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의 문턱을 밟고 살짝 밖으로 나간 이온은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한 감상을 속으로 읊었다.
‘생각보다 통이 크네.’
이온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앞에서 황궁에서 온 시종이 대충 저택의 정문 앞에 서서, 황제께서 은혜를 내렸으니 고마워하라는 요지의 말을 떠들어 댔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남의 부축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버니언의 앞에 낱낱이 보고될 것을 생각하니 좀 짜증이 났다.
듣자 하니 그들이 가져온 선물은 몸살감기에 좋은 약들과 음식들, 그리고 기타 주고 싶어서 소소하게 챙긴 물건들이라고 했다.
솔직히 어떤 보석을 가져다 바쳐도 별로 감흥이 일지 않을 것이지만, 이온은 설명을 들으며 인형처럼 가식적으로 웃기만 했다.
그렇게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온이 옆의 에렌스트 경에게 입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작게 물었다.
“카밀루스는 언제 나갔어?”
“오늘도 평소처럼 아침에 나가셨습니다. 인사 못 나누셨습니까? 도련님 방 쪽으로 향하는 걸 봤었는데요.”
“그럼 자고 있어서 그냥 갔나 보네.”
요 며칠 카밀루스와 계속 엇갈리고 있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건너건너로만 듣다 보니 조금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버니언이 보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지금이라도 카밀루스가 돌아와 저들을 쫓아내 줬으면 하는 바람도 드는 터라, 괜스레 그를 찾게 되었다.
자신은 피곤하게 저들의 헛소리를 계속 들어 줘야 하는 입장이지만, 일단 그가 나타나면 저들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슬슬 황태후가 바람이 들어갔을 때가 됐을 텐데요.”
“그렇지, 다들 겨울이라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사교 모임들이 한창이니…….”
이온은 말하다가 상대의 전언이 다 끝난 것을 알아채고, 말을 끊었다. 그러고 살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옅게 쌓인 터라 계단 위가 미끈거렸다. 굳이 컨디션 문제가 아니라도 에렌스트 경의 부축이 없었으면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뒤에서 크레이거 공작이 불안하게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일단 황궁 시종의 앞으로 다가선 이온이 그와 마주했다.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에렌스트 경을 물린 그가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어 아직 잠을 다 떨치지 못한 이온의 초록빛 눈이 사르르 눈웃음을 짓자 왜인지 상대가 약간 긴장한 얼굴을 했다.
이온은 그런 그를 보며 상대를 허탈하게 할 만한 한마디를 흘렸다.
“아무래도 제 지난 편지가 폐하의 걱정을 더해 드린 모양입니다.”
예상대로 그 한마디로 시끄럽게 떠들던 황궁 시종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의 방문은 이온 크레이거가 버니언의 편지를 받고서 답신도 없이 가만히 있음으로써 촉발된 것일 터였다.
순식간에 이곳에 온 목적이 사라져 버린 상대는 심히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편지 말씀이십니까?”
이온이 보낸 편지가 버니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을 테니 상대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온은 전혀 사정을 모르는 척 짧은 설명을 더했다.
“네, 지난번에 폐하께서 제게 편지를 보냈기에 답신을 보냈었는데…… 그곳에 괜한 엄살을 떨었나 싶네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덜 된 황궁 시종이 이내 조심스럽게 되물어 왔다.
“저, 실례지만 소공작께서 폐하께 답신을 보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에 이온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왜 새삼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그럼요. 제가 감히 황제 폐하의 편지를 받고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않을 만큼 무례한 짓을 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게, 황궁에는 도착한 편지가 없어…….”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요?”
“예.”
이때까지만 해도 이온이 단순히 착각을 한 거겠거니 생각하며 담담히 대답하던 황궁 시종이 다음 이온의 물음에 표정이 딱 굳었다.
“아, 그래서 혹시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시던 것이었나요?”
“……소공작, 그건!”
대화의 방향이 순식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기미를 보이자 시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공작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변명을 하려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맞게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문 앞이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공작?”
꽤 묵직한 구두굽 소리가 시종의 옆에서 울렸고, 새로이 등장한 그 사람에게로 순간 이목이 쏠렸다.
상대는 크레이거의 이름을 달지 않은 자 중에서 유일하게 저택의 문턱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카밀루스였다.
“대공 전하…….”
방금까지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이온조차 그가 진짜로 이때에 맞추어 나타날 줄은 몰랐던 터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그 소리에 이온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던 카밀루스가 이내 황궁에서 온 마차들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황궁에서 온 모양이군. 황제께서 보낸 건가?”
그가 마차의 입구에 드리운 휘장을 확인한 뒤 황궁 시종을 돌아보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상대가 얼른 거리를 벌리고는 먼저 인사를 올렸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고개만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대강 인사를 받아들인 그의 모습을 보며 이온이 한마디 붙였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군요, 대공.”
원래라면 오늘도 저녁쯤 돌아올 예정이었을 그가 일찍 나타난 이유를 그리 돌려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입꼬리에 살며시 미소를 비쳤다.
“아, 다행히 볼일이 끝나서.”
이온의 귀에는 그것이 황태후를 만났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온은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서둘러 묻고 싶었지만, 카밀루스가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소공작,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아, 별것 아닙니다. 그저…….”
카밀루스의 질문에 이온이 황궁에서 온 시종을 돌아보면서 눈치를 주었다.
“아무래도 제 편지가 황궁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분실이 된 모양인데, 제가 답신을 안 한 것으로 오해가 생겼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한 것으로 몰리고 있었습니다만.”
“소공작, 제 말뜻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오해라는 듯, 시종이 곤란해하는 투로 그리 대꾸했으나 이온은 여전히 억울한 척 엄살을 부렸다.
“그런가요? 뭐, 어쨌든 이 자리에서 제 결백을 증명하기가 참 곤란하니…….”
그가 말끝을 흐리자 카밀루스가 금세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황궁 시종을 한번 힐끗했다.
“황궁으로 보낸 것은 확실합니까, 소공작?”
“당연합니다. ……내가 보내 달라고 했던 것 기억하지, 알렉?”
“예, 저희 가문의 집사장이 직접 사람을 써 보낸 것으로 압니다만.”
이온의 시선을 받았던 에렌스트 경이 뒤를 돌아보며 공작의 주변에 서 있는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제게까지 순서가 올 줄 몰랐던 집사장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해 왔으나, 다행히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았다.
“황궁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사람을 내황성에 보냈었습니다.”
사전에 말을 맞춘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짜고 치는 판처럼 매끄럽게 상황이 굴러갔고, 표적이 된 황궁 시종은 의도대로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카밀루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상황 정리를 위해 나섰다.
“내황성까지 잘 통과를 했다고 하면, 그 이후부터는 어디의 문제지?”
질문 하나로 문제의 근원이 크레이거가가 아님을 명확히 한 그의 발언에, 황궁 시종이 크게 숨을 삼켰다.
“돌아가서 다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카밀루스가 상대에게 한 걸음 다가서더니 허리를 살짝 굽혔다. 뒷짐을 진 그가 반협박조로 시종을 압박했다.
“그렇지? 애꿎은 데다 화풀이를 하면 안 되니. 무엇보다 여기는 크레이거 공작가다. 저기 공작도 이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는데 실수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비록 황제의 명으로 파견된 이라고는 하나, 대공과 공작의 바로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궁 시종은 눈을 내리깔며 카밀루스의 말에 동조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공 전하.”
“아니면 혹시 내가 이곳에 있으니 좀 들쑤셔 볼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닌가 싶기는 한데?”
“오, 오해이십니다. 오늘 방문 목적은 단지 소공작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식에 걱정이 된 황제 폐하께서 여러 약과 선물을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것을 전하러 온 것에 불과합니다.”
계속되는 압박에 완전히 기가 죽어 그리 말하는 시종에게 카밀루스가 살며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아니, 오히려 나의 친우를 걱정해 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듣는 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온을 향한 몹시도 친근한 호칭은, 누가 봐도 의도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긴장한 표정의 황궁 시종이 제 옆의 카밀루스를 한번 힐끗하고는 이온과 크레이거 공작을 순서대로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의 입에서도, 방금 전 카밀루스의 발언을 부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곧 절대적인 황실의 우군인 크레이거 공작가의 전향을 의심하게 하는 징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