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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70)화 (170/317)

이온은 제 손에 물건이 걸쳐져 있는 게 낯설어 한동안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선물을 준다는 건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지, 진짜로 물질적인 뭔가가 튀어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조금 당황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카밀루스가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돌리며 이온을 나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너 자는 동안 사이즈 잰다고 조마조마했는데, 보람도 없게 이게 뭐야?”

이온은 근래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이온이 계획한 일 외에도 카밀루스가 따로 해야 할 일도 많았을 터다.

그래서 전혀 틈을 내지 못하리라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

“우리 사귀는 거라며, 그럼 당연히 고백도 해야지.”

카밀루스가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묻냐는 양 이온의 볼을 꼬집었다. 저를 지그시 응시해 오는 다정한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온의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해졌다.

카밀루스의 눈에서 마치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멜로 눈깔이라는 소리다.

이온은 왜인지 부끄러워져 카밀루스의 얼굴 대신 제 손에 걸린 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귀는 거랑 고백하는 거랑 순서가 바뀐 거 같은데……?”

“우리가 바뀐 게 어디 그것뿐이야?”

맞다, 사실 잠부터 잤다.

서로 좋아하는데 같이 삽질하느라.

“그렇게 된 데는 네 역할도 꽤 컸는데…….”

이온은 괜히 꿍얼꿍얼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온은 사귀는 것보다 고백이 늦었던 건 카밀루스의 눈치 없음이 원인의 8할을 차지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이온의 불만 어린 말을 들은 카밀루스는 갑자기 풉, 소리를 내더니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침대 위로 올라와 이온을 와락 껴안고는 뺨에 몇 번이고 마구 키스를 해 댔다.

“아, 진짜 미치겠네.”

입술을 가져다 대는 와중에도 카밀루스는 계속 웃음소리를 이어 가다가, 가슴 벅차 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이온? 진짜 귀여워. 나 진짜 네가 너무 예뻐서 못 살겠어. 널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거 같아.”

얘가 또 왜 이러나 싶어진 이온은 그의 품 안에서 몸을 꿈틀댔다.

“진짜로 버니언한테 자극이라도 받았어? 왜 이렇게 들이대?”

그러자 카밀루스가 벗어나지 못하게 이온을 더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게 말이지, 대문 앞에서 그 자식이 보낸 선물들을 보는데 왠지.”

“왠지?”

“녀석이 꽤 진지하게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졌었거든.”

“…….”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사실 이온도 버니언이 가져다준 밖의 선물들이 그렇게 기껍지는 않았다.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보낸 사람이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카밀루스도 이온과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 언뜻 질투하는 감정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과는 또 미묘하게 다른 무엇이었다.

“저 선물 다 갖다 버리라고 외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럼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까.”

약간의 투덜거림이 스며 있는 카밀루스의 말에 이온이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나니 카밀루스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데, 머릿결이 부드러워서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그가 왜 종종 제 머리를 쓰다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이 일이 다 끝나면 전부 버릴게. 하인들한테도 절대 쓰지 말라고 말해 두고.”

이온이 적당히 달래는 소리를 건넸는데도 카밀루스는 불만이 가시지 않았는지 오히려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인 모양이었다. 하여 이온이 장난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대공 전하께서도 삐치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절대 안 삐쳤는데?”

예로부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는데, 카밀루스는 아마 그걸 모르는가 보다.

이온은 그러는 그가 귀여워서 쿡쿡거리다 그만 옆으로 가라고 살짝 밀어 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침대 헤드에 나란히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

최근 거의 매일같이 눈이 내렸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낮의 햇살이 부드럽게 두 사람의 몸에 비쳐 들었다.

그에 약간 졸음기가 몰려와 이온의 눈이 살짝 감길 무렵이었다.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그를 제게 기대게 하려는데 이온이 돌연 “아!” 하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카밀루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막 어깨를 감싸려던 카밀루스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이온은 그런 그의 민망함은 알아채지 못한 채로 카밀루스 쪽으로 몸을 틀고 재빨리 말을 붙였다.

“혹시 말이야, 탑에서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줬었어?”

느닷없는 물음에 카밀루스는 잠시 이온을 정면에서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좀 민망해진 이온이 괜히 목덜미를 쓸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카밀루스는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되어 조금 머뭇거렸다.

“아니…… 새삼 네가 기억이 없다는 게 실감이 돼서.”

이온이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짓자 카밀루스가 얼른 제 표정부터 수습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답을 내 주었다.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하니까. 맞아, 너한테 가르쳐 줬었어. 네가 탑에 두 번째로 찾아온 날에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거든.”

“그래……?”

왠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기분이라 이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분명 아니다. 죄책감 비스름한 감정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게다가 오랜만에 예전 일을 떠올리는 카밀루스의 양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이자 이온은 반대로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사실 또 찾아올 줄 몰랐어서 그냥 이상한 애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너무 간절하게 애원하는 거야.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이온이 더 얘기해 달라고 눈짓하자 카밀루스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마법을 못해서 어디서 놀림받았나 싶었어. 당시에 그 탑에 드나들었던 마법사들은 전부 수준급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난 네가 고작 내가 쓰는 마법 하나에 놀라는 게 이해가 안 됐거든.”

얘기를 들어 보니 그가 충분히 할 법한 착각이라 이온은 저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온의 반응이 별로 유쾌하지 못한 것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얼른 화제를 끊고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건 네 핑계였던 거 같아. 탑에 찾아오고 싶어서 댄 핑계…….”

그러고 카밀루스가 뭐 더 궁금한 거 있냐는 듯 눈을 마주쳐 오자 이온은 그 은근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질문을 더했다.

“그래서 그때 나한테 무슨 마법을 가르쳐 줬어?”

이 물음엔 카밀루스는 대답을 고르는 듯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곧 그의 손안에서 하얀 얼음이 생성되었다.

예의 얼음은 잠시 뒤 하나의 형상을 띠었다.

“제 순정을 바칩니다, 이온 크레이거 군.”

제게 진짜 장미를 선물하던 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그가 건넨 건 얼음 장미였다.

얼마나 차가운지 살짝 뽀얗게 연기가 흐르는 꽃을 받아 드는데, 신기하게 손이 닿는 부분엔 다사로운 온기마저 감돌았다.

이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면서도, 입으로는 카밀루스에게 핀잔을 두었다.

“……그때도 이런 구린 멘트를 했었어?”

카밀루스가 헛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아니지. 왜 이런 것도 못 하냐고 구박하면서 알려 줬지.”

“칫.”

마나를 품고 있는 것인지 투명한 꽃엔 따뜻함과 더불어 푸른빛이 감돌았다.

……아름답다.

순수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물어 왔다.

“기억, 안 나?”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질문이었다.

이온은 그가 어떤 심경으로 그리 묻는지 알 것 같아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역시 내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지?”

딱히 부정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실 카밀루스로서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일 터였다. 이온도 그 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입 안이 씁쓸해졌다.

“상관없다는 건 사실 그냥 날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잖아, 안 그래?”

“이온…….”

“나도 알아, 네가 그 추억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래서 나도 떠올리고 싶은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으려 했지만 결국 말꼬리가 흐려졌다.

근데 난 그 애가 아니라잖아, 널 이렇게 좋아하는데도.

차마 토해 내지 못하는 그 속말을 입술을 깨물며 삼켰다. 그에 카밀루스가 어느새 제 눈길을 피하는 이온의 얼굴을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았다.

카밀루스의 손이 이온의 어깨를 감싸 왔다. 달래듯이, 다정하게.

“내가 혹시 너한테 부담을 주고 있어?”

이온은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여전히 제 다리를 내려다보며 도리질했다.

그놈의 기억 때문에 상대를 괴롭히는 건 오히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온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눈에 걱정을 매단 건 이번에도 카밀루스였다.

“그런데 왜 네가 그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이온은 손에 쥔 얼음 장미의 꽃대를 만지작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싶어, 전부.”

“…….”

양심 없는 소회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제 것도 아닌데 돌려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억지이니까.

그럼에도 이온은 원했다.

단순히 기억의 공백이 싫다거나, 궁금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옛날의 기억을 되찾으면 카밀루스가 자신을 더 사랑해 줄 것 같아서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점점 커져만 가는 감정 앞에서 이온은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온은 눈을 들었다. 그의 초록빛 눈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카밀루스.”

“말해.”

“탑에 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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