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에 가 보고 싶어.”
이온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단지 퀘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짜로 그곳에 가면 제 기억의 일부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실제로 그러할지에 대한 단서는 전혀 없지만…….’
애초에 시스템도 상태 이상 ‘기억 상실’의 해제 조건이 뭔지 전혀 알려 준 적이 없다. 중간 조건을 충족한 것도 목숨이 걸려서 그렇지, 우연히 얻어걸린 것에 불과했다.
물론 탑과 그 주변부는 현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폐쇄되었다. 하지만 카밀루스의 능력으로는 충분히 접근 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너라면 데려다줄 수 있지?”
뒤이은 이온의 질문에 카밀루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모르는 진실로 향하는 열쇠가 탑이라는 것은 맞지만, 설마 이온이 직접 그곳으로 가길 희망할 줄은 몰랐던 터였다.
“이온, 거긴 너한테 너무 위험한데…….”
카밀루스가 정말 꼭 가야겠냐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자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리란 건 알아.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답답하게 살 수는 없잖아. 기억이 돌아오면 나한테 저주를 건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게 될지도 모르고. 그게 우리가 가장 원하는 부분 아니야?”
“……하지만 지금 그곳은 이중 결계로 막혀 있어.”
“네 능력으로도 그 결계를 못 깨?”
“아니, 가능해. 그렇지만 깨면 시전자가, 아마 재니스겠지, 곧장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진짜 문제는 깬 다음이야. 결계가 만약 무언가를 억제하기 위한 거라면 감당 못 할 게 튀어나올 확률도 있겠지.”
탑 안쪽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루스의 말은 지나치게 신중했다.
그의 정치적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조차 마법적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카밀루스는 언제든 제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저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상정해 두는 듯했다.
물론 신중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겠다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런 걸 핑계로 카밀루스가 이 문제를 회피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이온은 바로 그의 정곡을 찔렀다.
“어쨌든 그 정도로 알아봤다는 건 너도 거기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지?”
한마디로 예의 위험한 곳에 너 혼자 갈 생각 아니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이온, 그건…….”
“도서관에 드나드는 이유도 그 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거 아니야?”
속마음을 훤히 들켜 버린 카밀루스는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 이온은 그를 마주한 채로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내 말이 틀려?
눈으로 그렇게 물으며 압박하자 결국 카밀루는 시인했다.
“맞아.”
“그래서? 성과가 있었어?”
계속되는 추궁에 카밀루스는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알고 제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이온이 쉽게 물러나지도, 속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 해도 어설픈 구석이 보이면 이온은 아마 금세 눈치챌 터였다. 솔직히 몸이 심하게 약하다 뿐이지, 말로는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인간 중의 하나가 이온 크레이거였으니까.
그가 한 번 물면 안 놔주는 타입이라는 걸 카밀루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 앞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네.”
“숨기려고 하는 게 나쁜 거야.”
“굳이 그렇게 위험한 걸 알려고 하는 것도 나쁜 거고.”
카밀루스의 일침에도 이온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하는 눈빛을 보냈다.
결국 카밀루스는 피곤하게 논쟁하기보다는 차라리 일찌감치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괜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 역시 그들이 지양해야 할 바이니까.
“알겠어. 내 방으로 가자.”
그 말에 이온이 먼저 침대 밖으로 훌쩍 나가 버리려는데, 카밀루스가 이불을 거두어 낸 이온의 손목을 덜컥 붙잡아 세웠다.
“대신 그 전에 내가 원하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
탑에 대한 설명을 서둘러 듣고 싶은 마음에 조건 같은 게 있으면 빨리 말하라는 의미로 이온이 급히 반문하자, 카밀루스가 먼저 침대 밖으로 훌쩍 나갔다.
잠시 후 이온은 제 시선이 쑥 올라가는 것에 놀라 버렸다.
“앗, 야……!”
카밀루스가 그를 예고도 없이 안아 올린 것이었다. 이런 게 어디 한두 번이겠냐마는, 이번에는 특히 카밀루스의 의지가 굳건했다.
어떤 의지냐 하면…….
“일단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야.”
이온 크레이거를 보기 좋게 살찌우겠다는 의지였다.
느지막이 일어나자마자 에밀리가 챙겨 준 양송이 수프를 먹었던 이온이 작게 반박했다.
“……점심 이미 먹었는데?”
“뭐 먹었는데?”
저를 쏘아보며 어서 메뉴를 불라고 눈으로 강요하는 카밀루스의 시선을 이온이 슬그머니 피했다.
“양송이 수프…….”
“그리고?”
설마 고작 그거 하나 먹고서 ‘점심’이라고 칭한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었으나 바로 그게 정답이었다.
이온이 애먼 눈만 굴리고 더는 대답하지 못하자, 카밀루스는 목뒤의 핏줄이 팽팽하게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애써 웃으면서도 살벌한 협박조로 말했다.
“거부하거나 제대로 안 먹으면 너한테 아무것도 안 알려 줄 거니까, 꼭 따라야겠지?”
“…….”
그러고 카밀루스는 이온을 강제 식당행에 처하기 위해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그들이 복도에 나타나자 아직도 버니언의 선물들을 옮기느라 한창인, 지나가던 하인들이 약간 술렁였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에렌스트 경이나 페드로도 제 주군들 옆에 슥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이온은 저를 신경 써 주는 카밀루스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품에서 내려가겠다고 고집부리는 대신 괜히 손의 얼음 장미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순순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카밀루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마침 1층의 홀을 지나가던 에밀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온 오라버니?”
벌써부터 장난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온이 흠칫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카밀루스에게 안겨 있는 이온의 모습에 평소보다 과하게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장난꾸러기 동생이 보였다.
이온은 순간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온을 놀리는 데는 상당히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이 하필 이 시점에 마주친다니, 이온으로서는 아주 좋지 못한 징후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에밀리가 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
“비렌시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에 카밀루스는 계단을 모두 내려간 뒤 그녀 앞에서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크레이거 양, 그간 격조했습니다.”
제삼자가 보면 아마 두 사람의 인사는 아주 평범하게 보일 테지만 이온의 촉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어진 에밀리의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머, 전하. 저희 오라버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연극 톤의 가식적인 말투.
그녀는 이미 눈앞에 즐거운 일이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파악 완료한 듯했다.
그뿐인가. 이온이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얼음 장미를 보고서는 초록빛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게다가 오라버니 손에…….”
안 그래도 아침에 카밀루스에게서 마법을 배워 얼음 장미를 만들어 줬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틀림없이 이게 어떤 것인지 보자마자 눈치를 챘을 터였다.
이온은 어째선지 벌써부터 눈앞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놀림받느니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 버릴까?
하지만 기절하는 척은 아무리 해 봤자 카밀루스한테는 연기라는 걸 무조건 들키게 돼 있으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시 존재감을 잊고 있던 다른 하나를 지적받았다.
“반지가 있잖아요?”
아차.
당황한 이온이 얼른 손에서 반지를 빼 손에 움켜쥐고는 카밀루스에게 속삭였다.
“나 그만 놔주지? 식당엔 내 발로 걸어갈래…….”
그러나 카밀루스는 이온의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아니 되레 이온을 고쳐 안아 더욱 깊이 제 품에 들이며 에밀리의 말을 받아쳤다.
“가볍게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드린 겁니다. 지나가는 길에 괜찮아 보이는 것이 있기에.”
그런 것치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 있던 것이 아주 수상했지만 에밀리는 속아 주겠다는 의미로 곧장 화제를 넘겼다.
“그럼 지금은 어디로 가시던 중이었나요? 보시다시피 폐하께서 보내신 물건들을 다 치우고 정리하느라 시중을 들 만한 하인들이 많지 않아서요.”
“식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소공작께서 제가 못 지켜본 동안 또 살이 빠져서 먹을 걸 좀 찾으려고 했습니다만…….”
하인들이 없으면 어려울까요.
그런 뒷말을 잇기 전에 에밀리가 박수를 짝, 소리 나게 쳤다.
“역시나 때가 맞으면 이렇게도 되나 봐요. 저도 오라버니를 위한 요리를 할까 했는데!”
“그렇습니까?”
“네, 마침 주방이 빌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에밀리가 잘됐다며 카밀루스의 옆으로 슬쩍 걸음을 옮겨 오더니 손짓으로 주방 쪽을 가리켰다.
가서 같이 요리하자고 꼬시는 뜻임을 알아차린 이온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밀리! 아무리 그래도 대공은 손님이야. 주방에 들어가라고 하는 건 좀…….”
오빠의 핀잔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에밀리가 두 손을 모으더니 구슬픈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온 말은 카밀루스의 자존심을 박박 긁는 소리였다.
“하지만 역시 대공께선 요리를 잘 못하시겠죠? 직접 해 보신 적이 거의 없으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