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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72)화 (172/317)

“하지만 역시 대공께선 요리를 잘 못하시겠죠? 직접 해 보신 적이 거의 없으실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에밀리가 슬쩍 눈동자만 굴려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긴장한 사람은 이온이었다.

에밀리의 도발이 제대로 먹혔는지 이온을 안고 있던 카밀루스의 손에 힘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하며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에밀리에게 말려들어 한번 쿠키를 구운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온의 말대로 손님인 자신이 주방에 들어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온 오라버니를 아무리 좋아해도 극복이 안 되겠죠, 그런 건…….”

‘말이 안 되지는 않지.’

에밀리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이온을 운운하자마자 속으로 자신이 이 저택의 주방에 들어가선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아 스스로를 설득하려던 카밀루스는 곧장 노선을 바꿔 탔다.

지금은 자신의 알량한 체면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온을 먹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온의 하나뿐인 누이 앞에서 그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도.

“……크레이거 양,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것도 아주 얼토당토않은 오해였다.

제가 요리를 못한다니? 카밀루스 클로델은 그런 막말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방금 에밀리의 발언에 자존심에 금이 가 버린 카밀루스가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애초에 극복하니 마니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히 할 수 있지요. 북부에선 제 손으로 직접 몬스터 고기를 다듬고 식사 준비를 한 적도 종종 있는데요.”

카밀루스는 북부에서 살면서 온갖 것에 단련되어 왔다. 단지 몬스터만 쫓아다닌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인구 천여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그것도 하루하루 몬스터한테 목숨을 위협받는데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이고 그런 게 중요한 환경이 아니었다.

일손 하나하나가 귀한 판이라 누구도 게으름을 부릴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다 같이 뭉쳐서 먹고살아야만 했다.

그런 곳에서 카밀루스가 가만히 앉아 남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의호식했을 리가 없었다.

카밀루스가 덫에 걸렸음을 알게 된 에밀리가 모은 손을 꽉 쥐며 다시 두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그럼 그 재능을 저희 오빠 앞에서도 발휘하실 수도 있겠네요?”

“못 할 것 없습니다.”

흔쾌한 대답에 에밀리는 카밀루스를 그야말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멋있어…….’

역시 자신의 오빠에게 어울리는 건 이렇게 이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 쓸개 다 빼 줄 수 있는 카밀루스뿐이었다.

몸이 약한 연인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라니 너무 완벽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 오빠의 까다롭고 예민한 성질머리를 전부 받아 줄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마음으로 되새겨 봐도 이온 크레이거를 구제해 줄 사람은 눈앞의 카밀루스밖에는 없어 보였다.

에밀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 제인에게 잔뜩 신이 난 어투로 외쳤다.

“제인, 대공께 어서 앞치마를 드려!”

그 소리에 놀란 이온이 카밀루스의 품에서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밀리……!”

하지만 에밀리의 하녀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카밀루스의 앞에 앞치마를 공손히 가져다 바쳤다.

오빠의 당혹감을 모르는 척한 에밀리가 손으로 예의 앞치마를 가리키며 카밀루스에게 설명했다.

“제가 그간 전하께 어울릴 만한 앞치마를 준비해 놨답니다. 우리 제인이 이런 쪽으로는 한 손재주 하거든요.”

공녀의 아낌 없는 칭찬을 들은 제인은 기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두 여성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보며 약간의 부담감도 느끼긴 했으나 저의 맞춤으로 준비했다는 앞치마를 사양하지 않고 건네받았다.

이온을 안고 있느라 앞치마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일단 길이가 꽤 긴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확실히 저번이랑 앞치마가 다르네요. 저번엔 너무 작았는데…….”

그에 이온은 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앞치마를 쓴 적이 있다고?”

그러자 에밀리가 제 입을 가리고 카밀루스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댄 채 속삭거렸다.

“오라버니는 저번에 쿠키 구울 때 자세히 못 봤나 봐요.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그때는 제가 봐도 대공께 너무 안 어울렸으니까요.”

“그런 걸 신경 써 주고 계셨군요. 영애의 세심한 배려에 고맙습니다.”

“아니, 카밀루스, 너…….”

이온이 어이가 없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카밀루스가 그를 데리고 저택의 메인 주방으로 향했다.

카밀루스의 얼굴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이온을 동글동글하게 살이 오르도록 하겠다는 결의가.

* * *

에밀리가 요리를 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는 게 지나가다가 막 떠올라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허튼소리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방엔 이미 신선한 재료들이 꺼내어져 있었다. 다만 아직 재료 손질은 덜 된 상태였다.

넓은 주방에 들어온 카밀루스는 일단 이온을 의자에 앉혀 둔 뒤, 주방에 가득한 재료를 보고 열의에 차오른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는 재료를 전부 써도 되는 겁니까?”

많은 식솔들이 사는 크레이거 가문답게 재료는 상상 이상으로 풍부했다.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 고기가 종류별로 있었을 뿐아니라 잡은 지 얼마 안 된 듯 신선한 생선들도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크기가 큰 달걀과 아직 생기를 유지하고 있는 채소, 그리고 풍족한 밀가루까지.

카밀루스가 살던 북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품질의 재료들이 양조차 부족하지 않게 있었다.

에밀리는 요리에 쓸 채소들을 분류하고, 적당 양을 집어 볼에 얹어 놓으며 카밀루스의 말에 대꾸했다.

“물론이에요, 전하. 기왕 하는 거 진수성찬을 차려야 하는 거잖아요.”

“물론 동감합니다, 크레이거 양. 그럼 오늘 메뉴는 뭘로 할까요?”

카밀루스는 메인 셰프께서 의중을 알려 주시면 따르겠다는 듯이 에밀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밀리는 주방에 부려진 재료들을 보며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결정했다.

“최근에 양고기를 얼마 못 먹었었는데, 오랜만에 신선한 게 들어왔으니 램 스테이크에 야채를 곁들이면 어떨까요? 마침 향이 좋은 허브들이 많으니 군내를 잡는 데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소공작이 샐러드를 좋아하니 채소와 과일을 섞어서 샐러드를 준비하고 연어를 얹어도 좋겠군요.”

카밀루스가 가볍게 제 의견도 곁들이자 에밀리의 하녀인 제인이 주방 어디에선가 페타 치즈와 체다 치즈 덩어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여기 치즈도 있습니다, 대공 전하.”

죽이 척척 맞는 세 사람이었다.

에밀리는 카밀루스를 본격적으로 부려 먹기 위해 겉옷을 벗게 했고, 그 역시 순순히 따라서 셔츠의 소매까지 깔끔하게 거두어 냈다.

이후 에밀리는 깨끗한 물에 채소를 씻은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카밀루스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질 좋은 양고기와 기름기에 반들반들한 연어 횟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분주해진 에밀리와 그 하녀, 그리고 카밀루스를 조금 떨어져 지켜보는 이온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잘 어울려.’

카밀루스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이온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제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카밀루스의 앞치마는 민자의 평범한 디자인이라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뭘 걸쳐도 태가 나는 보기 좋은 몸 때문인지 앞치마를 걸치고 있어도 카밀루스는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아주 멋있어 보였다.

이게 다 남들보다 훨씬 큰 키와 너른 등 때문인 것 같았다.

게다가 북부에서 제 손으로도 직접 식사 준비를 했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지 고기를 다듬고 보기 좋게 자르는 칼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연어는 얇고 가는 칼로 저며 예쁘게 포를 떴고, 양고기는 적당한 두께로 잘라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깨끗한 천에 감싸 핏물을 뺐다.

그런 뒤 고기에 곁들일 야채까지 능숙하게 채 썰고, 종류에 따라 척척 손질하는 모습에서 이온은 진심으로 감탄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이온만이 아닌 듯했다.

옆에서 야채를 하나하나 꼼꼼히 씻느라 정신없었던 에밀리가 벌써 고기와 생선을 다듬고, 제가 씻은 것들까지 썰어 둔 것을 보면서 감동 어린 말투로 카밀루스를 마구 칭찬했다.

“너무너무 대단하세요, 전하! 감히 제가 예상하건대, 귀족 남성 중에 대공 전하보다 당근 채를 더 예쁘게 써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대공에게 당근 채를 예쁘게 써는 능력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되었든 이온의 동생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카밀루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별말씀을요.”

물론 에밀리는 그를 칭찬해서 더 많이 부려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카밀루스 역시 에밀리의 초록빛 눈에 비치는 욕망이 무엇인지 전부 다 알았지만 이온을 위해서라는 일념하에 저 역시 눈을 빛냈다.

“다른 거 또 뭘 손질할까요?”

그의 질문에 이번에도 제인이 동글동글한 양송이 버섯이 잔뜩 든 볼을 옆에서 척 내밀었다.

구운 양송이 버섯과 볶은 야채를 넣은 오믈렛이 메뉴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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