을 청한 것도 아니다. 분명 황태후가 갑자기 불러들인 일정이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내온 것을 보면 늘 가지고 다녔던 게 아닐까 하는 자연스러운 의문도 그녀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제로도 카밀루스는 저 상자를 황궁을 드나들 때마다 계속 가지고 다녔다. 아주 귀찮은 일이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밀루스는 문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에 뒤돌아섰다. 그것이 인사를 받기 위한 의례적인 행동인 줄 알았던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태후 폐하의 시녀장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태후 폐하께서 선물을 거절하셨으니 어쩔 수 없이 이것들을 도로 가져가야 하겠지만…… 저중 하나이라도 꼭 건네고 싶었는데 곤란하게 됐군.”

“…….”

카밀루스의 덧붙인 말에, 그러나 시종장은 아무런 반응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는 의미다. 이미 태후는 받지 않겠다고 충분한 의사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답을 종용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태후 폐하를 다시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말이야.”

문제는 느릿하게 내뱉은 그 말이 몹시 의미심장하게 들렸다는 점이었다.

주변의 시녀들이 서로 눈빛 교환하는 것에, 시녀장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단속했다. 그리고 카밀루스에게는 적당한 경계의 말을 흘렸다.

“다시 찾아뵐 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음을 기약하시지요.”

“다음이라는 게 있겠나?”

하지만 기다렸다는 양 곧바로 나온 반문에 시녀장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카밀루스는 그 모습을 확인하곤 고개만 살짝 틀었다. 몇 발짝 뒤에 불과하지만 바깥에 있는 페드로에게 명했다.

“상자를 열어라.”

페드로는 그 말에 따라 종아리 반 정도 높이까지 올라온 상자를 봉한 열쇠를 풀었다. 뚜껑을 살짝 열자 그 안에 있는 화려한 보석들이 언뜻 비쳤다.

미약한 겨울의 햇살에도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의 빛을 보고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렸지만, 카밀루스는 그런 것들은 아랑곳 않았다. 대신 그 안에 든 펼친 손 정도의 크기인 상자를 꺼낸 뒤 뚜껑을 직접 닫아 버렸다.

하여 안쪽이 보인 건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안을 가득 채운 보석을 본 이들은 아마 충분히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왜 대공이 저런 것을 태후에게 건네려는지.

혹시 그에게 정말로 사심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런 것 따위 전혀 모른다는 듯 작은 상자를 두 손에 들고는 시녀장을 마주했다.

다음에 그가 취한 행동은 그 앞에 한쪽 무릎 꿇는 것이었다. 뜬금없으면서도 실로 황당한 그 행동에 시녀장이 놀랐다.

“대공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하지만 카밀루스는 제 행동의 이유를 담담히 설명할 뿐이었다.

“비록 면전에서 드리지는 못했어도 귀한 분께 바치는 것이니 마땅히 예를 갖추는 것에 불과해.”

달칵, 하고 황태후궁 홀의 바닥에 상자가 내려지는 소리가 울렸다.

“정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이곳에 먼지가 쌓일 때까지 두어도 괜찮겠지. 혹은 밖에 내놓아 눈비를 맞도록 해도 되겠고.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난 이것을 반드시 전해야만 해.”

“…….”

“이것을 어찌하든 뒤의 일은 상관하지 않도록 하지. 이는 단지 그분께 올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

그가 무릎까지 꿇은 마당에 시녀장은 더 이상 받겠다 안 받겠다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카밀루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충격적인 모습이 황태후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녀의 호기심을 일으켜 줄 테니.

입꼬리에 살며시 미소를 비친 카밀루스가 천천히 일어나 이번에야말로 뒤돌아 황태후궁을 빠져나왔다.

이후 페드로와 함께 태후궁 앞에서 기다리는 마차로 돌아가 앉은 그는 그 안에 페드로가 들고 왔던 상자가 도로 실리는 것을 무표정하게 확인했다.

잠시 후 마차의 문이 닫혔을 때였다. 그러자마자 저도 모르는 사이 꽤 긴장하고 있던 카밀루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탄식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역방향으로 앉아 있던 페드로가 얼른 물었다.

“해야 할 말은 전부 하셨습니까?”

카밀루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만 겁이 많은 건지 신중한 건지 경계가 심하긴 했어.”

특히나 부관이 선물을 들고 왔다는 소리에 곧바로 내쫓길 줄은 전혀 몰랐다. 적어도 일단 들인 뒤 그것을 물릴 줄 알았지.

쉽지 않았다는 카밀루스의 말에 페드로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 부분만큼은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 두고 온 ‘선물’만 확인한다면 지장은 없다. 우리의 짐작이 맞는다면 태후는 반드시 날 다시 찾게 돼 있어.”

그리고 태후가 설마 황태후궁 홀 한가운데 놓고 온 그것마저 확인하지 않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호기심에 때론 죽음까지 각오하는 게 인간이다.

카밀루스는 그 법칙에서 황태후 역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즉, 카밀루스는 근시일 내에 반드시 그녀의 부름을 받을 터이다.

그러면 이 계획은 성공이었다.

* * *

카밀루스가 떠나고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들어온 시녀장의 보고를 받고 황태후도 실로 난감해했다. 억지로 두고 갔다는 카밀루스 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마저 확인하지 않고 버리기에는 카밀루스가 단지 건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만큼 중요하다 했으니 찝찝했고, 그렇다고 안에 들여서 확인하자니 그가 쳐 둔 덫에 걸릴 듯한 불안감이 일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갈팡질팡하던 태후는 결국 몇 시간 뒤 대공이 두고 간 상자를 가져오라 일렀다.

그녀 앞에 대령된 상자는 마치 작은 보석함같이 생긴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여니 가장 먼저 반으로 접힌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카밀루스의 필체로 추정되는,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글씨가 그곳에 쓰여 있었다.

태후 폐하의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기원하겠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 그러나 태후는 그 밑에 들어 있던 작고 투명한 약병을 보고서는 실로 당황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에 든 약병은 일전에 그녀가 카밀루스에게 건넨 약병과 동일한 모양, 동일한 크기였다. 그러나 안에 든 내용물은 확연히 달랐다.

분홍색의 투명한 약.

태후는 이것이 지난번 카밀루스에게 들려 보낸 보라색 약물에 대해, 그가 일종의 대답을 돌려준 것임을 금세 깨달았다.

문제는 제 눈앞의 이 분홍색 약물이 태후의 눈에 전혀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카밀루스가 이 물건에 대해 알고 있을까.

어쩌면 겉모습만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지금 시점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이 편지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황태후는 상자를 열기 전에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카밀루스의 덫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편지를 든 손이 살며시 떨렸다.

현재 이보다 더 자신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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