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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6%입니다.]
‘완전히 엉망인데…….’
이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이불을 거두어 냈다. 그러자 목 부근이 금세 식으면서 몸에 싸늘한 오한이 돌았다.
카밀루스가 내황성을 매일같이 드나드는 동안 이온은 거의 침대 밖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좀처럼 몸살 기운이 회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심해진 탓이었다.
이래서야 진짜로 아파서 저를 못 찾아가는 거라고 버니언이 착각하기 딱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기운이 나지 않았다.
회복되지 않은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또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눈을 살짝 뜨니 음식 트레이를 들고 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어? 깼어?”
누군지 보지 않고 대충 에렌스트 경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감으려던 이온은 귀를 질러오는 높은 톤의 음성에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되돌리려 애썼다.
그러자 저와 닮은 밀빛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에밀리?”
반쯤 뛰듯이 걸어오는 그녀의 발소리가 이온이 앉아 있는 침대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이어 향긋한 양송이 수프의 냄새가 코에 훅 끼쳤다.
이온이 눈을 반짝 떠 그녀를 돌아보자 에밀리가 어느새 수프를 뜬 숟가락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오빠 아픈 게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내가 아침 준비해 왔어. 자, 아.”
입 안으로 적당히 데워진 묽은 수프가 밀려들어 왔다. 이온은 그것을 천천히 음미한 뒤 넘기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끓였니?”
“당연하지…….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알아.”
대답하면서 에밀리는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이온은 그런 동생을 물끄러미 보았다.
곧 눈이 마주치자 에밀리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수프가 맛이 없어?”
“아니, 그냥. 동생한테 걱정이나 끼치고, 못난 오빠다 싶어서.”
“얼른 낫기나 해. ……난 오빠가 아픈 거 싫단 말이야.”
벌써 수년이나 앓고 있는 오빠에게 이런 말을 하는 동생의 마음은 어떤 걸까. 머뭇거리며 덧붙이는 그녀의 뒷말을 듣고 이온은 어릴 적의 에밀리를 떠올렸다. 양 갈래로 귀엽게 머리를 묶고, 혼자서 멋대로 다다다 뛰어다니던 그 꼬마를.
제 눈에는 너무 어려 보이기만 해서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정작 그 아이의 눈물을 가장 많이 뺀 사람은 자신이었다.
제가 아파서 쓰러져 눈을 뜨면 언제나 눈이 새빨개진 에밀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을 그치기 위해서라도 꼭 회복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에 이온은 빨리 나으라는 말에 어떤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기가 어려웠다.
하여 그는 다만 에밀리에게서 수프 그릇을 받아 와 직접 떠 먹으면서 덤덤하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뭐,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니 다행이지. 여차하면 카밀루스…… 아니, 대공도 있고 말이야.”
자꾸 평소엔 이름을 부르다 보니 종종 말실수가 나왔다. 카밀루스라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에밀리가 생긋 웃더니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투로 말을 붙여 왔다.
“대공 전하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오빠.”
“응?”
“역시 두 사람은, 좋아하는 사이가 맞는 거지?”
그릇에 수프가 아직 반 정도 채워져 있었으나 이온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숟갈 더 떠먹고는 트레이에 그릇을 내려 두며 순순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그래.”
에밀리에겐 이미 한참 전에 들키긴 했지만 타인에게 직접 카밀루스와의 관계를 시인하는 것은 역시 좀 민망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역시…….”
“왜, 이상해? 남자끼리라서?”
에밀리는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잘됐다고 생각해. 오빠는 대공 전하를 예전부터 좋아했잖아. 그리고 떠났을 때도 많이 슬퍼했고…….”
왜인지 정곡을 찔러 오는 그녀의 말에 이온은 긴장했다. 카밀루스가 떠나갈 당시에 에밀리는 분명 아주 어렸는데, 저렇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
“내가 너한테도 그런 티를 냈던가?”
넌지시 떠보는 소리에 에밀리는 오히려 왜 이런 걸 묻느냐는 듯이 반응해 왔다. 곧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이온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과거의 한 부분이었다.
“기억 안 나? 나랑 같이 잘 때 종종 황성에 사는 남자아이 얘기를 해 줬잖아.”
“……!”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그 전의…… 이온 크레이거의 과거.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작스럽게 마주한 그 이야기에 이온은 반응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다행히 그릇을 정리하고 협탁에 올려 두던 에밀리는 이온의 당황한 표정을 보지 못했고, 덕분에 그사이 표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에밀리는 계속해서 그때의 이야기를 즐겁게 이어 갔다.
“어렸을 땐 난 그게 지금의 황제 폐하 이야기인 줄 알았어. 그런데 대공 전하가 돌아온 뒤로 문득 떠올려 보니 그분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게 맞는 거지, 오빠?”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느라 잠시 반응을 못 하는 것에, 에밀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아니야?”
그러니까 이온 크레이거가…… 탑에 드나들 당시 에밀리에게 카밀루스의 이야기를 해 줬던 건가?
자신은 왜 그간 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었던 건지 황당할 정도였다. 에밀리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라고만 생각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온 크레이거가 설마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떠벌렸을 줄도 몰랐다.
‘어린 동생한테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가. 보아하니 특정되게 이야기하지도 않은 것 같으니…….’
이온은 혹시나 말을 더듬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대꾸했다.
“아니, 맞아.”
단지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여 답이 늦은 데 대한 변명까지 덧붙였다.
“나도 워낙 어렸을 때라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자세히 안 떠올라서 더듬느라.”
“혹시 나랑 놀았던 것도 전혀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야?”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에밀리에게 픽 웃어 보인 그는 제 기억 중 적당한 것 하나를 꺼내 상황을 적당히 넘기려 했다.
“그럴 리가.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새소리 난다고 달려갔다가 엉덩방아 찧은 적도 있잖아.”
다행히 그날의 기억이 에밀리의 머릿속에도 있는지, 그녀가 금세 얼굴을 붉혔다.
“맞아, 그때 오빠도 나 넘어진 거 보고 웃었었지? 전부 마음속에 새겨 놨었다고.”
에밀리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것에 이온이 작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에밀리도 생긋 웃었다. 어렸을 때 얘기를 하니 기분 좋아진 듯했다.
그녀가 침대 쪽으로 좀 더 의자를 바짝 붙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난 오빠가 그때 얘기는 전혀 안 해서, 전부 잊어버렸나 했어…….”
“그럴 리 있니? 네가 얼마나 귀여운 동생이었는데. 물론 사고뭉치이기도 했고.”
이온에게 에밀리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아마 자신이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이온 크레이거 역시 그녀를 많이 아꼈던 것 같았다.
무섭다고 하면 같이 자 주고, 책도 읽어 주는 다정한 오빠.
사실 자신도 그런 오빠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었다. 몸이 좋지 못해 많이 해 준 것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는 에밀리의 손을 제 손으로 살짝 덮었다. 그러자 에밀리가 시선을 마주해 왔고, 그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이온이 침착하게 말을 더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말했었지? 저주에 걸렸을 당시에 충격이 있었는지 그 전의 일은 흐릿하다고. 완벽하지 못해.”
“맞아, 오빠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어.”
에밀리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쉽게 납득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휘발된 그의 기억이 아까운 듯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뭔가 아깝다…… 그때 오빠랑 재밌었는데. 책도 많이 읽어 주고,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 줬었어. 오빤 아버지 따라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었잖아. 분명히 나한테 얘기해 주지 않은 것 중에도 신나는 일이 많았을 텐데.”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 줄게.”
“흥, 요즘은 내 얼굴 볼 시간도 얼마 없으면서…….”
그녀의 투덜거림에 이온이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팔에 매달려 왔다.
그렇게 분위기가 적당히 수습되자 이온이 살며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에밀리.”
“으응?”
에밀리가 팔에 기대었던 얼굴을 들어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혹시…… 내가 아버지한테 체벌방에 갇혔던 때의 일, 기억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