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크레이거 공작이 카밀루스를 저택에 들였을 때에 버니언이 견제를 하려고 공작을 곧바로 황궁으로 불러들인 전례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아직 북부의 귀족들을 포섭하지 못했을 지금 시점에서 보면 카밀루스는 이름뿐인 대공에 불과했다. 권한이 있어 봤자 뭐 하는가, 따르는 사람이 없는데.
다만 그동안 얌전히 있던 크레이거 공작이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크레이거 가문은 현재 오브라이언 서부의 귀족들을 통솔하는 존재였기에.
서둘러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시종은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황제 폐하의 뜻을 이리도 잘 알아주시고 이 자리에서의 오해를 풀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공 전하.”
겉으로는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나, 결국 시종이 전한 속뜻은 물러가겠으니 그만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황궁 시종이 마차로 향하려는 길을 막은 채로 제 부관을 불렀다.
“페드로, 펜과 종이가 있나?”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페드로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온의 버틀러가 나서서 그에게 펜과 작은 종이를 가져다주었다.
카밀루스는 종이에 짧은 전언을 쓰더니 간단히 두 번 접어 시종에게 건넸다.
“폐하께 전해라,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설마 이마저도 중간에 누락이 되진 않겠지?”
카밀루스의 일침에 황궁 시종은 그야말로 썩은 달걀 씹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불평불만의 소리를 하지 못하고, 카밀루스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 아무렇게나 내민 그것을 예의 바르게 받아 들었다.
“틀림없이 전하겠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그만했으면 하는 의중을 계속해서 드러내던 그의 앞길이 드디어 트였다.
드디어 가나 싶었던 황궁 시종이 옅게 한숨마저 내쉬는데, 이번엔 둘을 지켜보던 이온이 끼어들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폐하께 저는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짧은 한마디에 잠시 돌아본 시종과 이온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휘어 해사하게 웃는 이온의 표정은 얼핏 다정하게도 보였지만, 그가 하는 말은 상대의 속을 긁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제가 보냈던 편지에 적힌 대로 다음에 만날 기회가 분명 있을 테니 그때 뵙고 인사드리겠다고도.”
황실에서 편지를 분실했다고 결론이 난 참인데, 그 내용을 운운하는 이온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한마디로 어떻게든 찾아서 내용을 확인하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황궁 시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황제의 명을 받고 가지고 온 물품들을 전부 다 수거해 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그에게는 그럴 권한 따윈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이온이 태연하게 말을 덧붙이자 시종의 속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 버렸다.
“폐하께서 직접 이렇게 많이 준비해 주셨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안으로 전부 들여야겠어요, 아버지.”
이온이 뒤돌아보자 계속 뒷짐만 진 채로 냉담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크레이거 공작이 시종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리하라 이르마. 아직 이곳에 볼일이 더 남았나?”
어서 내 저택에서 썩 꺼지라는 의미가 담긴 물음에 시종은 차라리 이편이 속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닙니다, 각하. ……그럼 소공작의 말은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시종의 얼굴에서는 이미 저택에 막 들어섰을 때의 당당함 따윈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버니언의 선물들을 저택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보며 턱이 뻐근해질 만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짐을 모두 옮기고 나자 다섯 대의 마차는 왔을 때와 달리 가벼워져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루미에르 홀을 떠나갔다.
그들을 눈으로 따르던 카밀루스는 마지막 마차가 저택의 대문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온의 앞으로 와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소공작, 제 손을…….”
이온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마주 잡았고, 크레이거 공작은 그들을 안으로 들인 뒤 함께 뒤돌아섰다.
곧 오래된 저택의 정문이 양쪽에서 당겨지고, 쿵 닫혔다.
* * *
평소 꽤 조용한 편인 크레이거 가문의 저택이 황궁에서 보낸 선물들을 정리하느라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었다.
버니언이 보낸 것들엔 이온에게 먹일 약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외의 선물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간단하게는 간식·차부터 시작해서 이온이 좋아할 만한 책들이 있었고, 옷감으로 쓸 만한 고급 실크도 함께했다.
그렇게 사용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가며 물품들을 저택의 필요한 곳으로 옮기는 와중,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온 이온은 도로 침대에 눕기 싫다는 이유로 2층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저택 홀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옆에 선 카밀루스는 그 모습을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어깨를 붙잡았다.
“이러다 떨어져.”
7살 먹은 어린아이한테나 할 법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그가 뒤로 끌어당기자 이온이 피식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호들갑이 심하네. 혹시 질투라도 해?”
이온의 물음에 카밀루스는 좀 불쾌하다는 양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그 자식을 질투해? 그 자식이 날 보고 하는 거면 몰라도.”
“그럼 분한 건가. 이번엔 버니언이 선수를 친 셈인데…….”
말끝을 흐린 이온이 새초롬히 눈웃음을 그리며 카밀루스의 크라바트를 붙잡고 살짝 당겼다.
당기는 대로 고개를 숙여 끌려온 카밀루스는 난간을 붙들어 몸을 지탱하는 한편, 반대편 손으로는 이온의 어깨를 안았다.
제가 그를 당겼음에도 그렇게 막상 얼굴이 가까워지고 살결 위로 숨결이 닿자 긴장한 건 이온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빛을 띠는 파란 눈동자를 올려다보면서 잠깐 넋을 놓은 사이, 카밀루스가 조용조용하면서도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럼 저도 근사한 선물을 드릴까요, 소공작?”
“…….”
그의 은밀한 제안이 뭘 뜻하는지 상상하던 이온은 양 뺨을 살짝 붉혔다.
1층의 누구든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을 넘은 셈이다. 하지만 뭘 더 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카밀루스의 몸짓과 표정에 생각은 야릇한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싫어?”
카밀루스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워지면서 얼굴에 소름이 스며들었다.
괜히 도발했다 싶어진 이온은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뭔가 하려면 안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카밀루스.”
그러자 이온의 머리칼 위로 입술이 살짝 스치는가 싶더니 카밀루스가 어깨를 붙잡고 그의 등을 돌리게 했다.
뒤돌아서자마자 그는 이온을 안아 들고 그대로 회랑을 성큼성큼 걸었다. 곧 이온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카밀루스는 이온을 벽에 기대게 했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달라붙은 순간이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카밀루스가 입술을 겹쳐 왔다.
오랜만에 이루어지는 스킨십은 둘 사이에 금세 불을 붙였다. 벌린 입술 사이로 카밀루스의 혀가 들어와 안쪽을 휘젓기 시작하자 숨이 달아올랐다.
이온은 제 몸을 살짝 드는 그의 손길에 따라 허벅지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팔을 감아 목에 매달렸다.
헐렁한 옷 사이로 들어온 커다란 손이 이전보다 더 가늘어진 이온의 허리를 더듬어 올라갔다. 오늘따라 키스는 급하게 이어졌다. 그에 이온이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자, 카밀루스가 입술을 살짝 떼어 내며 물었다.
“며칠 못 본 새에 또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잠만 자서…….”
먹고 잠만 자면 당연히 살이 쪄야 하는 것 아닌가?
카밀루스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더는 못 밀어붙이겠는지 이온을 꼭 안고 있다가, 침대에 데려가 걸터앉게 했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카밀루스가 이온의 마른 손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진짜, 속상하게.”
“이러다 또 괜찮아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살도 잘 찌워 볼게.
이온이 자신 없이 덧붙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던 카밀루스가 이내 그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차례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의미 모를 미소를 살짝 짓더니 한마디 했다.
“준비한 게 맞지 않을까 봐 하는 소리야.”
“그게 무슨 뜻이야?”
묻는 순간 손가락에 뭔가 딱딱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어 이온이 시선을 내리자, 어느새 왼손 약지에 끼워진 얇고 가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봐, 헐렁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