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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67)화 (167/317)

이온에게서 이런 질문을 들을 줄 몰랐다는 양 에밀리는 멍한 표정을 한 채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침을 꿀꺽 삼킨 뒤 그녀가 조심히 물어 왔다. 

“음, 기억해 내야 하는 게…… 따로 있어?”

별다르게 듣고 싶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이온은 티 내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냥 궁금할 뿐이야. 그 전후 해서 내가 달라진 점이 있었나 해서.”

에밀리는 하나씩 더듬어 올라가는 듯이, 일단은 전부 다 아는 사실부터 입에 올렸다.

“오빠는 그 후부터 아프기 시작했잖아.”

“그래, 그랬지.”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눈알까지 도록도록 굴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에밀리는 이내 도리질을 했다.

“딱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없었던 거 같아. 오빠는 늘 같은 오빠였는걸.”

“그렇구나.”

이온은 다소 실망한 바람에 그 한마디 외에는 선뜻 건네지 못했다. 그러자 기색을 알아차린 에밀리가 머리를 쥐어짜다가 핑거 스냅을 쳤다.

“달라진 거……. 맞아, 그 전엔 오빠도 마법을 쓸 수 있었잖아?”

“그랬었지?”

“대공 전하께 뭔가 많이 배운 거 같았어. 원래 빛 구슬 좀 띄우는 게 전부였는데 어느 날엔가는 나한테 마법으로 얼음 장미도 만들어 줬었거든. 하지만 금세 녹아서 속상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에밀리는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주로 인해 이온이 더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앉아 있는 이온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기대어 눕자, 이온은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독였다.

“저주가 풀려서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면 그 얼음 장미 만들어 줄게, 에밀리.”

“진짜?”

“그래, 꼭.”

“응, 응…….”

오랜만에 어릴 적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에밀리는 그때로 돌아간 듯이 오빠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이온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왠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쓰다듬을 받으며 게으른 고양이처럼 있던 에밀리가 문득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말이야, 오빠.”

“응?”

“체벌방에 갇힌 전날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오빠가 마법으로 어머니가 아끼던 접시 하나를 깨뜨려서 혼난 일이 있었어.”

“내가?”

마법으로 깨뜨렸다니, 다분히 고의성이 느껴지는 일이라 믿기지 않아 반문하니 에밀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 오빠가 사고 쳐서 어머니한테 혼난 적은 그때뿐이었잖아. 접시도 아주 가루로 만들었던 거 같은데……. 이것도 잊어버렸어?”

에밀리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잊느냐는 표정으로 이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온은 적당한 임기응변으로 넘겼다.

“나쁜 짓 한 거라 금방 잊었나 보다.”

에밀리는 다행히 까르르 웃었다. 도로 이온의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진짜 충격받은 표정이었었는데.”

“그래?”

에밀리는 이온을 혼내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하게도 그것마저 즐거운 추억이라는 양 그 말을 할 때의 에밀리는 꿈꾸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정히 웃어 주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을 떠올렸다

이온 크레이거가 그렇게 말썽쟁이는 아니었던 듯한데, 접시를 깨뜨렸다고? 어머니가 아끼는 접시라고 했으니 그녀에게 반항하는 의미가 아닌 이상에야 왜 깨뜨리는지 명확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온은 문득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그 깨뜨리는 마법을 카밀루스에게서 배웠다고 가정했을 때, 그와 연관지어서 생각할 만한 건 하나였다.

돌아왔던 기억 속에서 카밀루스는 손발에 족쇄 형태의 금제를 달고 다녔었다. 당연히 카밀루스를 탑에서 꺼내 주려면 그 금제를 깨야 했을 터였다.

그러니 그걸 부수는 연습을 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데 이 가설은 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하나.

“뭔가 이상한데…….”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린 소리에 에밀리가 이온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오빠의 작은 반응에도 그녀는 눈에 호기심이 잔뜩 매달고 있었다.

“뭐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온은 잠깐 다른 생각 한 거라며, 별거 아니라고 웃어 보였으나 실제로 그 속은 꽤 복잡했다.

그러고 보면 이온 크레이거와 카밀루스가 함께 황성의 탑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을 해서 여태껏 놓친 게 하나 있다.

이는 탑을 이미 나와 상황이 종료됐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나온 빈틈이었다.

곧, 나오는 상황이 어떻게 이루어졌을지를 되짚어 봤을 때의 문제였다.

바로 금제를 누가 깼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는 논리적인 비약이 하나 이루어져야 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카밀루스가 스스로 금제를 깰 수 있었다면 탑에 갇혀 있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둘이서 탑을 나왔을 때 카밀루스가 금제를 부수진 못했을 테니, 결국은 이온 크레이거가 그 족쇄를 부쉈다는 의미밖에는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적 능력 면에서 이온 크레이거가 카밀루스를 뛰어넘을 영역이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잠깐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간단한 마법조차 금방 꺼뜨리는 아이였다. 그런데 카밀루스조차 어찌하지 못한 금제를, 탈출할 때 이온 크레이거가 깼다?

이것이 논리의 비약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가정을 더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나……?’

하지만 카밀루스에게서 탈출 당시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게다가 카밀루스의 탈출을, 아니 적어도 금제를 깰 걸 도울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상대는 당시의 카밀루스보다 더 강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단순히 ‘강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금 떠오르는 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재니스?’

아니, 말이 안 된다.

그는 선황과 함께 카밀루스의 학대를 주도했던 사람이다. 어린아이를 탑에 가두고서 실험과 폭력을 자행했다.

‘하지만…….’

카밀루스에 필적할 만한 거의 유일한 사람인데 그것만을 이유로 재니스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혹시 그의 목적이 중간에 바뀌었다면.’

카밀루스를 풀어주어도 되는 모종의 이유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 역시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마탑주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의문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되레 늘어만 갔다. 명확한 것이 없으니 가정에 또 다른 가정이 얹혀지는 탓이다.

막막함에 잠시 멍해졌을 때, 생각을 차단하듯 누군가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에 에밀리가 몸을 일으키고, 이온도 바깥을 향해 얼른 물었다.

“누구야?”

들려온 건 전담 버틀러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서둘러 나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황궁이라면 버니언이 사람을 보냈다는 뜻이다.

편지를 가로챈 지 꽤 됐는데도 어쩐지 잠잠하다 싶었다. 올 게 왔구나 싶어 이온은 일단 에밀리를 내보냈다.

에밀리는 아쉬운 듯 조금 투덜거렸으나 버틀러가 문을 열고 새 옷을 가지고 들어오자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간 뒤 비실거리는 몸 때문에 이온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버틀러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준비를 다 하고도 도무지 혼자 일어날 자신이 없어 에렌스트 경을 불러 그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하고,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에렌스트 경이 염려 어린 말을 건네어 왔다.

“괜찮으신 겁니까, 도련님?”

“그냥 컨디션이 상당히 저조할 뿐이야.”

“…….”

대답하면서 이 꼴이 버니언에게 전해질 것을 생각하니 속이 조금 뒤틀렸다.

부디 그가 자신이 진짜로 아파서 못 찾아갔다는 착각 속에 헤매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게 비극이었다.

에렌스트 경은 이온의 대꾸에도 얼굴이 더 어두워졌지만, 이제 이온은 이렇게 곧 죽을 것 같은 상태라도 사망 확률이 100이 되지 않는 이상에야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렌스트 경에게 죽을 걱정 없으니 염려 말라고 말해 주기도 모호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계단을 무사히 내려가 저택의 정문으로 향하자 크레이거 공작이 먼저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그곳에 다가선 이온이 부르는 소리에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에렌스트 경이 붙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이온, 몸이 그렇게 불편하면 더 쉬지 않고.”

“황궁에서 왔다면서요. 무슨 일이에요?”

이온이 묻자 공작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돌렸다.

활짝 열린 저택의 문 사이로 보이는 눈 내린 마당에 화려한 황궁발 마차 다섯 대가 들어와 있었다.

황궁에서 온 심부름꾼이 그 앞에 서서 이온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아무래도 버니언이 꼭 자신을 만나고 오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듯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그 앞에서 곤란해하는 투로 설명했다.

“폐하께서 네게 선물을 보내오신 모양이다.”

저렇게 많이.

공작의 말엔 그런 탄식이 섞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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